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0)
289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2)
– 극장
스크린에서 무르타니에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극장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몰입한 상태였다.
딱 한 명, 짜증을 내는 소년을 제외한다면.
“아! 눈 좀 그만 가려요! 진짜 왜 이러는데요!”
“예끼! 승엽이 너 인마, 저런 거 보면 밤에 잠 못 자고 오줌싼다?”
“묵성아. 그냥 손 치워. 승엽이가 이제 와서 시체 좀 본다고 잠 못 자겠어?”
“하! 진짜 이놈의 호텔은 애들이 크기엔 최악의 장소다. 뭔 시체 볼 일이 이렇게 많은 거야? 이래가지고 애들이 정상적으로 크겠냐? 그냥 개 미친 싸이코로 클 수밖에 -”
“묵성아. 난 여기서 태어났어.”
“…”
“앗! 그래서 아리가 개 미친 -”
“에잇!”
아리가 다시 한번 가인을 걷어찼다. 웃기지도 않은 유치한 대화를 듣던 은솔은 약간 짜증을 냈다.
“좀 조용히 좀 해! 한창 재밌잖아. 이거 완전 히어로 영화네. 진철이가 이렇게 강할 줄 몰랐는데!”
가인이 동의했다.
“그러게요. 형이 원래 이렇게 셌나? 호텔 첫날, 원숭이랑 싸우던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아요. 지금의 형이라면 당시 원숭이 정도는 그냥 10초 만에 다 죽이지 않을까요?”
은솔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축복이 성장했나 봐. 대체 내 축복은 왜 여태 이 모양인지 원…. 탐욕의 손 쿨타임이 차긴 했네. 파티 타임이 아니라 쓰긴 힘들지만.”
스크린에선 호국 대장군이라는 노인이 나와서 직접 멋들어진 언월도과 갑옷을 내리며 차진철의 활약을 칭찬 중이었다. 회의장에서 주변 장수들이 연신 진철을 칭찬하는 장면을 보던 중, 아리는 불길한 생각을 떠올렸다.
‘힘이야 강해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생각의 흐름이 좀 꺼림칙하네. 전쟁터에서 저렇게 싸우면서 시원하다, 즐겁다라….’
*
– 차진철
내가 무르타니에를 때려죽인 시점에서 전쟁의 승기는 아군에 기울었다. 총사령관 할배는 물론 다른 장수들도 죄다 내게 승리의 공이 엄청났다, 폐하께서 엄청난 상을 내리시겠다며 난리인 걸 보니 확실하지.
그때쯤, 영화 상영 시간이 떠오르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의 싸움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직도 1시간 이상 남은 건 확실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대로 대군이 초원 점령하고 끝! 일리가 없다는 의미다. 분명 상상도 못 할 엿 같은 일이 날 괴롭히기 위해 대기 중이겠지.
불길한 감각은 초원에서 보내온 사절단이 군영에 도착하자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그대들, 황제의 자손들에게 알린다. 하늘신의 분노가 초원을 가득 메웠나니-”
사절단에는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늙은 여인이 한 명 끼어있었는데, 초원의 주술사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 주술사가 와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자 장수 한 명이 버럭 화를 냈다.
“여봐라! 당장 저 늙은 계집의 목을 치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어허! 전쟁 중이라 해도 사신을 베는 법은 없는 게야!”
“하늘의 신께서 충성스러운 사냥개를 대지에 내리실지니…. 그분의 분노가 벼락과 함께 대지에 임하리라….”
당장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하늘신의 분노가 지상에 강림한다는 소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시하면 그만이나 ‘영화적’으로 생각하자 슬슬 느낌이 왔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위기’가 아니겠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옆에 놓인 화려한 언월도를 강하게 움켜쥐자 옆자리의 장군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차 장군?”
“낌새가 좋지 않은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백 장군, 초원의 주술사들이 유명합니까? 혹시 무슨 악마를 소환한다 이런 소문은?”
“하하! 차 장군, 농담이시지요? 그들이 불러낸 악마가 깃든 존재가 무르타니에인데 장군께서 베시지 않았습니까.”
무르타니에의 정체는 주술사들이 불러낸 악마가 깃든 존재였구나. 그렇다면 그다음 위기 또한 비슷한 유형인가?
곧 초원의 사절단이 돌아갔다.
전략 회의에선 2주일 동안 병사들의 피로를 해소한 후에 진군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무르타니에라는 큰 장벽을 넘은 만큼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눠주겠다는 말도 들려왔다.
합리적인 결정이다. 본래 전쟁 중에도 여유가 생겼을 때는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야 하는 법이지. 딱 하나 아쉬운 점은 그 술과 고기를 얻어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나는 먹어볼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답게 눈 한번 깜빡이니까 2주가 지나갔거든.
솔직히 이 순간은 진짜 엿 같았다. 아니, 나한테 고기 한 점, 술 한 모금 주는 게 그렇게 아깝나? 회의 끝나고 3분 만에 또 전장이 말이 돼?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르타니에와 싸우면서 생긴 부상은 완벽히 사라졌다. 내 체감 시간과 달리 영화 속에선 2주가 흘렀기 때문인 듯하다.
순식간에 다시 나타난 광활한 대초원을 보며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내가 말 위에 있음을 알고 당황했다. 다행히 대단한 명마였는지 말이 알아서 주변과 발맞췄기에 장수가 말에서 떨어지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지는 않았다.
광활한 대초원에 결집한 수천의 군세가 나아가는 웅장한 광경. 그 끝에서 –
벼락의 신이 대지에 강림했다.
*
벼락의 신은 쿠르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초원의 유목민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아마 맞겠지. 분명 늑대와 비슷하게 생긴 생물이긴 했다. 덩치가 코끼리보다 크고 벼락을 휘두른다는 점만 제외하면.
“으아아악!”
“마, 막아라!”
“방벽 뒤로 후퇴! 후퇴!”
“자, 장군님!”
쿠르타가 날뛰기 시작한 지 10분은 흘렀나? 그 잠깐 사이에 제국의 군세는 흡사 호랑이를 만난 멧돼지 떼처럼 정신없이 도망가느라 바빴다.
쿠르타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사방에 벼락이 내리치며 병사들이 시꺼멓게 타버렸다. 앞발을 가볍게 휘두르자 병사 두 명이 한꺼번에 으스러지고, 가볍게 뛰어오르자 10m도 넘는 거리를 단박에 좁히더니 막사 하나를 무너트렸다.
너무 기가 막힌 광경이라 화를 낼 기운도 남지 않았다. 저 존재, 평범한 인간 군대가 수천이 모인다고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숫자가 많아 봐야 바싹하게 구워진 인간 고기만 늘어날 뿐.
어차피 내 대사 바깥에 들리는 것 맞지?
“안내인 이 개 씨벌놈아! 저걸 나보고 잡으라고?”
*
벼락을 휘두르는 늑대가 등장한 순간 극장은 난리가 났다.
“와! 진짜 미쳤냐? 저걸 이기라고? 안내인 이 개새끼 안쳐나오냐? 어디 숨었어?”
“이건 심하잖아요! 무르타니에까지는 그래도 사람이니 그렇다 치는데 저 괴물은 대체 뭔데!”
묵성과 송이의 고함, 그 옆에서 넋 나간 표정으로 스크린을 보던 아리가 가인에게 물었다.
“가인아….”
“…”
“네가 가면 이길 것 같아? 참고로 난 절대 못 이겨.”
“빙의만 통하면야 한방이지.”
“신의 사냥개라는데? 반쯤 신 아니야? 격이 엄청나게 높을 것 같은데.”
“그럼 못 이기겠네. 강림을 쓰긴 좀 그렇고.”
“너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니야?”
“아니,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저런 건 딱 봐도 싸우라고 내보낸 놈이 아니지 않아?”
아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비슷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미 호텔에서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호텔은 때때로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거나,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적을 내보내곤 한다.
보통 그런 경우 올바른 정답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아마 소환 자체를 막거나, 소환 과정을 방해해서 훨씬 약한 상태로 나타나게 해야겠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저런 괴물을 아무 대가 없이 소환할 수 있다면, 초원의 세력이 왜 멍청하게 무르타니에가 죽으며 패전 위기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겠는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음이 분명하다.
주술사들이 단체로 자살했거나 왕족이 직접 목숨을 바쳐 제물이 되었을 수도 있고,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극도로 희소한 재료를 소모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대가를 다 치렀을 수도 있다.
당연히 이런 주술적 절차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은솔이 아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초원의 사절단 말이야. 걔네가 돌아간 후에 호국 대장군이 2주 쉬자고 했지?”
“그렇지.”
“그게 실수였어? 그 사이에 저 늑대를 소환한 것 같은데.”
“내 생각은 그래.”
“다음에 들어가는 사람은 초원의 사절단이 돌아간 후의 전략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의견 내야겠네. 지금 당장 몰아치자고 해야겠지.”
“사절단이 돌아간 후의 회의라면 주인공이 무르타니에를 처치한 시점이잖아? 주인공의 발언권이 아주 강한 타이밍이지. 당장 몰아치자고 하면 회의도 그렇게 흘러갈 거야.”
자연스럽게 ‘다음’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 중인 동료들을 보며 가인은 한숨을 쉬었다. 다들 저 압도적인 괴물이 등장한 시점에서 실패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호텔 파티 전체가 들어갔다면 어떨까?
송이가 늑대의 감각을 비틀고, 엘레나가 불길한 상상으로 지원하면서 진철이 별을 주둥이에 쑤셔 박든지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저 영화에 들어간 존재는 유산 없이 축복 하나 있는 차진철뿐이다.
가인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실패였다. 단지 그다음 들어갈 사람이 십중팔구 자신이었기에 한숨 쉬었을 따름이다.
*
– 차진철
… 자연스럽게 느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스리슬쩍 내게 모여든다. 병졸은 물론, 장군들조차 덜덜 떨며 나만 바라보았다. 심지어 호국 대장군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던 총사령관 노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저런 엄청난 존재를 쓰러트릴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나이기 때문이다. 나일 수밖에 없다.
범속한 이가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
인간이 이길 수 없는 대적과 맞서 싸우는 자.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이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자.
그것이 곧 영웅이며, 주인공은 곧 영웅이니까. 그랬기에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군.”
“… 차 장군.”
“술 한잔 따라주시겠습니까?”
대장군은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부탁대로 술잔을 채웠다. 나는 살면서 한 번은 꼭 해보고 싶던, 이런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