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3)
292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5)
부유하는 스크린으로 가득한 기묘한 장소, 중앙의 테이블에 양복을 입은 장년의 남성과 이형의 존재, 그리고 만두 머리를 한 소녀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소녀였다.
“대체 저 애는 왜 하필 지금 끼어든 거야! 하필 영화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이형의 존재는 태연한 태도로 답했다.
“뭐, 당신이 이미 영화 내용을 편집했으니 끝난 문제 아닙니까? 관객들은 마녀가 개입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난쳐? 내부 인물은 다 알고 있잖아? 보나 마나 나가자마자 회의하면서 다 알게 될 텐데!”
“그러면 한 번 더 편집하시지요. 영화 끝날 때 차진철의 기억도 ‘편집’하면 그만 아닙니까. 지금의 우리에겐 그 정도의 권한은 있으니까요. 뭐, 마녀가 깨어나기 시작했음을 숨기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왜 의미가 없어? 성질상 마녀는 호텔 파티 전원이 그녀에 관한 기억을 잃으면 존재의 기반을 잃고 붕괴할 텐데?”
이형의 존재, 상인은 코웃음을 쳤다.
“마녀의 어설픈 각성을 숨기는 게 호텔 파티에 도움이 되나 안되냐를 말한 게 아닙니다. 대체 당신이 저들을 왜 돕냐는 거죠. 그러면 저들이 당신을 부활시켜줄 것 같습니까? 아무리 봐도 다음 순번은 정해졌는데.”
상인이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자신들이 구태여 끼어들 만한 일도 아니었다. 관문의 방에 갇혀있던 존재가 기이한 마술을 통해 복제체를 외부에 내보내는 것. 처음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권이 있는 후원자들 또한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또한 호텔 진행의 일부이니라. 극복하면 성장의 밑거름이 될 뿐.’
마녀가 부리는 수작질로 인해 차진철이 비틀린다? 호텔 파티가 위험에 빠진다? 상인은 코웃음을 쳤다.
‘알빠노?’
반면, 소녀는 후원자들의 저런 태도가 굉장히 그럴듯하면서도 무책임한 태도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탈출한 존재는 항상 사고를 쳤으니까.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이 파티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이들이 2층을 넘어서 3층, 그 끝에서 위대한 손을 마주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잠시, 포기하지 못한 생전의 꿈을 어렴풋이 떠올리던 소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소녀를 관찰하던 상인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바깥에 대한 미련이 남았습니까? 다 내려놓을 때도 됐는데 말입니다.”
“난 너랑 다르니까.”
“바깥에 대한 미련을 접으세요. 호텔도 꽤 즐거운 장소 아닙니까? ”
“… 그런 말을 너에게 들으니까 좀 좆같네.”
“하하! 왜 그러십니까? 아하! 설마, 제가 생전의 당신을 죽였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
소녀의 오른팔에서 새하얀 검이 튀어나왔다. 크리스털로 조각한 공예품과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검이 시퍼런 빛을 토해내는 순간, 소녀는 두 번의 칼질로 상인을 7조각으로 베었다.
…
곧, 허공에서 살점이 달라붙으며 모든 충돌을 무위로 만들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소녀는 한숨 쉬었다.
‘또 이 작자의 장난질에 말려들었네. 이걸 가지고 몇 달은 놀려먹겠구나.’
그들은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실패의 대가로 지옥에 떨어지는 대신 영원한 봉사를 약속한 존재들이니까.
“하하하! 이거 감정적인데요? 하, 이래서야 제가 ‘먹었던’ 당신의 오른손이 무슨 맛이었는지 설명해야 -”
“아 진짜 이 변태 외계인 새끼가!”
— 탁!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존재가 탁자를 두드리자 소녀와 상인의 눈이 동시에 ‘안내인’을 향했다.
“두 분 다 그쯤 하시지요. 사실, 마녀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생겼답니다.”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든 보상 말이지요?”
“쿠르타를 쓰러트린 시점에서 히든 보상의 조건을 충족했는데, 정작 보상을 줄 수가 없는 희한한 일이 생기고 말았지요. 탈주자가 ‘그런 식으로’ 차진철의 몸을 변이시킬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소녀는 머리를 싸매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까?”
안내인의 입에서 자그마한 미소가 생겨났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을 들은 소녀와 상인은, 회의의 종료와 함께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똑같이 생각했다.
‘정말 극장 안내인 이 새끼가 제일 병신이구나!’
*
– 차진철
“폭군을 베어라!”
혼돈으로 가득한 전장 한복판, 수천의 군세가 수도를 지키는 외성을 공략하는 공성전! 그 광경을 뒤쪽에서 지켜보며 있는 힘껏 고함지르자 사방에서 열렬한 호응이 일어났다.
“와아아아! 뚫어라!”
으아…. 이거, 스펙타클한데?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군대가 공성용 무게추나 거대한 목재 탑을 만들어가며 수도를 공략하는 장면은 장관 그 자체였다!
감탄하던 차, 호국 대장군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차 장군!”
“말씀하시지요.”
“이 전쟁의 향방, 어떻게 생각하나?”
… 모르지. 내가 본다고 뭘 알겠냐? 그냥 대충 훑어보기로는 우리 쪽이 유리한 것 같긴 하지만 잘 모를 때는 겸손한 대답이 좋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좋지 않아! 아주 좋지 않아!”
“그 말씀은….”
“장군, 이 전쟁이 길어지면 누구에게 유리하다 생각하나?”
“황제겠지요.”
“당연하지! 제국 남부와 서부의 군세가 지금도 올라오고 있네. 그들이 합류하면, 이젠 역으로 우리가 포위당하는 꼴이 될 거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하네. 성벽을 무너트리고 황궁을 점거해야지!”
시선을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수도의 성벽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불꽃이 매캐한 연기를 만들어냈고, 이미 무너진 외벽도 적지 않았다. 서로 원군이 없다면 아군의 승리가 이미 확정이다.
하지만 호국 대장군의 말은 명확했다. 황제의 원군이 오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지금이 내가 나설 타이밍이다.
*
다리에 힘을 주며 지면을 박차자 전신이 하늘을 날아오를 듯 비상했다.
딱 다섯 걸음.
성벽에 도착하는 데 필요했던 걸음의 숫자다. 원래도 인간을 초월했던 내 육신이나, 마녀가 알 수 없는 조화를 부린 지금은 도무지 이 세상 생물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 장군? 지금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당황하는 아군 장수의 말을 무시하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막, 막아!”
질척한 액체가 덮친다. 끓는 기름인가? 의미 없다. 쿠르타의 벼락을 버텨낸 내 몸이다.
— 팅!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연거푸 내 몸을 두들겼다. 역시 의미 없다. 지금 내 몸은 흡사 전신에 철판을 두른 듯한 강도를 자랑했으니까.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부리를 붙잡고 두어 번 몸을 허공으로 날려 성벽 위에 도착했다. 주변의 병사들은 아예 넋이 나간 채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고민이 들었다. 초원의 전장과는 좀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민족과의 전투였으니 무작정 베면서 움직였지만, 지금은 일종의 내전이다.
전후의 민심 같은 요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병사를 대량으로 참살하기보단 압도적인 힘을 보여 항복을 유도할 필요가 있겠지.
천천히, 천천히 성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화살은 몸으로 튕겨냈다.
거대한 돌을 굴리길래 주먹으로 돌을 부쉈다.
창을 들고 덤비는 병사는 창째로 들어서 옆으로 밀쳐냈다.
이윽고 적들의 눈에 내가 강한 장수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비치기 시작했을 때, 성을 지키는 수백의 군인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이게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인가?”
…
“기회를 줄 테니 더 해보라.”
느릿하게, 여유롭게 성문까지 걸어간 내가 성문을 무너트리는 순간까지도 –
전장의 그 어떤 인간도 내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
새삼스러운 이야기인데, 전장이 ‘방벽’에서 ‘수도’로 바뀐 시점에서 영화의 장르가 많이 바뀐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첫 번째 작품도 마찬가지였지.
수도를 무너트리는 공성전이 방벽의 수호자, 차진철 편의 하이라이트였다. 제국의 방벽을 지켜왔던 군대가 수도 내부로 들어선 후로는 별다른 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전이니만큼 대장군은 약탈을 엄금했고, 우리는 곧 황궁을 목전에 두었다.
“슬슬 결말이려나?”
영화 상영시간을 고려해도 이젠 슬슬 끝날 때가 됐다. 이 피곤한 영화에 ‘빌런’이 아직도 남았다면 황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런 예측조차 틀렸다.
황궁 깊숙한 장소에서 목매단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니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제국의 파멸을 앞둔 순간 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연명하느니 제국의 황제로서 삶을 끝냈다. 영화 속 진천 제국 황제 또한 자살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으리라.
황궁 한편에서 ‘전후의 상황’에 대해 논하는 장수들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누가 제국을 홀라당 먹을지 자기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겠지. 물론….
영화가 끝나가는 지금, 이후의 일은 내 알 바 아니다.
“이봐.”
“예? 장군님?”
“술이나 한잔 가져와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황제의 시신 옆에서 마시는 술 한잔의 맛은 제법 운치 있게 느껴졌다. 창밖의 풍광을 바라보며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순간을 기다렸다.
…
“좀 늦네. 설마 여기서 보스 또 나오는 거 아니지? 호텔아, 그런 전개는 뇌절이다.”
“역시 그렇지요?”
“아 씨발! 또 뭔데? 미친!”
화들짝 놀라서 뒤로 돌아선 순간, 목 매달린 황제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니 진짜 영화 각본 짠 새끼 누구야? 여기서 갑자기 좀비물? 설마 황제가 알고 보니 주술사 이딴 전개냐?
옆에 눕혀둔 창을 집어 들며 자세를 세웠다. 황제, 저 새끼가 네크로맨서면 난 팔라딘이다! 투지를 불태우며 창을 반 바퀴 회전시켜 –
“아니, 아니! 잠깐만요!”
회전시키며 내뻗은 창날이 일격에 황제의 머리를 으스러트렸다. 한데, 방금 저놈 뭔가 이상한 말을 –
“하!”
눈앞에서 질척하게 흩어진 인간의 살점이 날아오르고, 사방에 흩어진 뼛조각이 몰려들며 다시 황제의 머리가 완성되었다. 황제가 이 정도로 사악한 흑마법을 휘두를 줄이야!
그렇다고 한들 패배할 내가 아니다. 흑마법사 수준이 아니라 리치킹, 마왕이라 해도 지금 내 힘이라면 –
“아니, 말 좀 들으세요! 영화는 이미 끝이란 말입니다!”
‘영화?’
“대체 뭐지? 등장인물이 영화라는 단어를 꺼낼 리가….”
“자, 자. 차진철 배우, 생각해보십시오. 드라마에 꼭 나오는 필수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리고 넌 누군데?”
“보통 한국 영화에선 없는 파트긴 한데, 인도나 베트남 쪽에선 영화 상영 중에도 집어넣는 파트죠. 그래서 집어넣었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
“자~! 전방에 글자 보이시죠? 친절하게 띄워드렸으니 읽어주세요.”
전방, 허공에 뜨기 시작한 글자를 보고 나는 넋을 잃었다.
“이걸 읽으시면 끝입니다.”
“… 진짜 개 병신같은 영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읽어주세요.”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모, 모, 모, 모….”
“한글을 읽는 법을 모르십니까?”
에이 씨발! 읽고 끝내자!
“모근 강화! 모낭 회복! 머리 빠짐 개선! 두피 회복! 두피 노화 예방! 이 모든 효과를 담아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해피해피 머리나라! 호텔의 특산품, ‘솟아! 솟아!’ 꼭 구매 바랍니다. 마지막 단어는 같이 읽어볼까요?”
“삼만! 구천! 팔백 원!”
“삼만! 구천! 팔백 원!”
정신이 나갈 때쯤, 머리에 질척한 감촉을 느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조종 중인 황제의 시체가 손만 들어서 샴푸인지 약인지 모를 무언가를 내 머리에 발랐다.
“… 뭐하냐?”
“하하 참, 아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십니까?”
“왜?”
“피해 가는 게 정석인 쿠르타를 때려잡고 히든 보상 조건을 충족하셨는데, 정작 그 보상을 받는 게 불가능한 몸이 되셨으니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히든 보상? 보상을 받는 게 불가능한 몸?”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머리가 간지럽다. 무언가 툭 툭 솟아나는 기이한 감각이 든다 싶더니 머리 쪽의 비늘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벽력을 견디는 투사의 털’을 획득하셨습니다!]시야를 가득 채운 엔딩 크레딧 속에서….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