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6)
295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7)
– 김묵성
영화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학가를 연상시키는 번화한 도시에 서 있었다. 사방에 가득한 시민들을 관찰하던 중, 현 상황에 관한 간략한 정보가 머리에 주입되었다.
“블랙 카페 25시?”
지금 내가 가야 하는 커피숍 이름이다.
천천히 머리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정리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저주의 방이라면, 그냥 그놈의 커피숍을 안 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겠지.
하지만 그럴 수야 없다. 이후 심사위원의 평가도 고려하면, 시나리오적으로 가야 하는 장소는 가야 한다.
커피숍 입구엔 오늘은 쉰다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물론, 나하고는 상관없는 팻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부엔 이미 네 명의 사람이 모여있었다.
“크흠. 내가 좀 늦었군. 김묵성이라 한다.”
“아닙니다. 다들 조금 전에 모였습니다. 어르신,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모임을 만든 사람, 드라마 작가라는 도인호가 웃으며 손짓했다. 테이블에 앉아 도인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확인했다.
40대 초반의 기품있는 분위기의 중년 여성, 박수미.
20대 초반의 휘둥그레질 정도의 아리따운 아가씨, 한유리.
20대 후반의 제법 잘생긴 청년, 차은표.
여기에 60대 후반의 ‘지적인 노인’, 김묵성.
이렇게 네 사람이 이야기꾼이다. 찬찬히 주변을 살피고 있자 도인호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무서운 이야기’는 여러분이 살면서 겪은 무서운 경험을 털어놓기 위한 모임입니다.”
한유리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꺼낸 이야기를 작가님이 모으시는 건가요?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 줄거리가 될 수도 있겠죠?”
도인호는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이 부분은 사전에 알려드렸지요? 지금이라도 싫으신 분은 나가셔도 됩니다.”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도인호는 다시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여기 모인 네 분은 모두 살면서 흔치 않은 일을 겪으셨습니다. 나름대로 진위를 가리기 위한 절차도 거쳤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듣다 보면 이게 말이 되나? 싶게 마련이죠.”
차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거짓말이니 참말이니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까?”
“은표 군, 바로 그렇습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요? 순서는 시계방향으로 합시다. 박수미 님부터 이야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요.”
첫 번째 화자, 박수미는 차려입은 옷차림이나 의자에 올려둔 가방 등에서 부잣집 귀부인임이 드러났다. 그녀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더니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제 신혼 시절 이야기랍니다. 남편은 자그마한 사업체를 운영 중이었는데, 그 시기는 경기가 좋고 사업도 무척 잘 풀렸지요. 부부관계도 무척 원만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게 말했죠.”
공간이 흔들린다.
…
뭔데 이거? 갑자기 이게 뭐야?
*
– 첫 번째 이야기, 신혼의 추억
사방이 흔들리며 멀미 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처구니없는 현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즉시 욕이 나왔다.
“아 진짜 개 같은!”
“수, 수미야?”
눈앞의 젊은 남자, 박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뜬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일단 대충 수습하자.
“어, 어멋! 죄송해요. 방금 갑자기 발에 날카로운 게 박혀서….”
“날카로워? 가시인가? 내가 한번 봐줄까?”
박상호의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태도를 보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상황을 재확인하기 위해 잠시 화장실로 들어왔다. 거울에 비춘 것은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우아한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다. 아, 제기랄 진짜!
*
영화가 시작한 지 2분 만에 ‘충격적인 전개’가 시작하자 극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저, 저거 뭐야! 지금 할아버지가 저 누나로 바뀐 건가?”
입을 떡 벌린 가인을 보며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영화 속 영화 같은 구성이네요. ‘무서운 이야기’라는 영화 자체가 자그마한 네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것 같아요. 우리는 개별 단편에서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데.”
승엽이 당황하며 말했다.
“‘박수미’라는 분의 이야기에선 우리가 저 누나로 변하는 거죠? 다른 분 이야기에서도?”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 이야기꾼들이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들어가는 식이니 그 인물의 과거 모습으로 변하나 보네.”
그 말과 함께 아리가 가인을 툭 툭 건드렸다.
“니가 이런 거 잘하겠다. 다른 사람 몸에 많이 들어가 봤잖아.”
“…”
“이번엔 가슴 만지지 말고 -”
“뭐, 뭐라는 거야 대체! 그보다 네 번째 이야기는 뭐야? ‘우리’도 이야기꾼인 것 같은데,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가 직접 지어내야 하나?”
“글쎄….”
*
“진짜 너무 개 같지 않냐?”
“수, 수미야? 괜찮아?”
밖에서 걱정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저히 욕을 참을 수 없었다. 갑자기 아무 힘 없는 20대 아가씨로 변했는데 욕을 어떻게 안 하냐?
더 심한 욕을 참은 건, 첫째로는 밖에 남편이 있고 둘째로는 거울에 비치는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우아하고 기품있는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박수미 : 좆 같다.
영화 속 기억에 들어온 상태니 혹시 사라졌을까 확인한 결과 대화창은 멀쩡했다. 이름까지 등장인물로 변한게 엿 같긴 했지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나 뿐인 게 문제긴 한데, 영화 속 기억에서도 축복은 동작하는 듯하니 다행이다. 아마 유산도 쓸 수 있겠지.
— 콰직!
아브라스 전사의 팔도 멀쩡하다.
우습게도 오른손의 외견은 20대 아가씨의 아리땁고 가녀린 팔로 바뀐 상태였는데, 그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자 욕조가 터져나갔다.
밖으로 나와 걱정하던 박상호를 안심시킨 후, 대화를 시작했다.
“수미야, 오빠가 그동안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
저 ‘오빠’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아서 한 대 칠 뻔했다.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시작하자마자 아브라스 전사의 분노한 주먹이 박상호의 머리를 터트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놈의 이야기에 집중하자.
박상호는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에 안착했다. 이후로 오랜 세월 고향을 잊고 도시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다행히 제법 사업 수완이 있어 상당한 부를 모은 것은 물론, 박수미처럼 아리따운 아내도 만날 수 있었다.
… 방금은 홍조를 지으며 ‘어머, 당신도 참!’ 같은 말을 했어야 하는 타이밍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자 박상호가 어딘가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에 흐르는 피가 고향에 돌아가자고 말하더라. 사람은 참 신기해. 그렇지?”
“…”
“수미야?”
“젊은 놈이 아주 철학자 나셨네!”
“수, 수미야?”
“… 바, 발이 따가워서 실수했어요. 말씀해보셔요.”
어느 날, 박상호는 갑자기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지난 10여 년간 고향의 가족과 연락을 아예 끊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자리 잡은 후에는 편지도 두어 차례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만나는 것과 편지가 어떻게 똑같겠는가.
“그래서 이번 휴가 일정을 잡은 거야.”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뵈려고요?”
“맞아. 그, 그런데….”
아따! 이놈 참, 말 답답하게 하네!
“그냥 시원하게 좀 말해봐. 말해봐요.”
“수, 수미 네가 부모님을 보고 좀 놀랄 것 같아서. 종종 어릴 때의 기억을 회상하곤 했는데, 부모님이나 집안사람들이 좀…. 특이한 분들이거든. 알다시피 시골 노인들이니까.”
상호야, 필시 느그 부모보다 내 나이가 더 많을 터이니 잡소리 좀 그만해라.
그리고 젊은 놈들은 꼭 노인이라 이상하다는 편견에 가득한 소리를 지껄이는데, 그 이상한 놈들은 보통 젊을 때도 개 같은 놈들이었단다. 늙어서 이상해진 게 아니라 이상한 놈이 늙은 건데 그걸 구분을 못 하고 참….
크흠! 영화 내용에 집중하자. 이것으로 ‘남편’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살다 살다 남편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안내인 제 입으로 ‘공포영화’라고 한 이상, 보나 마나 기괴하고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겠지. 필시 저 박상호란 놈의 집안사람들이 어딘가 비틀린 족속들임이 틀림없다.
관리국 경험을 되새기며 다양한 가능성을 가늠해 봤지만, 너무 많은 가능성이 떠오르니 무엇 하나로 쉬이 단정할 수 없었다. 가 봐야 알 문제다.
…
이후, 한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무의미한 장면을 ‘생략’하는 혜택이 사라진 것은 정말이지 아쉬웠다. 3일 후, 우리는 열차를 타고 박상호의 옛 고향으로 떠났다.
박상호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험했다. 열차를 타고 강원도에 도착하는가 싶더니, 다시 택시를 타고 강원도 시골로 움직였다. 여기가 고향인가? 했더니 그 시골에서 3일에 한 번 온다는 버스를 타고 다시 또 산골짜기로 움직였다.
위치 자체가 위협적이다. 번화한 장소까지 걸어서 나갈 방법은 아예 없다. 지금 내가 들어온 20대 여성의 체력으로는 더더욱 무리다.
자가용은 남편이 처음부터 가져오지 않았고, 버스는 3일에 한 번 온다. 이 정도 교통 상황이면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외부에서 도우러 올 수 없는 장소였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것은 기본에 전기도 수시로 끊긴단다.
이쯤 되자 솔직히 헛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시대적 배경이 1990년대 같은데, 대한민국에 그 시기까지도 이런 터무니없는 시골이 남아있었나?
참, 공포영화 진행하기 딱 좋은 위치다.
*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가! 내, 상호에게 종종 들었단다.”
“어이고! 상호 이놈아! 어찌 이리 곱고 참한 아가씨를 얻었는고? 이 애비가 다 늙어서 눈이 호강하는구나!”
“아버지….”
시부모와의 첫 번째 만남은 생각보다 감동적이었다.
‘특이한 분들’이라는 남편의 말과 달리 시부모는 두 사람 다 날 만나자마자 너무나 친절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도시 아가’가 어쩌다 이런 험한 산골에 왔냐며 고생 많았다고 훌쩍였고, 시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칭찬하느라 바빴다.
이상한 일은 남편의 형제자매가 나타나며 시작됐다. 축사 근처에서 산발한 청년이 날 유심히 바라보길래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청년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태도를 보이며 도망간 것이다.
— 탈칵!
“음? 저분은 -”
“시, 신경 쓰지 말거라. 명진이가 본래 수줍음이 많단다.”
“어떤 분인가요?”
남편이 슬며시 내 손을 잡고 – 이 새끼 진짜 닭살 돋게! – 속삭였다.
“내 동생인데, 어릴 때부터 행동이 좀 특이하더니 지금도 저러네. 크게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이따가 말해보지.”
이상한 사람은 박상호의 남동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아가씨, 안녕하셔요.”
어딘가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의 중년 여인, 박상호의 6살 많은 누나라는 박혜영은 적어도 남동생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날 보자마자 도망가진 않았으니까.
집중해서 주변을 살피는 나와 달리 박상호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축사나 창고 등 주변의 장소와 자신의 기억을 대조하며 들뜬 모습을 보다 보니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고, 박상호의 가족들도 제법 즐거워했으니까.
저녁 무렵, 서서히 박상호가 말했던 ‘이상한 점’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이다.
“어머니, 손질은 제가 -”
“어이구 아가! 도시 아가가 손에 흙 묻히는 것 아니다! 걱정하지 말고 방에 가거라. 혜영이 이 망할 것아! 네가 늦으니 도시 아가가 나온 것 아니냐!”
‘시어머니’는 내가 부엌에서 일하려 하자 기함하며 말렸다.
아무리 며느리가 예뻐 보인다 해도 이게 일반적인 반응인가? 모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이렇게 대했으면 세상에 시집살이라는 단어가 생기지도 않았겠지.
“아가씨, 죄송해요. 걱정하시지 말고 들어가셔요.”
남편의 누나, 시누이의 행동도 만만치 않았다. 이 태도는 남동생의 아내, 올케를 대한다기보다는 거의 하녀가 귀족 집안 아가씨를 대하는 듯하다.
… 조금 더 확인해보자.
“어멋, 정말 괜찮다니까요. 제가 대파라도 썰어드릴까요?”
— 탁! 챙!
“…”
“…”
“… 아가, 놀랐겠구나. 네가 칼을 놓칠까 봐 당황했단다.”
“아, 아가씨. 칼날이 번쩍여서 어머님이 놀라셨나 봐요. 정말 들어가셔도 된답니다. 저녁은 제가 잘 준비해드릴게요.”
방금, 무슨 일이 생겼지?
내 손이 부엌의 ‘칼’에 닿는 순간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표정이 동시에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왕족의 딸 모시듯 하던 시어머니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서 내 손을 쳐내고 칼을 가져갔다.
이 집은 어딘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