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7)
296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8)
– 김묵성
기이한 분위기의 부엌을 나오자마자 박상호를 만났다.
“음?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뭐? 아니, 네?”
박상호는 삽시간에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당신에게 일이라도 시켰어?”
“아니에요. 그냥 뭐라도 도와줄 게 없나 들어갔는데, 어머님이 괜찮으니 방에 가서 쉬라고 하셔서….”
내 말을 들은 박상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렇구나. 당신도 참, 마음이 고와도 너무 곱다니까!”
“… 아이, 참~!”
아 씨발! 진짜 이런 대사를 쳐야 하는 거냐?
닭살 돋는 대화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박상호가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정말이지 매 순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당신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필요 없어요! 알지? 그냥 방에 가서 쉬어. 세상에 누가 꽃으로 흙을 닦아?”
이게 90년대 감성이냐? 사실 90년대 기준으로도 좀 개 같은 발언 아니냐? 신혼이니 아내 사랑이 하늘을 뚫는 건 좋은데, 부엌일이 흙 묻는 천한 일이면 니 어머니랑 누나에게도 시키지 말든가!
그 후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방 밖으로 나오기만 해도 다들 들어가서 쉬라고 야단인데 뭘 하겠나. 시골에서 차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맛깔나는 저녁을 먹은 후,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늦은 시각, 밤이 다가오자 한 가지 개 소름 돋는 게 있었다. 진지하게 앞으로 나올지 모르는 괴물이니 뭐니 보다 10배는 소름 돋는 게 있었어. 설마 ‘남편’이 그렇고 그런 일 하려고 드는 건 아니지?
미안한데 그것까진 못 참는다. 설령 나는 참아도 내 아브라스 전사의 팔이 참지 못할 게 분명하다.
다행히 박상호는 방음도 잘 안되는 시골집에서 그런 요란한 일을 벌일 생각은 없는지 얌전히 옆에서 잠들었고, 나는 이 새끼가 뭔 짓이라도 할까 봐 새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다.
…
— 끼이익!
뭐냐? 이제야 시작이냐? 슬며시 눈만 돌려서 한지를 덧댄 부실한 문 쪽을 바라보자 ‘누군가’가 방 내부를 훔쳐보는 장면이 보였다.
누구지? 살인마? 괴물? 기묘하기 짝이 없는 시골 사람들?
확인은 해야겠는데, 내가 가긴 좀 불안하다. 가까이 갔더니 갑자기 칼로 푹 찌르면 어떡하냐? 그래. 그런 위험한 일은 남자 새끼가 해야지.
— 툭!
“으응…. 무슨 -”
“쉿! 밖에 누가 있어요.”
박상호의 눈이 확 뜨이며 문 쪽을 보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나와 달리, 박상호는 보자마자 알았다.
“아니, 저 새끼가 진짜!”
내가 조심스럽게 알린 게 무색해졌다. 박상호는 즉시 일어서서 어두운 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누군가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붙들려서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너 이 새끼, 대체 왜 이 지랄인 거냐?”
“끄으으윽!”
한참 동안 누군가를 구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나는 혼란에 빠졌다.
좀 이상한데? 방금 느낌은 분명히 ‘위기’ 아니었나? 저놈이 칼 들고 덮쳐야 하는 것 아니었어? 이렇게 순탄하게 –
— 덥썩!
다음 순간,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벽’이 뒤집히더니 뒤에서 단단한 손이 튀어나온 것이다!
시골집에 이따위 장난질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로 전사의 팔에 힘을 주고 –
힘을 주고? 힘을 줘서 뭘 어찌 해야 하냐? 날 납치하려는 족속의 팔다리를 으스러트려? 그런 식으로 진행하면 병신같은 전개라고 까이는 것 아닌가?
이 고민 자체가 날 함정에 빠트리고 말았다. 입을 덮은 천은 독한 수면제로 적셔져 있었고, 나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깨달았다.
로맨스 영화에서 엘레나가 이래서 당했구나. 하지만, 깨달았다 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 촥!
“아가! 이만 일어나거라!”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맞으며 깨어나자마자 생각했다. 영화 전개가 엄청나게 빠르구나.
물리적인 시간이 빨리 흘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혜택’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겪은 사건 대부분은 영화 내에선 길어야 10분 내로 정리될 게 분명하다.
시작과 동시에 남편과 대화 끝에 시가에 가기로 결정.
시가에 도착해서 열띤 환영을 받다가 부엌에서 특이한 일을 경험함.
밤에 자다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깨었다가 납치당함.
진짜 딱 세줄 컷이네. 이렇게 엽기적일 정도로 진행이 빠른 이유는 4개의 단편이 하나의 영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겠지.
“도시 아가, 이제 깼니?”
눈을 뜨자 어제부터 기이한 행동을 보였던 시부모들이 보였다. 내 몸은 양손이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걸려 있었고, 시어머니는 날카롭게 칼을 갈고 있었다.
— 스릉!
“… 제법 신기한 경험을 다 하네요.”
“어머, 깨자마자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오른쪽을 한번 보는 건 어떻냐?”
고개를 돌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의 가죽이 죽 늘어진 채 천장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 참, 이놈의 호텔은 애들 교육엔 최악이다.
“상호도 참, 무슨 수로 이리 예쁜 아이를 데려왔는지 모르겠구나.”
“허허! 당신도 참, 너무 겁주는 거 아니여? 이러다 도시 아가가 똥오줌이라도 지리면, 자네가 치울 텐가?”
“어머 어머,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려요? 아가! 너무 겁먹지 말거라. 오늘 밤은 아~주 길 것이야. 네 눈으로 피부밑에 뭣이 있는지 봐야 쓰것다.”
어느 시점부터 그냥 귀를 닫았다. 두 시부모는 잔혹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과거에 잡혀 온 사람은 이랬다저랬다 지껄이느라 바빴으니까.
아마도 내가 울고불고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겠지. 그들이 바라는 소리를 들려주는 대신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 ‘실수’가 나왔지?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이 기억의 주인인 ‘박수미’는 멀쩡히 살아서 탈출한 후 커피숍까지 왔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딱히 대단한 초능력이 없는 20대 여성의 능력으로도 탈출할 수 있는 시나리오라는 이야기다. 지금 내가 이렇게 양팔이 묶인 채 고문 살해에 미친 노부부의 장난감이 된 것은 무언가 놓쳤기 때문이겠지.
“모르겠다.”
“네 눈알을 꼭 – 뭐?”
“모르겠다고 이 치매 걸린 년아!”
“이, 이것이!”
“야! 듣고 있지? 난 그냥 우격다짐으로 넘길 테니까 너희끼리 잘 연구해서 똑똑하게 깨봐라.”
“갑자기 무슨 -”
— 쿠르릉! 철컹!
뒤쪽의 석벽이 터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찢어졌다’. 초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입을 떡 벌린 노부부에게 말해줬다.
“나랑 나이 차도 얼마 없는 주제에 아까부터 아가, 아가 지랄은! 그리고 뭐? 피부를 발라? 산채로 회 쳐? 뭔 좆도 아닌 놈들이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참….”
“대, 대체 이게 무슨 -”
놀라서 바닥에 뒹구는 시어머니와 달리 시아버지는 꼴에 남자라고 칼을 들고 덤볐다. 그냥 동작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딱 봐도 평생 주먹질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버러지다.
전사의 팔을 뻗어 칼을 움켜쥔 후, 힘을 거세게 주자 칼이 세 토막 나며 떨어졌다.
“아버님, 칼은 위험한데 내려두시죠.”
다음으로 노인의 어깨를 잡고 ‘살짝’ 힘을 주자 노인의 팔이 그가 평생 돌려본 적 없는 각도로 꺾였다.
“끄, 끄아아아아악!”
“아버님, 시원하시죠? 제가 마사지를 또 그렇게 잘한답니다.”
어차피 평범한 전개는 조졌으니 이쪽으로 틀어볼까? 생각해보니 요즘엔 피해자가 살인마에게 시원하게 복수하는 영화들도 제법 있지 않나?
노인의 귀를 오른쪽으로 쭉 뜯어내자 피부가 뜯어지며 허연 연골이 후드득 흩어졌다. 이 시점에서 이미 노인은 피거품을 물며 기절하고 말았다.
“주둥이는 요란하게 나불나불하더니 왜 이리 약해? 어머니, 어머니도 이리 오시겠어요?”
“흐, 흐이익! 이 괴, 괴물이!”
“그러고 보니 상호 씨는 어딨어요?”
시어머니는 이미 정신이 나간 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가서 노파의 머리통을 움켜쥐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천천히 머리를 비틀며 이 정도면 호텔에서 인정해줄지 고민할 때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 수미야!”
“…”
공포영화로 치면, 저 인간은 초반부에 멋모르고 행동하다가 살인마에게 당하는 동료 같은 포지션인데…. 전개가 마구잡이로 비틀리다 보니 이런 구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설명했다.
“상호 씨. 옆에 저 인간 가죽들 보여요?”
남자는 아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특이한’ 가족들은 아마 식인종이었나 봐요. 그러니 뭐, 다 죽일 수밖에.”
“너…. 넌. 대체….”
“비밀 조직의 요원?”
여긴 관리국 비슷한 조직 없냐?
“마, 말로만 듣던 교황청의!”
“추기경.”
“추, 추기경? 다, 당신은 이제 23살이잖아!”
“야, 추기경은 나이로 뽑는 게 아니라 실력순이야. 대충 그런가 보다 해. 그리고 넌 얼마나 등신이길래 가족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냐?”
“수, 수미야?”
“조용히 안 해?”
그 뒤로는 뭐, 대충 대충이었다.
솔직히 이미 조졌다 싶으니 힘이 쭉 빠져서 연기를 제대로 할 의욕도 싹 사라졌다. 밖으로 나와서 어차피 내 몸도 아니겠다, 담배나 한 대 쭉 빨면서 하늘을 쳐다보다 보니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결국, 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때려죽이고 남편과 함께 탈출했답니다.”
“예? 갑자기요?”
“네. 사실 전 교황청의 추기경이거든요.”
“예?”
“추기경은 실력순이에요.”
“아, 아니…. 좀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시길 바랐는데요.”
“작가님, 우리 이야기를 듣고 따지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죄송합니다. 그래도 요번 이야기는 너무 음, 아무렇게나 말씀하신 느낌이네요. 나중에 다시 한번 해 봅시다.”
커피숍으로 돌아오자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진행한 막가파식 전개 그대로를 박수미가 말한 것이다.
난데없이 살인마 노부부는 힘으로 때려죽였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교황청 추기경이기 때문이라는 황당무계한 소리에 도인호 작가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이건 실패군. 작가의 입에서 나온 ‘나중에 다시 한번 해 봅시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때,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아리따운 20대 아가씨, 한유리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죠. 우리는 그만큼 신기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잖아요? 작가님, 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유리 양,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제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랍니다. 그…. 제 입으로 말하려니 부끄럽네요. 전 학창 시절에 인기가 꽤 좋았어요.”
“그래 보입니다. 사실, 지금도 인기 많지 않으신가요?”
“작가님도 참! 여하튼, 학교에 가면 신발장에 고백 편지가 한가득 쌓여있는 게 일상이었죠. 한데, 그날은 좀 특이했어요.”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 두 번째 이야기, 마성의 소녀
— 딩! 동! 댕! 동!
사방에 울려 퍼지는 고등학교 점심시간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미 두 번째인데 새삼 여학생의 몸이 어쩌고저쩌고하진 말자.
“유리야! 내일 시간 있어? 요번에 블랙아이 공연 티켓을 얻었는데 -”
옆에서 새롬이라는 소녀가 내일 공연을 같이 보러 가자며 열심히 떠들었다. 보아하니 친구인 듯한데, 영화의 장르가 공포다.
“… 너무 내 옆에 붙지 마.”
“응?”
“오래 못살아.”
“뭐?”
시작 위치는 신발장 근처였다. 고백을 잔뜩 받는 소녀, 위치는 신발장. 솔직히 나도 이건 안다. 애새끼들이 여기다 그렇게 뭘 많이 쑤셔 넣는다며?
신발장을 열자 역시나 종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얀 종이가 다섯 개나 우겨 들어간 상태였는데, 그사이에 좀 황당한 물건도 있었다.
“이건 뭐야? 젤리?”
옆에 있던 소녀, 새롬이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슬라임이네? 이런 걸 어떻게 집어넣었을까?”
거대한 젤리 같은 장난감이었는데, 유치원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나 싶다. 구한 건 둘째치고, 신발장에는 또 어떻게 넣은 거야?
황당해하며 끄집어내서 쭉 늘리자 내부에 ‘사랑해’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들어있었다.
“진짜 병신새끼구나. 이런 걸 처넣어서 신발장이 엉망이 됐잖아!”
“그니깐! 보나 마나 병신 찐따 같은 놈이야. 유리야, 이런 거 그냥 버려.”
대충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겠다. 신발장에 고백 편지를 집어넣는 놈이 존나게 많으니까, 자기도 그냥 종이 편지를 넣으면 편지들 사이에 묻혀버릴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종이와 달리 확실한 이목을 끌 수 있는 무언가를 넣어보자며 고민한 결과, 이 병신같은 슬라임을 넣자고 결정한 것이다.
… 이목을 끌긴 끌었네. 젤리 테러를 했으니 경찰에 신고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다.
“하아아…. 이게 요즘 세대 고백이냐? 하여튼 여자 눈 한번 못 마주쳐본 병신도 아니고 누가 이딴 테러를 고백이라고 -”
— 쾅!
묵직한 쇳덩어리가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나, 날 놀리지 마! 네가 어? 너까짓게 어! 뭐라고 날 놀리는데? 내, 내가 그걸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것이 공포영화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한 지 1분 만에 김묵성이 사망하는 순간, 극장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흔치 않게 입에서 침까지 흘리던 아리는 뒤늦게 정신 차렸다.
“바, 방금 묵성이가 소화기에 맞아 죽은 거지? 고, 고백을 거절했다고 때려죽인 거야?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무서워?”
아리의 말을 들은 ‘요즘 애들’은 다 함께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