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8)
297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9)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4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4호 – 미션의 방, ‘호텔 시네마’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할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 남은 사람들끼리 진행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장기간 회의한 끝에 우리는 박수미의 ‘신혼의 추억’에 대해 나름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회의 내용을 화이트보드에 이리저리 적던 은솔 누나가 먼저 의견을 냈다.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짚고 가자. 마지막 영화, 시작하자마자 우릴 제외한 세 사람이 드라마 작가 도인호와 만나면서 시작하잖아? 언뜻 보면 별 의미 없는 도입부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힌트가 숨겨져 있어.”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 다 멀쩡히 살아있지.”
“그거야. 살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장애가 있는 사람도 없었어. 정황상 셋 다 일반인이고. 즉, 영화 속 괴이한 이야기들은 평범한 인간이 멀쩡히 탈출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
나도 입을 열었다.
“유산이나 축복을 과하게 쓰지 말자는 거죠?”
“그렇지. 유산이나 축복은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해.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살인마 부부에게 잡혀서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니까 쓰셨잖아? 딱 그 느낌 아닐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지금은 은솔 누나가 들어갈 시점이니 말을 아꼈다. 결국은 진입한 사람은 본인 생각대로 하기 마련이니까.
“‘신혼의 추억’은 대충 알겠어. 할아버지가 놓치신 부분과 우리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감이 살살 오네. 문제는 그다음인데….”
그다음, ‘마성의 소녀’는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1분 만에 죽어서 우리가 알아낸 건 배경이 고등학교라는 점뿐이다.
“별수 없지. 내가 더 알아내고, 다음은 또 승엽이가 알아내고 하면서 깨는 거니까. 다만 불안한 점이 있긴 해.”
“뭔가요?”
“내 도구. 다 멀쩡히 들어가겠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20대 아가씨로 변한 상태였는데도 ‘전사의 팔’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의 도구들도 어떤 식으로든 내부에 들어가리라 본다.
애초에 호텔의 보상은 쓰라고 만든 물건이다. 유산과 축복 중 하나만 고르라는 말은 둘 다 아닌 도구들하곤 무관한 이야기고 별말이 없다면 쓸 수 있어야 정상이다.
누나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찬물을 세 컵이나 마신 후, 스크린을 향해 걸어갔다. 선택은 당연히 유산, ‘안식의 피리’였다.
*
– 이은솔
후우…. 이제 시작이네.
초반 진행은 영화로 봤던 것과 똑같다. 번화가에서 깨어나 커피숍으로 움직여서 모임을 주재한 작가 도인호, 귀부인 박수미, 여학생 한유리, 아직은 잘 모르겠는 차은표를 만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인호는 예전처럼 ‘박수미’를 지목해 이야기해달라 요청했다. 그 순간, 할아버지가 통과했을 때 도인호가 말했던 ‘나중에 다시 한번 해 봅시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정상적으로 깨지 못했으니 ‘다음 사람’이 다시 깨보라는 의미였을까? 정상적으로 깨면? 다음 사람은 정상적으로 끝난 이야기는 패스하고 그다음부터 시작하나?
그때, 공간이 흔들리며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했다.
*
– 첫 번째 이야기, 신혼의 추억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내 도구’의 상태들을 점검했다. 배지와 브로치는 평범한 장식물처럼 내 가슴 근처와 머리에 붙어있었다. 셰프의 모자는 핸드백에 들어간 상태였다.
역시 도구는 다 들어왔구나. 슬며시 손을 뻗자 피리도 문제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혹시 모르니 식칼이라도 챙길까.”
초반부 진행은 할아버지 때와 같았다. 박상호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시나리오 자체를 방해하는 건 의미 없다 싶어서 승낙했다. 3일 후, 나는 광기의 노부부가 살아가는 시골집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가! 내, 상호에게 종종 들었단다.”
“어이고! 상호 이놈아! 어찌 이리 곱고 참한 아가씨를 얻었는고? 이 애비가 다 늙어서 눈이 호강하는구나!”
“아버지….”
노부부가 연쇄살인범인 걸 알고 다시 보니 이 짧은 대화 중 헛웃음이 나올 뻔했네.
이후의 일도 비슷했다. 남편의 동생이라는 청년은 또 넋 나간 듯 박수미를 바라보다 도망쳤고 음침한 시누이는 기묘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까진 똑같이 왔다.
이제부터 할아버지가 했던 진행과 다르게 가야 한다.
저녁 무렵, 할아버지는 시골의 ‘부엌’으로 이동했다가 주변의 도구를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행동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유가 뭐였을까?
아리는 의외로 간단한 정답을 알아냈다.
남편의 친정이 이런 후미진 시골에 있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연쇄살인을 외부에 숨기기 위함이다.
한데, 바로 그 후미진 장소라는 지리적 문제 때문에 이 집에는 도구도 그리 많지 않고 집도 그리 크지 않다.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고, 뒤처리하기 위한 별도의 거창한 시설이 있을 리 없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저 ‘부엌’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가 보관된 장소인 동시에 시체를 뒤처리하는 장소다. 그러니까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외부인인 내 접근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사냥감이 무기를 얻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겠지.
그래서 난 부엌에 가서 살인마들을 자극하는 대신, 그들이 새벽에 있을 ‘살인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장소로 움직였다.
…
걸어가며 되새겼다. 연쇄살인 노부부가 거하는 이 지옥에서 힘없는 20대 아가씨가 탈출할 수 있는 비법이 뭐였을까?
바로, ‘협력자’다.
— 끼익!
청년이 나타났던 축사로 다가가서 슬며시 문을 열었다. 과연, 축사처럼 보인 장소는 축사가 아니라 가축 수준의 대접을 받는 사람이 거하는 장소였다.
“끄르륵!”
청년은 형편없이 더럽고 찌든 천 무더기 위에 걸터앉아서 잡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놀라며 가래를 끓는 소리를 내더니, 빨리 밖으로 나가라며 손짓했다.
흐음…. 역시 내가 들어가자마자 호응하진 않네. 장기간 이 지옥에서 세뇌라도 당했을까?
그렇다면, 조금 ‘남자의 본능’을 자극해볼 필요도 있겠지. ‘박수미’가 대단한 미인인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어머! 도련님? 대체 이 장소는…. 벌이라도 받고 계신 건가요?”
청년에게 확 다가가자 그는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 일부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후, 핸드백의 물수건을 꺼내 청년의 얼굴을 닦아냈다.
“이렇게 잘생긴 분이 왜 이리 더럽게 있으실까! 가만히 계셔요.”
“끄으읍….”
짐작했지만 말을 못 하는구나. 혀를 도려내기라도 했나? 굳이 입을 열어보진 않았다.
박수미는 정말 상당한 미인인데다가 우아한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즉, 시골 총각들이 이상형처럼 떠올릴 법한 ‘도시 아가씨’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지.
당연히 청년은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어찌할 바 몰라 했다. 한참 동안 친절을 베풀면서, 에잇! 솔직히 말하면 ‘유혹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얘,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보면 뭔가 생각이 들어야 정상 아니니?
… 솔직히 지금은 내 진짜 몸이 아니라 다행이다.
결국 살인마의 세뇌를 남성의 본능이 이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덜덜 떨던 청년은 호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건넸다.
“이건…. 상호 씨가 집에 보냈다는 ‘편지’네요.”
밖에서 우리가 떠올렸던 다양한 시나리오, 그중 일부가 적중했음이 확실해졌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편지를 한번 살피고 청년을 한번 보았다.
청년은 자기 행동에 두려움이라도 느꼈는지 덜덜 떨더니 바닥의 검은 흙을 집어서 내 손에 글자를 썼다.
‘도 망 가 세 요.’
얘, 여기가 위험한 건 나도 알아.
“도련님, 갑자기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장난이 과하셔요. 게다가 이런 시골에서 제가 어떻게 혼자 도망가나요?”
그 말에 청년은 눈을 크게 뜬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만 갈게요.”
축사를 나서던 순간, 청년은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내 옷을 잡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에게도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내를 또 구했다. 이번엔 정말 마음에 든다.’
*
늦은 밤, 옆에서 잠든 박상호를 바라보며 핸드백을 슬며시 열었다.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식칼’이 편지 봉투에 담겨있다.
슬슬 승부를 봐야겠지. 구태여 상대가 날 노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어. ‘도련님’도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면 좋을 텐데.
— 스윽!
이제 한 방에 –
— 퍼억! 쨍그랑!
갑자기 옆에 누워있던 박상호가 날 걷어차며 일어섰다! 이 새끼, 자는 체 하는 중이었어?
“허! 설마 했다. 낮에 갑자기 축사에 들렀다길래 설마 했네. 설마 그 더러운 새끼가 주둥이라도 나불거렸냐? 아니지, 진즉에 혀를 뽑았으니 그놈 주둥이가 열릴 리가 없는데….”
“크으…!”
“수미야, 칼 하나로 되겠니? 하 참…. 여자는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네. 거 들어오쇼!”
벽이 뒤집히며 노부부가 들어왔다.
“허허…. 도시 아가, 실망했구나. 요즘 애들은 왜 이리 귀여운 맛이 없나 모르겠다.”
“당신도 참, 어차피 묶어놓고 이빨 몇 개만 뽑아도 곧 귀여워진다니까요?”
“그려?”
바닥에 기대어 일어서며 생각했다.
지금 저들의 태도는 여유 만만 그 자체다. 그야 시골 생활에 단련된 노인 둘에 건장한 성인 남성 한 명이 20대 아가씨 한 명을 앞에 두고 겁 먹는 게 더 이상하지.
실패야? 나도 첫 번째 이야기는 이대로 망한 건가?
“아가? 뭐 할 말은 없니? 벌써 겁먹어서 – 갑자기 웬 모자를?”
“아가리 여물어!”
“뭣 -”
“너희 쓰레기 같은 인생은 그냥 갈아서 가축 사료에나 쓰는 게 좋겠네.”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욕설을 던지자 세 사람이 동시에 넋이라도 나간 듯 돌처럼 굳었다! 지금이 타이밍!
“에잇!”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뻗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시어머니 쪽으로 휘둘렀다. 셰프의 카리스마의 효력 덕에 돌처럼 굳은 노파는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목에 큼지막한 구멍이 나고 말았다.
“크으읏! 너! 갑자기 개소리를 지껄이길래 뭔가 했더니 -”
벌써 풀렸어? 둘 정도는 죽일 수 있길 바랬는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남편’과 ‘시아버지’의 손을 피해 방문을 걷어차고 뛰쳐나갔다. 달빛조차 비추지 않은 어두운 시골 흙길을 달려 나가며 생각했다.
설마 모자 한번 썼다고 줄거리를 망쳤다고 하진 않겠지? 투명 배지나 나비 브로치를 쓴 것도 아닌데? 솔직히 모자 한번 썼다고 실패 판정은 오바야!
할아버지처럼 괴력의 손으로 다 때려죽인 것도 아니잖아. 평생 욕 한번 하지 않을 것 같은 우아한 도시 아가씨가 갑자기 쌍욕을 뱉으면 꼭 모자가 아니더라도 놀라서 돌처럼 굳을 수 있어.
그러니까 모자 한 번 정도는 봐달라고!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