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99)
298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0)
– 이은솔
집 밖으로 뛰어나오자 바깥은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의 어둠은 도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조건은 나에게 꽤 유리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배지를 쓴다면 저들이 대항할 수 있을까? 낮에도 날 찾기 힘든데, 이 어둠 속에선 꼼짝도 못 하고 당하겠지.
생각을 고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투명 배지는 좀 아니기 때문이다. 셰프의 모자까지는 우아한 아가씨가 갑자기 욕하면 누구나 놀랄 수 있다는 식으로 우겨볼 만한데, 투명화는 그런 식으로 넘길 수가 없다. 보나 마나 또 박수미가 알고 보니 교황청 요원이었다는 식으로 스토리가 괴상하게 꼬이겠지.
그때, 갑자기 뒤에서 덮쳐온 굵직한 팔뚝이 내 머리를 뒤에서 낚아채며 넘어트렸다!
즉시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싸움을 준비했는지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온 상태라 칼이 미끄러졌다.
“크으읏!”
“아가씨,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리 요란하셔요? 이렇게…. 이렇게 예쁜 분이 왜 이러실까….”
삽시간에 의식이 흐려진다. 이 여자, 빌어먹을 시누이의 힘이 나보다 훨씬 세다! 그냥 배지를 썼어야! –
— 퍼억!
…
머리 위에 걸쭉한 액체가 쏟아졌다. 이제 와서 새삼 얼굴에 피 좀 묻었다고 비명 지르진 않았으나 워낙 갑작스럽게 시누이의 머리가 터져서 놀라긴 했다.
시누이의 뒤에는 묵직한 지렛대를 움켜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자기 손으로 누나를 죽였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는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숨어!”
“어, 에, 으으읏.”
“멍청아! 숨으라고! 지금 니 형이랑 애비 오는 소리 안 들리냐?”
그제야 청년은 멍하니 건물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난 바닥의 짱돌을 집어 들고 시누이 터진 머리통에 비비며 내가 죽인 체했다.
잠시 후, 두 남자가 나타났다.
“혜, 혜영아! 이 미친년이 감히!”
“하아아…. 너네한테 미친년 소리 들으니까 헛웃음 좀 나온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시아버지와 달리 박상호는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
“몇달을 같이 살면서도 내가 널 몰랐구나.”
“나도 널 몰랐네.”
정확히는 이 몸의 주인이 널 몰랐어.
“이런…. 미친 마귀 년일 줄이야!”
“야, 아무리 그래도 너희가 그런 말 하는 건 좀 아니다.”
말장난으로 시간을 끌며 뒤쪽을 살폈다. 설마 이 와중에도 넋 나가 있는 건 아니지?
“최대한 네 얼굴은 아껴서, 예, 예쁘게 발라내려 했는데!”
“설마 그 말, 나보고 고마워하라고 하는 말이야?”
“네가 가장 예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 했는데! 산채로 튀겨주마! 거짓말일 것 같지? 튀김 솥에 돼지기름 썰어 넣고 뜨겁게 데우면 무슨 냄새 나는지 아니?”
“글쎄. 순대 냄새?”
“하! 용감한 체하기는 -”
— 퍼억!
도련님의 두 번째 기습은 불안했다. 박상호 반대편에 있던 나로선 도련님이 다가오는 게 훤히 보이는 데다가 낙엽을 밟는 소리도 들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흥분해서 내게 욕설을 내뱉던 두 남자는 뒤에서 다가오는 청년을 인지하지 못했다.
“크어어억! 대체 -”
— 퍼억!
청년은 지렛대를 연거푸 내려쳤다. 이미 첫 번째 타격에서 오른쪽 눈알이 반쯤 튀어나와 헐렁거리던 박상호의 머리통이 깨진 수박처럼 변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아버지가 가만히 있진 않았다. 즉시 돌아서서 청년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번엔 내 앞에서 등을 보인 꼴이 되었으므로 칼에 찔렸을 뿐이다.
“다 늙으신 분이 왜 이리 바쁘세요? 갈 사람은 좀 갑시다. 솔직히 넌 이제 가도 되잖아.”
“며, 명진아! 나를 -”
“나를 뭐 어쩌라고?”
물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청년이 노인의 말을 듣진 않았다.
… 길고 길었던 광기에 찬 밤이 이제 끝나가는구나.
청년은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도련님, 아니 명진아.”
“끄으읍….”
“말 못하는 건 알아. 펜 줄 테니까 써봐. 그래, ‘박상호’가 이 집에 희생자를 공급하는 역할 맞지?”
‘네.’
“다른 건 대충 알았는데, 딱 하나 모르겠네. 넌 누구니?”
‘… 엄마랑 같이 오래전에 여기 끌려왔어요.’
오래전, 송이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호텔에서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은 현실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각색한 것이라 했었지. 이런 끔찍한 일도 현실에서 있었던 걸까? 그리 생각하니 역겨워서 토가 나올 뻔했다.
진정하자.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아직 피거품을 토해내던 시어머니까지 확인 사살을 끝마쳤다. 다음으로는 명진이와 함께 시체들을 시골집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불타오르는 집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년이 내 손에 글씨를 적었다.
‘당신은 마녀인가요? 아니면 천사님인가요?’
“미안한데 그런 건 아니야. 멀리 있는 내 친구들은 반쯤은 그런 존재가 되긴 했는데, 난 아직 아니지. 그보다…. 나랑 같이 나가기나 하자. 내일 아침이면 버스가 올 거야.”
비척거리며 돌아서는 청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가볍게 끌어안았다.
“으으읍!”
“행복한 꿈을 꾸렴. 넌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는 거야. 밖에서는 분명 행복한 일이 기다릴 거란다.”
간절히 빌었다. 부디 현실에서도 그가 구원받았기를. 그리하지 못했다면, 내세에서라도 구원받기를 부처님께 기도했다.
*
“… 그렇게 됐답니다. 도련님과 함께 시골길을 힘겹게 걷고 또 걸었죠. 다리가 후들거려서 죽을 뻔했지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내가 진행한 내용 그대로 박수미가 설명했다. 도인호 작가는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고생하셨습니다. 혹시 박명진 군은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글쎄요? 해피엔딩? 살아있는 사람에게 엔딩이라는 단어는 좀 그런가?”
박수미는 대답 대신 밝게 웃었다. 그 웃음만 보아도 청년이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슬쩍 놓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듣다 보니 딱 한 가지가 의아했는데,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떤 부분이신가요?”
“중간에 살인자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더니 그들이 돌처럼 굳었다고 하셨는데,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이 이상하게 느껴지셨나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마치 초능력이라도 쓴 게 아닌가 싶어서 -”
“야! 이 개 씨발새끼야!”
“!!!”
“!!!”
잠시 커피숍 전체에 적막이 감돌았다. 상상도 못 한 타이밍에 기품있는 사모님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오자 도인호는 아예 돌처럼 굳었다.
곧, 박수미는 다시 우아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것으로 대답이 된 것 같아요. 죄송해요.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니, 직접 보여드리는 게 가장 확실하죠.”
“… 노, 놀랐습니다. 살인범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가는군요. 이해했습니다. 좋아요, 좋아. 이 이야기는 이 정도면 아주 ‘완성도’가 높습니다. 결말이 해피엔딩인 것도 마음에 드는군요. 첫 번째 이야기는 이쯤에서 ‘확정’ 하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내뱉기 전, 도인호는 기이하게도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
– 극장
「이쯤에서 ‘확정’하겠습니다.」
“…”
“…”
“가인아. 저 대사,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 한 말이지?”
“그런 것 같네. 첫 번째 이야기는 은솔 누나의 시나리오로 확정했다는 소리인가 본데.”
“확정이라…. 그러면 다음 사람부터 첫 번째 이야기는 넘기는 건가?”
“가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은솔이는 저 이야기에 되게 몰입했나 봐. 마지막에 명진이란 애를 꽉 껴안으면서 본인도 살짝 울던데?”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난 그게 누나가 첫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끝낸 원동력이라고 봐.”
*
– 이은솔
숨 한번 돌릴 틈도 없이 한유리가 입을 열며 두 번째 이야기, ‘마성의 소녀’가 시작했다. 내부에서 그 제목을 본 건 아니고 할아버지가 처음 들어갔을 때 보고 온 제목이긴 한데….
“제목부터 욕 나오네. 뭔 놈의 마성이래?”
“뭐?”
“아니야.”
울려 퍼지는 점심시간 종소리, 자연스럽게 신발장으로 움직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첫 번째 위기는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보여줬지. 신발장에 고백이랍시고 슬라임을 처넣은 또라이가 근처에 숨어있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또라이는 잘도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아예 신발장을 무시해? 이것도 좀 아니지 않나?
— 탁!
고민하던 중, 새롬이가 아무렇지 않게 ‘한유리’의 신발장에 손을 뻗길래 놀라서 막았다.
“유, 유리야?”
“… 내가 놀랄 상황 아니니? 갑자기 내 신발장을?”
“미, 미안. 근데 맨날 신발장에 이상한 것 있다고 나보고 열어보라고 했었잖아.”
한숨이 나왔다. 내가 신발장을 열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여는구나. 새롬이를 막으면 또 다른 사람이 열겠지.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냥 신발장을 열었다. 역시나 질척한 슬라임과 내부의 사랑해 쪽지가 보였다. 즉시 새롬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으! 어떤 병ㅅ – 흐읍!”
아까부터 얘가 문제네. 무슨 위기 제조 기계니?
“새롬아, 조금 요령이 없는 고백일 뿐인데 욕할 필요까진 없잖니.”
새롬아, 미안해. 나였어도 욕했어. 근데 고백하는 놈이 미친놈이라면 ‘친절하게’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억지로 질척거리는 슬라임을 떼어내서 내부의 쪽지를 끄집어낸 후, 열심히 읽었다. 필시 어딘가에 숨어있을 놈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아직은 누군가와 사귈 생각은 없어. 고백해준 사람에겐 미안하게 생각해.”
들었지? 들었지 병신아? 그냥 좀 발 닦고 잠이나 자라!
— 우당탕!
바로 그 순간, 신발장 뒤쪽에 닌자처럼 숨어있던 개 병신이 – 이 새끼 진짜 미쳤나? – 튀어나와서 흥분한 채 외쳤다. 그의 손에는 소화기가 들려 있었다.
“거짓말!”
“…”
“거, 거짓말하지 마! 누, 누군가와 사귈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나하고만 사귈 생각 없는 거잖아? 맞지? 분명히 다른 놈하고 -”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유리가 너랑 사귀어주기로 약속이라도 했니? 근데 왜 이 지랄이래?
다행히 이 병신이 튀어나왔을 때는 이미 주변에 다른 학생이 많았고, 손에 소화기를 든 채 고함지르는 미친놈은 누가 봐도 위협적이었다.
“아~! 저 찐따새끼 또 저러네?”
곧, 주변의 다른 학생들이 소화기를 든 멍청이를 끌고 어딘가 떠나갔다.
휴우…. 이걸로 첫 번째 위기는 넘겼네. 할아버지의 진행과 다른 부분이라면 친절하게 대하면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올때까지의 시간을 벌었다인가?
점심시간은 다행히 위기는 없었다. 다만, 고작해야 1시간 내외의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느꼈다.
내가 들어온 여자아이, ‘한유리’는 정말이지 부러운 인생이다. 나도 진짜 얘처럼 살아보고 싶었는데!
걸어 다니면서 한숨 한번 쉬면 모두가 쳐다보고 뭐가 걱정이냐며 묻는다.
복도를 쳐다보면 수줍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고등학생들 천지다.
교실에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 보면 날 구경하러 온 다른 학교 학생까지 보인다.
이게 바로 도내 최고 미소녀의 삶이구나!
엘레나와 아리는 이런 삶을 살았 – 아니겠네. 엘레나는 도망 다니느라 바빴고 아리는 호텔에서 컸지.
와! 호텔에서 큰 건 진짜 좀 그렇다. 미안한데 걔네보단 내가 잘 컸어.
*
“은솔아?”
“어, 언니!”
*
두 번째 위기는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 찾아왔다. 교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여자애들이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와! 또 왔어! 또 왔어!”
“뭐?”
“유리야, 이번엔 지호 선배 고백 받을 거야?”
“… 지호 선배? 누구더라?”
“에이…. 알면서 또 그런다! 야구부잖아! 요번에 프로 지명도 받았대.”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었다. 이미 여자애들이 나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교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깥에 있는 것은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었는데, 멀리서 날 보는 것만으로 이미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덕분에 이제부터 벌어질 닭살 돋는 이벤트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 예비 운동선수가 미쳐 날뛰면 진짜 빡셀 텐데. 한유리 이 애 진짜 장난 아니구나. ‘마성의 소녀’라는 제목의 뜻을 알겠다. 누가 더 남았을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