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01)
300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2)
– 극장
스크린에 난데없이 구미호가 나타나는 순간, 극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반쯤 벌린 진철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대체 뭐냐? 갑자기 주인공이 구미호?”
엘레나는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했다.
“이러면 처음 커피숍 파트가 어떻게 이어지는 거죠? 설마 구미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건가요? 시나리오가 방송에 나갈 수도 있다는데?”
김상현도 당황한 티를 냈다.
“말도 안 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 다들 보셨죠? 저 세계관엔 괴물을 토벌하는 ‘교황청’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구미호가 방송에 나가서 정체를 드러낸다? 죽여달라고 비는 겁니까?”
송이가 억지로 이해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구, 굳이 따지면 첫 번째 이야기도 좀 이상하긴 했죠. 영화니까 그러려니 하고 봤지만, 시부모와 남편을 살해한 아내가 그 살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셈이잖아요?”
송이의 말을 김상현이 즉시 반박했다.
“송이 양, 그건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니 정부의 사법 시스템이 개입할 문제죠. 한데, 이십 년 전 사건인데다가 살인 직후에 집을 다 태웠습니다. 이제 와선 증거 따윈 없습니다. 게다가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정당방위입니다. 현시점에선 더 이상 문제가 없어요.”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구미호의 경우는 그냥 구미호인 것 자체가 죽을죄일 텐데요. 교황청에서 이놈하고 와서 태워죽일 텐데….”
의문으로 가득한 동료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아리가 한숨을 쉬었다.
“다들 너무 어렵게 생각하네. 쉬운 이야기인데.”
가인은 크게 당황했다.
“뭐?”
“내가 너네보다 10배 똑똑해서 답을 바로 떠올린 건 아니야. 그냥 저 유사한 일이 현실에서 가끔 발생하다 보니까 너무 익숙해서 떠올렸을 뿐.”
“가끔 벌어져? 진짜 모르겠는데.”
동료들의 시선이 모두 아리에게 쏠렸다.
“우선, 너희는 액자 속 이야기와 액자 밖의 대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
김상현이 그 부분은 이해했다는 듯 답했다.
“우리가 등장인물이 되어 진행한 액자 속 이야기는 ‘실제 벌어진 일’이라면, 밖에서 등장인물들이 작가에게 하는 이야기는 ‘기억’이죠.”
“그거야. 첫 등장인물인 박수미는 신혼의 추억을 겪고 거의 20년이 흘러서 고백 중인 상황이야. 한유리도 몇 년은 흘렀지.”
동료들이 여전히 무슨 말인가 하는 눈으로 아리를 돌아보자 아리는 간단히 답했다.
“커피숍에 들어간 시점의 한유리는 구미호였던 자신의 과거를 전부 잊은 거야. 아마 학창 시절 본인 주변에서 사람이 기이하게 마구 죽어갔다는 식의 기억만 가지고 있겠지. 그걸 이야기하려고 나왔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유리의 ‘현재 상황’을 영화 진행을 통해 만들어줘야 해. ”
“한유리의 현재 상황을 영화 진행을 통해 만들어줘야한다? 현재 상황이 어떤데?”
“묵성이가 진행했을 때, 한유리가 찐따에게 소화기로 얻어맞아 죽은 것 기억해? 이후, 은솔 버전 한유리는 학교를 벗어나기까지 자신이 ‘구미호’라는걸 전혀 몰랐지.”
가인은 입을 반쯤 벌렸다.
“자기 자신이 구미호라는 기억 자체를 지울 방법이 있다? 아니, 뭐 구미호니까 신비한 비술을 썼다 치자. 왜 지우는 거야?”
송이가 갸웃거리며 답했다.
“중간에 은솔 언니가 독백하기로는 ‘식인 충동’을 억누르는 목적이라고 하던데요?”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에게 맞아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억누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구미호의 정신을 억누르는 건 식인 충동을 통제하려는 목적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그런 술법을 만들어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뭔데?”
“과거 세탁. 자기 자신의 기억조차 지워서 훗날 인간이 된 자신을 교황청이 조사하더라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지.”
가인은 입을 떡 벌렸다.
“훗날 인간이 된 자신을?”
— 탁!
아리가 탁자를 내리쳐서 주변의 대화를 멈췄다.
“좀 긴 이야기니까 그냥 들어. 그리고 내 말만 듣지 말고 영화도 봐.”
다들 눈은 영화로 향한 채 귀는 아리 쪽으로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구미호가 나오는 영화나 소설 보면서 다들 한 번쯤 ‘인간이 되길 바라는 구미호’에 대한 이야기 들어봤을 거야. 어떻게 해야 인간이 될까? 조건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제법 어렵지.”
…
“설화의 구미호들은 보통 실패해. 클리셰도 항상 비슷해. 100명의 정기를 먹어야 하는데 마지막 99명에서 지나가는 선비를 만나 죽곤 하지.”
…
“그런데,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왜 다들 실패만 할까? 성공하는 구미호는 없어?”
“… 마침, 은솔 언니가 비슷한 독백을 하고 있네.”
*
– 이은솔
흉흉한 폐가, 그 내부의 더 흉흉한 요괴가 된 채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하던 당시의 한유리가 보였던 밝고 활기찬 모습을 떠올린 후, 지금 내 상황과 머릿속 정보를 모으자 한 편의 도시 전설이 나오고 말았어.
유리 너 진짜 대단하구나.
이 악물고 근성과 끈기를 발휘해서! 노오오오오력해서! 사람 100명 잡아먹고 인간이 됐구나!
이거 칭찬해줘야 하는 것 맞아?
영화의 배려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탁자 위엔 한유리가 적은 일기가 있었다. 일기엔 그녀가 주기적으로 먹은 사람 간의 숫자와 신분을 위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인간이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버킷리스트를 멍하니 읽어 내려갔다.
‘우선은 불쾌한 기억부터 지우자! 내겐 망각의 비술이 있으니까. 사람이 되고 나서 이상한 기억은 영원히 잊으면 그만이야.’
…
‘좋은 남자를 찾고 싶어. 그 사람을 찾으면 죽이지 말자. 돈은…. 많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돈이 다가 아니니깐! 잘생기고 키도 커야겠지? 무엇보다 날 사랑해줘야 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
‘언젠가 TV에 꼭 나가보고 싶어. 솔직히 저 배우들보다 내가 더 예쁘잖아! 말도 더 재미있게 할 자신 있는걸?’
…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이런 허름한 폐가는 이제…. 정말 싫어. 나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어. 매일 뜨거운 욕조에서 씻고, 집 전체를 S 전자 가전제품으로 채우고 싶어.’
…
‘어제, 다솔이가 죽었다. 교황청에서 보낸 사냥꾼이 다솔이의 머리를 태웠다. 나와 새롬이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이 도망쳤다.’
…
‘언젠가 난 이 일기를 태워버릴 거야.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고통이 끝나고 행복이 찾아올 때…. 그때가 오면 전부 태워버리자.’
“진짜 이러지 마….”
한숨이 나왔다. 빈곤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새하얀 종이의 맨 위에 적힌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은 숫자 : 28’
“100개의 간을 먹어야 하는데, 남은 숫자가 28이면 벌써 72개나 먹었구나.”
이 구미호, 참 열심히 살았네. 심지어 그렇게 열심히 산 끝에 꿈을 이루기까지 했어.
기어코 인간이 되었고, 망각의 비술로 기억을 지워 과거를 자신도 모르게 세탁한 데다가 TV에 나가고 싶다는 꿈까지 반쯤 이루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인간 승리, 아니 여우 승리라 할 만하다.
…
— 삐이이~!
견디기 힘든 충동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피리를 불어봤지만, 기대와 정 반대 효과가 나타났다. 피리는 내 충동을 억누르는 대신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있던 ‘망각의 비술’을 완전히 깨트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충동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식욕이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허기를 느끼듯이, 구미호인 한유리의 몸이 사람 고기를 요구할 뿐이지.
식욕은 몸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충동이지, 사악한 술법이나 정신병이 아니다. 당연히 피리가 없애줄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식욕을 억제하는 ‘망각의 비술’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술법이지.
그래서 안식의 피리는 내 허기를 제거하는 대신 망각의 비술을 완전히 날려서 구미호의 자아를 완벽히 일깨워줬다.
즉, 더 배고파졌고, 여러 가지 지식을 떠올렸다.
…
“하! 하! 하하하!”
웃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명확했기에 웃음이 나왔다.
“먹으면 되겠구나.”
사람을 먹으면 된다.
28명의 인간을 죽여서 간을 뽑아먹으면 된다. 그리하면 난 커피숍에 나왔던 활발했던 소녀, ‘인간 한유리’로 변할 수 있다.
인간이 된 후엔?
남아있는 마법적 힘을 전부 털어 넣어서 ‘망각의 비술’을 쓰면 그만이다. 이제는 그동안처럼 학교 밖으로 나오면 술법이 풀리게끔 설정할 필요도 없어. 인간이 된 후에 마지막으로 쓸 망각의 비술은 영원히 풀릴 필요 없으니까.
물론 어떻게 해야 정상적인 인간의 신분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 떠오르긴 했다. 뭐 구미호의 워너비, 인생, 아니 여우생 역전의 주인공 한유리씨는 인간 사회의 어둠 속에서 기나긴 세월을 버텨오시지 않았는가.
그 정도야 나름의 수가 있겠지. 솔직히 영화에서 내게 거기까지 요구할 것 같진 않아.
…
— 탈칵!
바깥을 걸으며 생각했다. 정말 이게 정석 전개일까?
구미호가 무고한 사람을 28명이나 더 죽여서 잡아먹은 끝에 인간이 된 후, 과거까지 세탁한 채 행복한 인간 한유리의 삶을 살아가는 게?
정말 이런 결말뿐일까?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렇게 괴물에게만 형편 좋은 결말을 만들어야 하나?
… 어쩌면, 나는 의미 없는 상념에 빠졌을지도 몰라.
어차피 호텔 내부의 일은 현실과 다르잖아? 심지어 지금 상황은 영화 속 영화다. 이런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진짜 사람처럼 생각할 필요 있을까?
끊임없이 사악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곱고 아름다운 한유리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언니.”
잡념을 밀어낸 채 고개를 돌렸다. 어두컴컴한 도시의 네온사인 아래에서 얇은 체구의 소녀가 내게 걸어왔다.
“… 새롬아.”
“이제 정신 차렸어요?”
“그래.”
“오늘은 왜 이렇게 망각의 비술을 강하게 걸었어요? 위험했잖아요. 아침에도 까딱하다간 멍청이에게 위기에 처할 뻔했는데.”
“…”
“힘들어서 그래요? 조금만 더 참아요. 이제 거의 다 왔잖아요. 언니는 꼬리도 아홉 개고, 72개 채웠으니까 -”
“꼬리, 넌…. 일곱 개였지?”
“네. 22개만 더 모으면 여덟 개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요괴 여우의 ‘생태’에 관한 정보가 머리를 스쳤다.
“사람을 100명 잡아먹을 때마다 꼬리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는구나.”
“예? 그렇죠.”
“그렇게 아홉 개를 만들고 또 100개를 채우면, 꿈을 이루고.”
‘꿈’이라는 단어를 들은 새롬이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빛났다. 소녀는,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듯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