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02)
301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3)
– 이은솔
달콤하고 시원하다. 진득한 풍미는 최고급 와인을 능가하며, 몸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힘은 에너지 드링크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다.
피 이야기다.
내면에서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충동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에 결국 폐가에 보관해둔 피를 마시고 말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동안 필요할 때 종종 아리의 피를 마셨던 호텔파티의 경험이 날 위로해줬다.
솔직히 사람 피 정도는 마실 수 있지! 아닌가? 이미 마셨으니 괜찮은 셈 치자.
목구멍을 또르르 흘러내린 핏방울이 식도를 거쳐 위에 도착하자 허기와 갈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물론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식인 요괴에게 있어서 피는 비유하자면 미음 정도이기 때문이다. 당장 굶주렸을 때는 미음이라도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겠지만, 사람이 평생 미음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결국은 ‘고기’가 필요하다.
“새롬아.”
“언니?”
“질문 하나만 할게.”
“뭔데요?”
“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
“구미호는 수명이 아주 길잖아. 사람은 길어야 100년이고.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도 인간이 되고 나면 그리 길지 않아. 기껏해야 10년? 요새는 피부관리 잘하면 20년? 그래봐야 구미호의 삶에 비하면 짧지.”
“…”
“술법적인 힘도 크게 약해지잖아. 사람도 신비로운 힘을 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구미호 시절에 비하면 그 잔재만 남는 것에 가깝지.”
“왜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부럽네요.”
“뭐?”
“그만큼 지금의 언니가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겠죠.”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람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새롬이는 당황하는 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설명과 쉬운 설명이 있어요.”
“어려운 이야기부터 해줘.”
“혹시 제1원인론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기독교 신학에서 나오는 개념 아니야?”
“최초로 꺼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해요. 만물에는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에는 또 원인이 있다. 이런 식으로 원인,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앞선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원인, 제1원인이 있다. 이런 이야기죠.”
“그 제1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논리로 알고 있어.”
“그렇죠. 논리적으로 만물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보다 앞서는 원인이 없는 최초의 원인이 있다는 게 제1원인론인데, 조금만 생각해도 유일신의 개념과 무척 닮았으니까요. 물론, 저나 언니나 사람 잡아먹는 요괴인데 새삼 하나님 어쩌고 하려는 건 아니고.”
새롬이는 태연히 붉은 고기 조각을 한 점 먹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한숨 한번 쉬고 말았다.
“자연과학이 발견해낸 인간의 제1원인은 유전자라고들 하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충동의 원인은 그것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유전자에 쓰인 사람의 설계도에 담겨있다. 그렇다면 요괴의 제1원인은 뭘까요?”
“…”
“우리를 만들어낸 설화나 전설이겠죠. 그래서 언니의 질문, ‘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냐?’를 제1원인론에 입각해 설명하면 ‘설화 속 구미호는 그런 존재니까’ 또는 ‘사람이 우리를 그렇게 정의했으니까’라고 답변할 수 있겠죠.”
“사람이 구미호를 그렇게 정의했으니까….”
“쉬운 설명도 있어요. 그냥 되고 싶으니까. 그게 다죠.”
띵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 사람으로 살면서 요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금 대화 자체가 신기하다. 이런 그럴듯한 이야기, 요괴 입에서 나와도 되는 거야?
“아니, 넌 제1원인론이니 하는 단어는 어디서 들은 거야? 요즘 고등학교에서 이런 것도 가르쳐?”
새롬이는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감 충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언니! 저, 이대 나온 여자예요.”
“…”
이대 나온 구미호, 아니 칠미호의 탄탄한 논리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
늦은 밤, 폐가를 나와 어둠 속에서 허름한 골목을 거닐었다. 피라도 잔뜩 마셨기 때문일까? 허기와 갈증이 제법 가라앉았기에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까지 새롬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깨달았다.
구미호라는 생물, 요괴라 해서 사랑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천지에 동족의 수가 한 줌뿐인데다가 기나긴 세월을 함께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가족 이상으로 애틋한 관계다.
그래, 솔직히 현실의 내 가족들이 서로에게 품은 애정을 다 합쳐도 새롬이가 지금의 나에게 품은 애정만 못할 것 같아.
그걸 깨닫자, 아까 내린 ‘결정’이 과연 타당한지 따지는 물음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돼지를 먹듯이 구미호는 사람을 먹는다. 여기에 인간의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 호랑이나 사자가 사람을 해쳤다 해도 인간이 호랑이와 사자의 사악함을 논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살려주는 건 더더욱 아니지.
말없이 폐가로 들어섰다.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인지, 새롬이는 아예 여우로 변신해서 흡사 귀여운 강아지처럼 잠들어있었다. 그 옆에 앉자 일곱 꼬리 여우가 내게 몸을 비비며 파고들어 왔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깥의 동료들’에게 알렸다.
바깥 동료 여러분.
특히 내 뒤로 진행해야 할 승엽이, 아리, 가인아. 미안해. 난 도저히 일반인 28명 죽여서 잡아먹는 건 못하겠어.
그래, 이 모든 건 영화 속 일이니까. 게임 캐릭터 대하듯이 28명 죽여서 잡아먹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까 도무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바깥에서 게임이라도 많이 해볼 걸 그랬나?
포기!
사람 잡아먹기도 못하겠고, 사람이 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모르겠다. 적어도 구미호의 지식 내엔 다른 방법은 없다고 나오네.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이 자살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알아낼 수 있는 건 알아내고 가도록 할게. 미안해.
오른손이 시꺼멓게 물들며 손톱이 흑요석처럼 단단해졌다.
손을 뻗어서 여우의 등을 느릿하게 쓸다가 적절한 부위를 살짝 움켜쥐었다. 새롬이는 내가 자신을 쓰다듬는다고 착각했는지 몸을 비벼왔다.
— 콰직!
… 고통의 시간은 길지 않았을 거야.
이미 묵성 할아버지가 직접 소화기에 맞아죽으시면서 알려주셨잖아? 구미호라 한들 특별히 신비한 힘을 쓸 때가 아니면 딱히 물리적으로 엄청 튼튼한 것은 아니니까.
기나긴 세월, 문명의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사람을 잡아먹으며 인간으로 변할 날을 꿈꾸던 소녀, 이대 나온 구미호의 숨이 멎기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
허름한 골목길을 걸어가며 생각했다.
지금부터 내가 알아내려는 정보가 동료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공포영화는 내부인으로선 실시간이지만, 바깥의 동료들은 편집본을 본다.
영화 한 편에 4개의 단편이 들어간 구조이니, 개별 단편은 길어야 40분 일터. 내가 진행한 내용 대부분은 편집 당하고 길어야 30분~40분 정도의 분량만 동료들이 볼 수 있으리라.
아까 집에서 했던 새롬이와의 대화는 그냥 생략 당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아. 새롬이를 죽이는 순간 정도만 나왔겠지.
그러므로 요란하게 행동해야 한다.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장면, 하이라이트를 만들어야 해.
“조금 민폐를 끼쳐야겠네.”
골목을 나와 번화가에 도착하자 이 시간까지 불이 잔뜩 켜있는 빌딩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태 야근 중인 건가? 잘 됐다.
당당하게 빌딩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즉시 막으려 했다.
“어엇? 이 시간에 무슨 -”
“안되나요?”
“… 들어오시지요.”
구미호 특유의 최면술은 한번 쓰기 시작하니까 점점 쉬워졌다.
“대웅상사? 건물도 엄청 좋고 크네! 근데 이 시간까지 직원을 부려 먹다니! 좀 혼내줘야겠지?”
다리가 시커멓게 변모하며 일격에 바위도 부술 거력이 실렸다.
— 쾅!
“이리 오너라!”
사무실의 문짝이 터져나가는 순간, 내부에선 난리가 났다!
“꺅!”
“뭐, 뭐야? 어떤 미친 새끼야?”
“여, 여학생? 경비는 대체 뭘 하고 -”
이제 시작이다.
*
빌딩 옥상에 앉아서 술잔을 내밀었다. 난데없이 사무실에 쳐들어온 구미호에 의해 넋이 나간 반백의 장년인, 차진운 사장은 덜덜 떨며 술잔을 채웠다.
“야.”
“에, 예!”
“내가 누구라고?”
“위, 위대한 구미호 님이십니다!”
건너편에 있던 남자, 김 부장이 눈치 없이 중얼거렸다.
“무, 무슨 이런 괴물이!”
“너! 이리 와서 무릎 꿇어!”
“죄, 죄송합니다!”
“내가 너희 왜 혼내는지 알아?”
사장과 부장, 솔직히 이런 조그마한 회사에 뭔 놈의 직급만 이리 세세한지 모르겠지만, 두 남자는 덜덜 떨며 아무 말이나 꺼내기 시작했다.
“여우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지 못해서….”
— 쿵!
“야!”
“흐어억!”
“내가 미친년이야? 내 질문에 대답 좀 못했다고 너희 무릎 꿇리고 벌세우게?”
“죄, 죄송합니다!”
“야! 김 대리!”
“네!”
“야근 수당 받은 적 있어?”
“…”
“와! 내 이랄 줄 알았다! 아까 차 사원도 똑같은 말 하더니, 너도 야근 수당 못 받았니?”
“…”
“이상한 거 있으면 또 말해봐. 누나가 사장 혼내줄게.”
진작부터 9개의 꼬리를 숨기지도 않고 꺼낸 지 오래다.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책상들과 손짓 한 번에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짓기 시작한 김 대리는 어딘가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베이터요.”
“뭐?”
“사원은 엘리베이터 쓰는 게 금지입니다. 저도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죠. 참고로 사무실은 7층이고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부장에게 손짓했다.
“야, 부장아.”
“…”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왜 못 쓰게 해?”
“… 회, 회사에 위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두 대 뿐이기도 하고 -”
“야, 너 그냥 계속 엎드려 있어. 손모가지 분질러버리기 전에.”
부장이 말없이 엎드린 사이, 이번엔 건너편의 다른 직원이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작년에 들어온 사원이거든요?”
“근데?”
“제가…. 공부를 좀 잘했어요.”
“잘했어.”
“그래서 사장님이 주말마다 자녀분들 과외를 저에게 시키세요.”
“… 과외비는?”
“나중에 주시겠다고만 하고….”
“아오! 야 차 사장!”
“여, 여우님!”
“너 과외비 언제 줄 거야?”
“부, 분명히 다 기록해 뒀습니다. 퇴사 전에 꼭 -”
— 탁!
“으악!”
“퇴사 전이 아니고, 이 병신아! 과외비는 지금 줘야지! 너, 내가 보는 앞에서 입금해. 핸드폰 있잖아!”
“죄, 죄송합니다….”
“이삿짐 나르기를 시킨 적도 있습니다!”
“차, 차장님이 자꾸 제 허벅지를 만지려고 하세요!”
여기 뭐 하는 회사야? 그냥 좀 요란하게 굴려고 들어왔을 뿐인데 무슨 이런 개 병신같은 회사가 다 있어? 이게 K 기업의 현실인가?
근데…. 생각해보니 대양 그룹의 오너 가문, 그러니까 우리 집안도 이런 일 꽤 많이 시키지 않았나?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자식들에게 하던 말이 뭐였지?
‘아랫놈들끼리 싸우게 만들어라. 너희는 언제나 그들의 중재자처럼 행동하거라.’
…
미안. 현실의 직원 여러분, 아버님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릴게요.
그때쯤, 밖에 나갔던 직원 한 명이 마침내 폭죽을 가득 가져왔다.
“준비하자!”
“… 진짜 이걸 전부 터트리실 겁니까?”
“응.”
“서, 서울 한복판에서, 야밤에, 옥상에서 이 많은 폭죽을요?”
“너, 내가 뭐로 보이니?”
“… 구미호요.”
“그래. 근데 겨우 폭죽 좀 터트리는 게 문제겠니?”
“그렇네요.”
“너희는 폭죽 들고 올라와. 그리고 차 사장!”
“에, 예!”
“신고해!”
“예?”
“경찰이나 교황청에 신고하라고 이 멍청아. 구미호가 미쳐 날뛰는 중이니까 살려달라고 해!”
“…”
박스를 가득 채운 폭죽을 사방에 설치하며 생각했다.
이것들이 터지는 순간만큼은 아무리 답이 없는 영화여도 생략할 수 없겠지. 지금, 이 순간은 반드시 동료들이 보는 스크린에도 나온다.
“폭죽 터트려.”
“… 알겠습니다.”
괴물을 퇴치하는 퇴마 집단, 교황청이 있는 세계에서 식인 구미호가 미쳐 날뛴다면, 당연히 이를 응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법.
그러므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료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21세기 구미호전의 시련, 구미호를 퇴치하는 퇴마 부대를!
— 피이이잉! 펑! 쉬이이잉! 펑!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엄청난 폭죽 사이에서 손을 뻗었다. 내 손끝에서 뻗어간 빛이 밤하늘에 거대한 문자를 생겼다.
「구미호 두둥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