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05)
304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6)
– 극장
구미호였던 기억을 잊고 과거 세탁을 끝낸 소녀가 교황청에 의해 구해지는 순간, 극장의 관객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침내 아리가 의도한 결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운 계획에서 가장 위험한 파트는 극 후반, 인간이 된 한유리가 망각의 비술로 자신의 기억을 지운 후였다.
그 앞부분이야 현실과 호텔 모두에서 온갖 다채로운 상황을 경험한 아리가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으나 극 후반은 아리의 인격조차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변수가 많았다.
“다행히 다 지나가는 모양이네요. 곧 커피숍 장면으로 넘어가겠죠?”
송이의 말에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는 에필로그가 쭉 이어졌는데, 과연 한유리는 인간이 된 이후의 상황도 미리 준비한 상태였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요괴가 수십 수백 년 동안 인간이 되기만을 갈망하며 준비해둔 안배는 빈틈이 거의 없었다.
그때, 차진철이 다소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저런 방법뿐이었을까? 새롬이라고 했나? 그 여우가 끔찍하게 죽은 부분이 좀 슬프네. 해피엔딩도 아니고 희생자도 너무 많아. 최종적인 승자가 저놈의 한유리인것도 좀 그렇네. 이 단편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를 꼽으면 무조건 한유리 아니냐?”
“정확히는 한유리를 조종한 아리 양이죠.”
김상현의 말에 차진철이 움찔했다. 송이는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다.
“진철 오빠, 저 방식 말고 다른 방법은 다들 떠올리지 못했잖아요? 애초에 시나리오는 상당 부분 정해져 있었어요. 아리가 시작할 때 다시 확인했듯이 한유리는 인간이었으니까요. 구미호가 인간이 되려면 사람을 먹어야 하니까 식인은 피할 방법이 없었어요.”
김상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 씨,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정해진 결말이었고, 아리 양이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박새롬, 그 여우에 너무 감정 이입할 것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백 명을 잡아먹은 요괴죠. 비참한 죽음이 어울리는 존재입니다.”
차진철이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상현 형님, 제가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냥 다른 방법은 없었나 싶어서….”
그때, 조용히 있던 가인이 입을 열었다.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리는 결말을 냈지만, 도인호 작가가 이 결말은 이상하다고 하면 다음 사람은 다시 구미호가 되어야 하니까요.”
“뭐 떠오르는 것 있냐?”
가인은 음료수를 들이켜며 목을 가다듬은 후, 제법 긴 설명을 시작했다.
“커피숍에서 시작하는 도입부는 이후 단편 진행을 위한 힌트가 담겨있죠. 아까 송이가 좋은 지적을 했는데, 한유리가 인간이 된 채 커피숍에 온 시점에서 시나리오의 큰 핵심은 정해졌어요.”
“구미호가 사람으로 변한 건 확정이니 식인해야 한다…. 라는 거지?”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확정이지만 식인이 확정은 아니죠. 이런 분야의 최고 전문가, 아리가 들어가기 전에 말했잖아요?”
가인이 아리의 말을 언급하자 다들 고개를 기울이며 기억을 되새겼다.
“구미호가 사람이 되는 법, 식인 말고도 있어요. 설화를 건드리는 거죠. 설화를 없애거나 조작하거나. 구미호 관련 설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으니 없애기보다는 조작해야겠죠.”
다소 재밌다는 표정을 짓던 엘레나가 답했다.
“간을 먹지 않고도 사람이 되는 법이 있다는 내용이 담긴 영화나 소설을 마구 퍼트린다거나?”
“아마 그런 방식 아닐까요? 자세한 건 관리국 사람이 알겠지만.”
주의 깊게 듣던 김상현이 예리한 지적을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작중 한유리가 시행할 수 있습니까? 세상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관리국 혹은 교황청이 쓸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 조직들을 두려워하며 폐가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구미호에게 가능한 방식이 아닙니다.”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구미호 개인의 능력으로 시행할 수 없죠. 무조건 교황청이 도와줘야 합니다.”
“대체 왜 도와줍니까? 아리 양도 그런 뻘짓을 하느니 여우 두 마리를 잡아 죽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죠.”
“네?”
“선생님, ‘설화를 이용한다.’라는 방법론을 아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혼자서 해봤을 리는 없잖습니까?”
“… 관리국에서 해봤겠군요.”
“그렇죠. 관리국이 실제로 해본 겁니다. 사람을 잡아먹은 요괴의 과거를 세탁해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설화를 비틀어준 거죠. 왜 그랬을까요?”
“…”
“여기서부터는 영화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 관리국 혹은 유사 조직인 교황청에 관한 분석이긴 합니다. 관리국 요원이 우리 중 둘이나 있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긴 한데….”
가인이 살짝 말을 고르자 김상현이 거들었다.
“마침, 두 분이 다 이 자리에 없군요.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관리국에 대해 우리끼리 고민해보겠습니까? 다행히 영화도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작가가 어찌 판단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엘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호텔에서도 관리국이 자주 나오니까요. 호텔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죠.”
가인이 다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201호에서 사악한 존재에게 인간을 밥으로 준 것, 202호에서 기밀 유지를 위해 내부 구성원조차 가차 없이 처단하려던 모습 등을 보며 떠올린 생각입니다. 관리국은 인류를 위하는 조직이긴 하나, 개별적인 사람의 목숨에 그리 큰 가치를 두는 것 같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김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리주의적인 조직이죠. 천명을 살리기 위해선 백 명을 죽일 수 있다. 나아가서 억 단위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선 수백만의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 세상을 지키기엔 합리적인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교황청이 900명 넘는 인간을 잡아먹은 식인 요괴를 도와주는 시나리오도 쉽게 나오죠.”
“… 900명을 넘는 인간을 죽였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겁니다. 그동안 봐온 관리국은, 설령 10만 명을 잡아먹은 요괴라 해도 그 요괴를 포섭해서 100만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과거를 세탁해줄 조직인 것 같네요.”
한참 동안 듣던 차진철이 긴 대화를 요약했다.
“결국, 저 단편을 식인하지 않고 돌파하는 방법은 그거지? 한유리가 자신에게 수백 수천의 인간을 살리고도 남을 능력이 있음을 교황청 상대로 입증해야 한다?”
“그런 거죠. 입증할 수만 있으면 설화를 어떻게 조작하니 따위의 문제는 한유리 손을 떠납니다. 교황청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어떻게 하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사실, 제가 들어갔어도 여태 설명한 무지하게 어렵고 힘든 길보다는 그냥 아리처럼 사람을 잡아먹었을 것 같아요.”
가인의 말을 들은 차진철이 순간적으로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별 수 있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승엽이 큰 소리를 냈다.
“다들 스크린 보세요! 지금 끝났어요!”
모두의 시선이 작가의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으로 쏠렸다. 그때, 가인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쳤다.
‘어쩌면, 우리 중 관리국 사람이 한 명 추가될지도 모르지. 만약 호텔 시네마의 보상이 반쪽짜리 티켓이라면…. 한 장의 티켓을 완성한 후엔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던 청년은 곧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직면한 호텔 시네마부터 해결하고 생각할 일이다.
*
– 김아리
…
…
…
헛!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극중극에서 나와 커피숍에 있었다. 망각의 비술로 기억을 주물렀기에 중간 기억의 공백이 상당하다. 마지막까지 잘 진행되었을까?
“그날, 그 순간은 남은 평생 잊지 못할 거랍니다. 거대한, 정말이지 자동차만 한 괴물이 절 덮쳤으니까요. 아직도 제가 그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운이 좋아서겠죠?”
모든 것을 잊은 한유리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도인호 작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 양의 이야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남학생들의 과도한 고백과 스토킹스러운 행동에 지친 나머지 한꺼번에 차겠다 마음먹고 저녁에 학교로 돌아갔다. 한데, 돌아가 보니 학교는 온통 타오르고 있었고 바닥엔 시체가 가득했다는 거죠?”
“맞아요!”
“자동차만 한 여우 요괴가 유리 양을 덮쳤고, 유리 양은 정신없이 도망 다니다가 교황청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흥미롭고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날 많은 사람이 죽었겠군요. 우리 다 함께 10초만 묵념을 하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리합시다.”
10초의 묵념이 있고 난 뒤, 작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 양.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수집하다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감이 발달했습니다.”
“직감…. 이요?”
“유리 양의 이야기에 어떤 ‘공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가슴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요?”
“그야 많은 학생이 죽었으니까요.”
“아니, 학생의 죽음과 별개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혹시 제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것 없으십니까?”
뭐야?
설마 아니지? 작가가 억지로 개입해서 한유리의 기억을 되살린다거나 하는 거 아니지?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감이긴 한데, 학생이 아니라 ‘요괴’쪽의 -”
지랄! 지랄! 감은 무슨 감이야?
작가 이 새끼는 실제 진행을 다 아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개수작을! 한유리가 기억을 의심하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잖아!
— 탁!
“저기요!”
“… 아리 양?”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 세세하게 따지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 유리가 당황하잖아요.”
바로 한유리 옆자리로 이동해서 유리의 손을 강하게 잡고 유리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으에엣! 아, 아리 씨…. 저 괜찮아요.”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아까부터 별 희한한 짓을 다 하니까 한유리는 크게 당황하며 자세가 흔들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유리의 마음속에서 싹튼 의심의 씨앗도, 일단은 다시 묻혔다.
“하하! 아무래도 제가 실례한 모양입니다. 아리 양은 순발력이 대단하시군요.”
“작가님만 하겠어요?”
“하하!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유리 양의 이야기 또한 신비롭고 무서웠습니다. 이쯤에서 ‘확정’하겠습니다.”
… 휴. 갑자기 터질뻔한 상황을 간신히 수습했다. 정말이지 이놈의 호텔은 종종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서 없는 위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방심할 틈이 없어.
잠시 후, 그동안 조용히 앉아있던 세 번째 이야기꾼인 차은표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앞선 분들의 듣다 보니 워낙 대단한 사연들이라 놀랐습니다. 제 이야기는 그렇게 대단치 않거든요.”
“은표 군, 이런 이야기에 대단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들려주시면 됩니다.”
“네. 이건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12살쯤이었을 겁니다. 당시의 저는 부모님과 미국에서 굉장히 큰 집에 살고 있었어요. 부모님 사업이 무척 잘 풀리시던 시기거든요. 그해 연말, 본래는 신년을 맞이해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부모님에게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기셨어요.”
갑자기 차은표가 말을 멈추더니, 작가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그, 다음 부분은 나중에 적당히 각색해주시겠어요?”
흡사 청년이 하려는 말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가는 살짝 웃었다.
“법적인 문제가 있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신상은 바라신다면 철저히 감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들어보셨겠지만, 미국에선 어린애들만 집에 두면 그 자체가 불법이거든요. 당시 부모님은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는 바람에 저만 집에 두고 떠나셨습니다. 그 대신 평소보다 훨씬 많은 장난감을 제게 선물해주셨죠.”
서서히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세 번째 이야기에 진입하기 직전, 문득 떠올렸다. 이대로라면 네 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
– 나 홀로 집에
“케빈!”
…
“케빈! 엄마 말 듣고 있지?”
“아, 듣고 있어요.”
이름 차은표라고 하지 않았어? 미국에서 살던 시기라 미국 이름을 쓰는 건가?
“엄마가 종이에 적어둘 테니까 그대로 하렴. 저녁은 냉장고에 넣어뒀고 -”
케빈의 어머니는 한참 동안 식사는 어떻게 해라, 바깥으로 함부로 나가지 마라, 개와 고양이 식사는 미리 챙겨뒀으니 신경 쓰지 마라, TV를 너무 많이 보면 안 된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케빈, 엄마·아빠 일 때문에 스키장에 가지 못해서 아쉽지?”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 아빠도 같은 생각이시란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케빈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 케빈 방 거실에 있단다! 이따가 꼭 열어보렴.”
10분쯤 후, 그녀는 날 껴안고 뺨에 키스한 후 남편과 함께 집을 떠났다. 현재 상황부터 파악하자.
…
내 상황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체적으로는 12세 소년이다. 나름대로 귀엽고 똘망똘망하게 생기긴 했는데, 딱히 초능력은 없는 일반인이다. 축복의 경우, ‘존재감 없는 소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써서 다시 쓰려면 반나절은 필요하다. 지금은 ‘나침반’만 쓸 수 있다.
외부 상황은 조금 복잡했다.
일단, 집 크기가 헛웃음 나올 정도로 컸다. 3층인데다가 방의 숫자를 세기가 힘들 정도다. ‘내 방 거실, 내 옷방, 내 놀이방’ 같은 서민이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현실인 저택이다. 이외에도 수지라는 개 한 마리와 캐시라는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부잣집을 노린 강도의 습격인가? 집에 미리 함정이라도 설치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