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09)
308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30)
– 박승엽
태초의 인간을 발동하자 내 의식은 몸을 벗어나 할 수 없는 새하얀 공간에 도착했다. 정말 이상한 장소였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이 사방에 날아다녔고, 내 앞에는 새까만 불꽃 같은 형체가 나타났다.
‘대체 여긴 어디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내게는 입이 없으니까.
…
이상하게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유산을 얻는 순간 사용법을 깨달았다는 형이나 누나들이 이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까? 나는 이 신비로운 장소에서 ‘명령’을 짜내야 한다. 이제부터 깨어날 ‘또 다른 나’가 금과옥조처럼 따를 계시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
‘… 저택에서?’
「언제까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무엇을?」
이건 쉽지.
‘생존!’
「어떻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생존하냐고? 나도 그걸 몰라서 능력을 쓴 건데?
고민하던 중 ‘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아, 알아서! 잘!’
의식이 흐릿해진다. 내 몸에서 또 다른 내가 깨어남을 느꼈다.
*
– 박승엽(태초의 인간)
문득, 이상한 장소에서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일까? 나는 또 누구지?
「저택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아서 생존하라.」
계시가 내려왔다. 머릿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혼란스럽던 마음이 맑아지며 이 문장이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임을 알았다.
… 계시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어의 뜻은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저택은 지금 내가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집이다.
영화는 커다란 장소에서 이상한 환상이 나오는 시커먼 벽을 여러 사람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내 주변엔 환상이 나오는 시커먼 벽이 없는데?
알아서 생존하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겠다. 난 안전하게 잘 살아있는걸? 무언가 날 위협하는 건가?
그때, 앞에 있던 분홍색 코끼리가 입을 열었다.
“케빈, 차를 마시지 않고 뭘 하는 거야?”
“… 케빈? 그게 내 이름이야? 넌 누구니?”
“나? 돌리펀트잖아!”
“돌리펀트? 질문 좀 할게.”
“질문?”
“지금 어디서 영화가 나오고 있어?”
돌리펀트는 대체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영화? 이 집에 그런 건 없는데?”
“하지만,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살아야 해.”
“대체 무슨 소리야?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으음…. 영화는 그렇다 치자. ‘생존하라’라는 건 무언가 날 위협한다는 건가? 주변에 위험한 존재가 있어?”
분홍색 코끼리, 돌리펀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한 존재? 이 장소는 안전해! 혹시 토마스를 말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이미 부숴버렸어.”
“아하! 이 장소엔 원래 위협이 있었는데, 네가 이미 부쉈다는 거야?”
“아마도? 그러니 케빈, 걱정하지 말고 차를 마셔.”
“차라는 건 이 물이야?”
“그래.”
“마실게.”
마음이 편해져서 거대한 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두 모금 정도 마시니까 맛이 좀 썼다. 고개를 들자 돌리펀트가 눈을 크게 뜨며 날 노려보았다.
“설마 케빈, 내가 정성 들여 끓인 차를 남기려는 건 아니지?”
“아닌데? 이따가 마시려는 건데?”
“이따가 마신다고? 지금이 티타임인데!”
“티타임이 뭐야?”
돌리펀트는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옆에서 작은 책을 가져왔다.
“티타임이란 차를 마시는 시간이야!”
“그렇구나. 그런데 난 차를 마셨잖아?”
“다 마시지 않았잖아!”
“다 마셔야 해? 티타임엔 차를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마시라고 적혀있어?”
돌리펀트는 또 당황하며 책을 코로 넘기기 시작했다.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같이 읽기 시작했다.
“다, 다 마셔야 하냐고? 그…. 그런 말은 없는데….”
“이거 봐! 당신이 훌륭한 영국 신사라면 언제나 여유와 품위를 잃지 말고 차 한잔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적혀있지?”
“… 응.”
“여유 있게 마시라고 하잖아. 한꺼번에 다 마실 필요가 없어. 난 천천히 마실래.”
“그릉가? 그런데 케빈, 이 사진은 좀 이상해!”
“뭐가?”
“영국 신사는 왜 코가 이렇게 짧아? 내 코는 훨씬 긴데?”
“넌 코끼리고 신사는 사람이니까?”
“코끼리는 영국 신사가 될 수 없어?”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코끼리는 영국 신사가 될 수 없는 걸까? 왜 계시를 내린 존재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책자를 이리저리 넘기며 유심히 살펴보자 조금 다른 글씨로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티타임에 참여한 코끼리는 코로 손을 대신할 수 있다.’
“돌리펀트! 이걸 봐. 코끼리는 코로 손을 대신할 수 있으니까 코가 손이야.”
“그럼 나는 왜 손이 코에 달린 거야?”
“어쩌면 손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손이 꼭 몸통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내용은 없어.”
“다행이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어.”
심각한 문제를 언급하자마자 돌리펀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책자를 넘겨서 마치 꽃 같은 옷을 입은 여성이 차를 마시는 장면을 가리켰다.
“봐. 손으로 찻잔을 기울여서 마시지?”
“응.”
“그런데 돌리펀트는 코로 찻물을 빨아들여서 입에 넣고 있어.”
“어어? 그거 설마!”
“돌리펀트가 아까부터 티타임 예절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어. 이제 코로 찻잔을 기울여서 마시도록 해.”
돌리펀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코로 찻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코를 손만큼 정교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일까? 찻잔이 균형을 잃으며 찻물이 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으앙! 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수련이 부족해서 그래. 날 봐.”
허리를 딱 펴고, 힘을 양팔에 집중했다. 온 정신을 모아서 내 몸통만 한 찻잔을 살짝 기울인 후, 간신히 엎지르지 않고 찻물을 마시는 데 성공했다.
“봐! 이렇게 하는 거야! 돌리펀트도 손, 아니 코로 해봐.”
“그, 그냥 케빈이 아까처럼 책에 적어주면 안 돼?”
“책에 적어줘?”
“코끼리는 차를 코로 빨아들여도 된다.”
“안돼! 규칙은 마음대로 어길 수 없어. 나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을 떠올렸으니까, 너도 지켜야 해.”
티타임의 예절을 지키라고 하자 돌리펀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돌리펀트의 코를 붙잡고 찻잔을 기울이는 연습을 시켰다.
*
– 극장
입을 반쯤 벌린 유송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이게 대체 뭐에요?”
가인은 아까부터 정신없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뭐긴 뭐야? 사람이 코끼리에게 차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는 거지!”
“아, 아니! 그니까! 왜 갑자기 이런 구도로 바뀐 거죠?”
가인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긴 한데, 상황 자체는 의외로 정석적인 호텔 공략 아닐까? 돌리펀트는 기이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을 어기면 공격하는 괴물이지. 승엽이는 그 괴물에게 ‘너 또한 규칙을 어기고 있다’라는 사실을 지적해서 모순에 빠트린 거야.”
가인의 말에 송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김상현이 입을 열었다.
“승엽 군의 새로운 힘인 태초의 인간은 제법 신기하군요. 기억을 잃었다?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많이 똑똑해진 느낌입니다. 아, 물론 승엽 군이 평소에 부족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인도 동의했다.
“상식이 사라지니까 생각의 폭이 자유로워지면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 같네요. 다만….”
“명령어는 조금 잘못 만든 것 같군요.”
“영화라는 단어는 이해하는데, 본인이 영화에 들어와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네요. 게다가 본인을 위협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내용에 넣지 않으니 눈앞에 살인 인형을 두고도 자신이 왜 위험한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이지만 그건 차라리 잘 됐군요. 모르니까 돌리펀트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저렇게 행동 중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예상과 좀 다른 모습이네요. 미친 사람처럼 도망 다니는데 미친 듯한 행운으로 살아가는 그런 장면을 예상했는데.”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이고, 지금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이겠죠. 그건 그렇고, 저 능력의 큰 장점이 하나 보이는군요.”
“지속시간이 엄청나게 기네요. 천운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극장의 사람들은 긴장이 서서히 풀림을 느꼈다.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야! 승엽이가 이런 식으로 넘길 줄은 몰랐는데?”
차진철의 감탄이 있었고.
“오! 방금 승엽이가 돌리펀트 보고 왜 두 발로 서지 않냐고 지적했어요!”
“쟤는 시킨다고 또 하네. 정말 두 발로 일어서려고 하잖아?”
송이의 탄성과 함께 이제 사람을 흉내 내기 위해 숫제 발레 연습을 시작한 코끼리가 있었다.
모두가 세 번째 이야기의 결말이 다가왔음을 직감할 때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척 만족한 표정의 돌리펀트의 목소리가 스크린에서 흘러나왔다.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어! 케빈 덕분에 즐거운 티타임을 보냈어. 이제 나도 훌륭한 영국 코끼리가 될 수 있어! 케빈도 즐거웠지?」
가인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제 저 코끼리가 슬슬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 다시 보니 귀엽지 않아요? 은근히 착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본인도 철저히 규칙을 지키는 모습이 -”
「아니.」
“음?”
“제가 잘못 들었나요?”
「재미없었어. 특히 홍차가 최악이야.」
“스, 승엽아?”
“으아악!”
「이런 쓰디쓴 물은 왜 마시는 거야? 티타임 같은 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꺅! 쟤, 쟤 미쳤어!”
단 한 명의 소년을 제외한 모두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심지어 스크린의 코끼리조차도 입을 딱 벌린 채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 저, 저! 박승엽, 이 미친 새끼가! 겁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특히 돌리펀트 널 가르치는 게 제일 피곤했네. 애초에 이 책자, 보다 보면 느껴지지 않아? 코끼리가 티타임은 무슨 티타임!」
가인은 그냥 웃기로 했다.
“하하하! 하기야 지금 저 승엽이는 무서운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행동이 조심스러우면 그게 더 이상하죠.”
차진철은 한없이 절망했다.
“다 깨놓고 저 병신이!”
「뿌우우우우우!」
슬픔에 가득한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스크린에서 터져 나왔다.
*
– 박승엽(태초의 인간)
“뿌우우우우우!”
돌리펀트가 갑자기 일어서서 내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분홍 코끼리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며 바닥을 적셨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혹시 나 뭐 실수했어?”
돌리펀트가 대답 대신 그 거대한 덩치를 세우며 앞발을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바닥을 굴렀다.
— 쾅!
일격에 저택 바닥이 으스러졌다. 이 시점이 되어서야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날 위협한다는 존재는 바로 돌리펀트 아니었을까? 그, 그러면 계시를 내리실 때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우오오오오!”
거대한 포효! 정신없이 옆으로 구르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돌리펀트는 바로 나를 쫓는 대신 방에 남아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돌리돌리! 화났어! 나 화났어! 케빈! 주전자에 넣어서 끓여버릴 거야! 납작하게 밟아서 종이로 만들 거야!”
“어떻게 사람이 종이가 될 수 있어?”
“닥쳐!”
왜 질문했을 뿐인데 화를 내는 걸까? 이 코끼리는 성격이 이상해!
돌리펀트가 고함지르고 몸을 뒤틀자 저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저택이 망가지기라도 했는지 틱!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저택이 어두워졌다.
눈앞의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자 돌리펀트는 더 크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케에에에빈! 어디 숨었어?”
— 쾅! 콰지직!
코끼리가 날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튼튼하고 단단한 저택조차 저 괴물의 몸통 박치기는 견디지 못했다. 집 전체를 울릴 정도의 진동이 쉼 없이 발생하며 천장의 각종 장식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뭐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다행히 내 쪽으로 떨어진 물건은 없었다. 손을 뻗어서 벽과 계단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중, 부드러운 솜털 덩어리가 만져졌다.
“뭐, – 흡”
돌리펀트가 들을까봐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데, 솜덩어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에에 드으응을 터어어치이이이해애앴네. 케에에에비이이인이이이 -”
뭐래는거야? 내 등을 터치했으니 케빈이 이겼다? 원래 솜이 말도 하나? 소리를 내는 솜을 보자 불안해져서 멀리 던졌다.
— 쿠구궁!
또다시 저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연달아 가해졌기 때문일까?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벽이 무너지며 저택 바깥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들어왔기 때문인지, 벽을 무너트린 코끼리가 코를 뻗어서 눈을 가렸다.
그때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계시는 내게 ‘저택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아서 생존하라.’라고 했지.
이 말은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저택 바깥으로 나가면 생존에 성공했으니까 그때부턴 내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일까?
편하게 생각하자!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니 빼자. 그러면 ‘저택에서 알아서 생존하라.’만 남아. 저택 밖으로 나간다면? 저택에 있는 동안 알아서 생존하는 데 성공한 셈이지.
기쁘게 웃으며 저택 밖으로 나왔다. 나는 계시를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하하하하! 성공!”
… 서서히 의식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