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16)
315화 – 완벽한 아이 (3)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6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설원
현자의 조언 : 0]
– 한가인
동료들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리가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2층으로 올라왔다.
아리는 이미 스노 글로브 설원으로 나간 것 같았다. 느릿하게 휘날리는 눈살을 헤치고 나가자 가벼운 옷차림으로 설원을 거니는 아리가 보였다.
“그 옷차림으로는 춥지 않아?”
“견딜 만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말없이 새하얀 땅에 발자국을 남기며 나아갔다.
10분이 흐르고 또 10분이 흘렀다. 설원의 눈보라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눈밭을 뚫고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땀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흐를 때쯤, 아리에게 물었다.
“오늘 들어갈 거야?”
“글쎄.”
“내일이 낫지 않겠어? 내일이면 또 조언이 찰 테니 한번 물어보는 게 어때?”
아리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특이한 질문을 내게 돌렸다.
“넌 네 부모님을 사랑해?”
여기서 ‘아니요’라고 말하면 불 속성 효자 아님?
“당연한 소리를….”
“왜?”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질문을 받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물론 이유야 한도 끝도 없이 많다. 내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니까!
“날 키워주셨잖아? 단순히 물질적인 면 말고도 정서적인 면으로도 그렇지. 내 부모님은 꽤 좋은 분이신데.”
“내 질문은 사랑을 유지하는 원인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낸 원인이 무엇인지야.”
사랑을 유지하는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낸 원인이 궁금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네가 20년 동안 부모님을 사랑했고, 호텔에 온 지금도 그리워하는 건 물론 그분들이 널 잘 길러주셨기 때문이겠지. 개차반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그리워하진 않았겠지. 도가 지나쳤다면, 예컨대 아동 학대를 당했다? 부모님이 언제 죽나 궁금해했을지도 모르겠네.”
“네가 갓난아기이던 시기로 돌아가 봐. 그때도 넌 부모님을 사랑했을 거야. 부모님은 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여겼겠지.”
“보통 그렇지.”
“왜 그럴까? 부모는 왜 아이를 사랑하지? 본인이 늙었을 때 자신을 부양해줄 존재라서?”
“… 과한 이야기네. 그런 일은 아이를 낳고 수십 년 후의 미래 이야기야. 또, 장성한 아이가 부모를 봉양할 만큼 잘 살 확률도 높지 않아.”
“네 말이 맞아. 그 반대는 어때? 더 신기하지 않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사랑해. 그 부모가 자신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어준 상황도 아닌데 말이지.”
슬슬 아리가 무슨 이야기 중인지 알 것 같다. 그녀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처음 만들어지는 순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로선,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른다. 무슨 계산상 이득은 너무 먼 이야기다. 자식으로선, 막 태어나서 만난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도 왜 그들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사랑할까?
그 답을 굳이 따져 묻자면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낭만이 없는 이야기라 구태여 꺼내지 않을 뿐이지.
“그러니까, 부모·자식이 서로 사랑하는 건 유전자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내 말에 아리는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후천적으로 부모님이 잘 베풀어줬다, 문화적 배경이나 사회적 압력 등은 부차적인 이유라는 거야. 혹은 이미 발생한 사랑을 유지하는 원동력이거나. 사랑의 시작은 유전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다.
별개의 거창한 이유를 들먹이기엔, 지성이 없다시피 한 쥐 같은 동물들도 자기 자식은 끔찍하게 아끼고 자식은 부모를 따른다. 결국 사랑의 시작은 유전자라고 볼 수 있겠지.
물론, 인간의 사랑은 저런 미물의 사랑보다 훨씬 고차원적이라 믿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전자의 역할이 상당하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어느 정도 그렇지.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해?”
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까부터 어딘가 우울해 보였던 표정이 살짝 펴졌다.
방금의 대화에 마음이 편해질 만한 내용이 있었나? 보통은 불편하고 낭만이 없다고 느낄만한 종류의 대화 같은데.
“에잇!”
갑자기 아리가 눈덩이를 집어 들더니 내게 던졌다!
“으악! 뭔데 대체?”
“받아라! 독수리 탄!”
대응할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눈덩이를 피하며 생각했다. 아리의 이런 황당한 면은 미로랑 똑 닮았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있던 동료들도 튀어나와서 눈덩이를 같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
– 김아리
— 찰랑!
“…”
— 철벅!
“… 나랑은 친해질 생각 없니?”
송이에게 빌려온 페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분명, 송이 말에 따르면 거울의 방에 들어가기 직전에 페로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다고 하던데….
“너무 잠만 자는 것 아니야? 얍!”
욕조에 있던 둥근 플라스틱 장난감을 휙 던졌다. 페로가 여태껏 게으른 모습을 보여온 것은 눈속임이었다는 듯, 화려한 몸놀림을 –
보이진 않았다. 그냥 장난감에 맞더니 꽥하고 쓰러졌다.
“…”
— 삐이이익! 삐이이익!
“이럴 때 보면 네가 황금알에서 나온 신비의 생물이라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
나에게는 딱히 사전 경고해줄 생각이 없나 보다. 뭐, 항상 송이만 챙기는 생물이니까.
저주의 방에선 은근히 승엽이도 챙기는 것 같긴 한데, 거기까지네. 날 챙겨줄 생각은 없나 봐.
— 철벅!
욕조에서 나와 머리카락과 몸을 말린 후, 가벼운 옷차림을 했다. 이제 더 시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출발하자.
가인이는 조언을 한 번 더 듣고 가길 바랐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올빼미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해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본인의 의도를 섞어서 기묘하게 비튼 대답을 전해주곤 하지. 올빼미가 미로의 부활을 바랄까?
아닐 것 같다. 괜한 변수를 늘린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따라서 무어라 질문하더라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어떻게든 넣어서 대답해줄 것 같았다.
— 팅!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침내, 오랜 세월 고대했던 순간이 도래했다.
*
– 김아리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바닥, 벽, 천장까지 시야에 닿는 모든 장소에 번쩍이는 거울이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중, 위화감을 느꼈다. 거울은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반사하는 존재다. 거울이 번쩍이려면 빛을 만들어내는 광원이 따로 있어야 할 텐데, 이 공간에 그런 것은 없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호텔에서 이 정도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지.
잠시 후, 이미 전해 들은 알림이 떴다.
「김아리 참가자,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호텔의 숨겨진 비밀, ‘거울의 방’을 발견하셨습니다!」
“발견은 송이가 한 것 알잖아. 근데 문구가 그대로네. 성의가 부족한 것 아니야?”
장난스레 일침을 가해봤지만, 호텔은 내 말을 무시한 채 나머지 내용을 전했다.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소원에는 티켓이 필요하지만 처음 한 번은 무료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거울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방의 거울에서 다채로운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거울은 흉맹한 사기(邪氣)를 담아낸 강대한 보검을 보여주었다.
어떤 거울은 우주의 별빛이 깃든 신비로운 옥좌를 보여주었다.
어떤 거울은 오래된 피에 숨겨진 힘을 일깨워 초월자로 다시 태어난 나를 보여주었다.
어떤 거울은, ‘지적인’ 미소를 짓는 미로를 보여주었다.
“…”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호텔 어딘가에 있을 전능한 존재, 관리국에서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위대한 자에게 도움을 구하며 내 정신을 한 점으로 모았다.
오래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호텔, 아주 오래전의 호텔에서 미로와 함께했던 시간이 스쳐 갔다.
밥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던 미로, 저주의 방에서 이번엔 다른 사람이 봉인 당했다며 기뻐하며 멋대로 날뛰다가 방을 망칠 뻔했던 미로. 항의하는 동료를 힘으로 찍어누르며 반쯤 죽이려 했던 미로.
…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
에헴! 조금 더 생각하자 이번엔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맛있는 걸 먹었다며 내 입에도 넣어주던 소녀, 밤에 혼자 자기 싫다면서 소파에서 날 붙들고 잠들던 소녀, 날 위협하는 동료를 손가락질 한 번에 날려버리던 미로.
이 모든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다. 인간은 본디 망각의 동물인 법인데, 어찌 수십 년 전의 일이 이토록 생생할 수 있을까.
탈출 후의 기억은 순서로 따지면 훨씬 후의 일인데도 많은 부분이 흐릿하다. 날 처음으로 거두었던 관리국 지부장도, 당시엔 내가 선배라고 불렀던 다른 요원들도….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았다. 고요한 호숫가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며 발생한 파동이 호수를 채우듯, 하나의 소원이 일으킨 파동이 마음 전체를 채워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인간이라면 품을 수밖에 없는 다채로운 충동이 사그라든다. 그 무엇보다 강인한 단 하나의 소망이 다른 모든 소망을 집어삼켰다.
보검과 옥좌, 다시 태어난 나를 비추던 거울들이 하나둘 그 빛을 잃었다.
마침내 신비롭게 미소 짓는 미로를 비추는 거울만 남는 그 순간, 간절히 소망했다.
부디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나의 어머니에게 다시금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를. 부활에 앞서 그녀의 정신에 다시금 정명함이 깃들 수 있기를.
거울이 요동치며 알 수 없는 빛을 발했다.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소원 내용 중 일부가 이룰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이룰 수 없는 부분이 있어? 갑자기 무슨 -”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거울이 알 수 없는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이 영상은….
미로에 관한 영상이다.
*
…
…
…
알았다. 왜 거울의 방에서 내 소원의 일부는 이룰 수 없다고 진단했는지, ‘이룰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았다.
예전에 송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미로가 지성을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울의 방에서 소원을 빌며 치른 대가?
송이는 그럴 리 없다고 했었지. 거울의 방이 받는 대가는 오직 티켓뿐이며 인간의 지성 따위를 대가로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로가 지성을 잃은 것은….
미로 스스로 바랬기 때문이다.
“괜찮아. 다른 방향을 알았으니까.”
거울의 방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른 가능성 또한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
— 팅!
다시금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영상을 보여주었다.
… 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아름다운 소녀를 본다.
나와 쌍둥이처럼 똑 닮았으면서도 신비롭게 휘날리는 은발을 가진 소녀는 거울의 방에서 얌전히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위대한 옥좌에 앉아계신 호텔의 지배자께 기도합니다.
저는, 완벽한 동료를 얻고 싶어요.
호텔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아이. 날 때부터 특별한 힘을 가진, 비범한 운명을 타고난 아이.
사악한 신이 끝없는 힘을 휘둘러도 그 공포에 굴하지 않으며, 시련의 실타래가 배배 꼬여있어도 단숨에 풀어낼 수 있는 아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성을 가졌으면서도, 큰 틀에선 인류의 대의를 지킬 수 있는 아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앞서는 최우선 조건이 있답니다. 그 아이는 절 사랑하며 배신하지 않아야 해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지더라도, 억겁의 시간이 흘러 모든 기억이 한순간의 꿈처럼 흩어질지라도 –
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제게 완벽한 아이를 주세요.」
거울 속에서 밝게 웃는 소녀를 등지고 돌아섰을 때, 눈에 뜨거운 물이 고이며 시야가 흐릿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래, 어렴풋이 예상했어. 오래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미로에 대한 기억과 감정만 이토록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내 모든 기억과 감정이 닳아 없어졌는데도….
오직, 단 하나의 기억과 감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다.
나는 미로의 완벽한 아이였다. 나의 유전자는 미로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