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22)
321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8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3호 – 저주의 방 ‘새로운 시작’
현자의 조언 : 2]
– 한가인
긍지가 열어젖힌 문 뒤편의 신비로운 존재를 보는 순간, 넋을 잃었다.
어지간한 건물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광대한 공간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존재는 굳이 따지면 거대한 고래와 닮아있었다. 허공을 헤엄치듯 유영하는 존재의 몸에는 조그마한 날개와 지느러미가 있었고, 그 살덩이들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아름다운 빛이 공간을 메웠다.
거대한 존재가 천천히 돌아서며 나를 바라본다. 내 몸 전체보다도 훨씬 거대한 눈이 나를 비추는 순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크으읏!”
나도 모르게 무릎 꿇을 뻔한 순간, 뒤에서 뻗은 손이 날 붙들었다.
“아드라비타, 적당히 하시지요. 당신이 원하던 소통 담당 승무원을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긍지’의 말이 끝나자 날 짓누르던 유무형의 기운이 사라졌다. 간신히 자세를 바로 세우자 긍지가 내게 말했다.
“한가인 님,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시죠. 저놈이 제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아서 말이죠.”
“… 아드라비타? 내 말 들립니까?”
아드라비타는 아무리 봐도 이 방의 죄수가 아닌가 싶다. 저런 존재가 인간의 말에 반응을 –
「듣□ □다.」
반응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 거지? 중간에 마치 잡음이 낀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5□□가 □□않아 정□적□ 소통 불□.」
“…”
똑같다. 아드라비타는 무언가 의사를 전달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잡음이 방해하고 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아. ‘5’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느꼈다. 저 존재가 죄수라면 죄수가 우리와 소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무언가는 호텔뿐이겠지.
대체 뭐지?
난데없이 시나리오가 뒤바뀌며 무대가 우주선으로 바뀐 것만 해도 황당한데, 아무리 봐도 죄수로 보이는 아득히 초월적인 존재와 시작부터 대화 중이다. 심지어 호텔은 그 소통을 방해 중이기까지 하다.
그때, 뒤에서 긍지가 말했다.
“말이 통하는 모양이군요. 한가인 님, 아드라비타에게 제 말을 전달해주세요.”
“알겠어.”
“아드라비타, 최근 갑자기 오염을 퍼트리며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는 이유가 뭡니까? 분명 인류의 개척에 협조하겠다며 여정에 참여하신 것 아닙니까? 불만이 있다면 말해주시죠.”
오염. 새로운 시작. 인류의 개척. 잠깐 사이에 키워드가 여럿 튀어나왔다.
일단은 부탁대로 그 말을 전해주었다. 긍지의 말을 내가 그대로 다시 읽어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억□라.」
상대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다음 순간, 갑자기 나와 긍지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공간 밖으로 던져졌다.
이 순간만큼은 너무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긍지를 돌아봤는데, 긍지도 아리의 몸으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 뭐야 대체?”
“나가라는 것 같네요. 한가인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네가 나에게 물어보면 어떡해?”
“혹시 아직도 기억이 온전치 못하십니까?”
아리의 선홍색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눈앞의 존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올리기 어려웠다.
[조언 : 2 -> 1]‘뭐라고 대답해야 해? 빨리!’
[이젠 슬슬 깼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지?]“이젠 슬슬 깼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지?”
방금 대답이 ‘긍지’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 팽팽한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며 아리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다행입니다. 혹시 냉동 수면 도중에 오염에 노출되었을까 걱정했거든요. 오염 때문에 승무원 몇몇은 파기해야 했습니다.”
“… 파기?”
“거의 다 왔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572일 16시간 32분 후면 도착합니다.”
순간 입이 벌어질 뻔했다. 거의 다 왔다면서 뭐? 572일?
간신히 표정을 통제하느라 말없이 있자 긍지가 홀로그램이 떠 있는 장소로 날 이끌었다. 여긴 또 무슨 장소일까?
“본래는 새롭게 시작하실 분들을 위한 교육 장치긴 한데, 지금 한가인 님께 유용할 것 같습니다. 이걸 보고 계세요. 아드라비타가 또 이상한 짓을 할지 모르니 저는 좀 바쁘거든요.”
긍지가 떠난 후, 나는 ‘교육 장치’라는 물건을 작동시켰다.
*
… 대충 상황을 알았다.
첫째, 내가 있는 장소는 ‘외행성 개척’이라는 터무니없는 임무를 위해 날아가는 우주선, ‘인류의 긍지’호다. 아리의 몸을 빌려 나와 대화 중인 존재는 우주선의 메인 AI다.
둘째, 우주선 내부엔 동면 중인 ‘승무원’들과 외행성에 도착한 후 급속 성장시킬 ‘인간 배양 키트’가 대량으로 준비되어있다. 승무원들은 전원 ‘강화 인간’이라 한다.
셋째, 아드라비타는 인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신적인 존재다.
지구에 비해 가혹할 수밖에 없는 외행성에 인류가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우주선의 보조 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탑승했다고 한다. 그 대가로 개척지에서 ‘신앙을 퍼트릴 권리’를 약조했다는 내용 또한 담겨 있었다.
넷째, 거의 다 왔다는 AI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인류의 긍지 호가 여행을 시작한 지 무려 482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동 기간만 500년에 가까운데 572일 남았다면 거의 다 도착했다고 볼 수 있겠지.
…
하나같이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이야기다.
솔직히 너무 스케일이 커서 도리어 정신이 멍해졌다. 이 시대는 인류의 아주 먼 미래일까? 외행성을 개척할 정도의 미래?
아드라비타 같은 존재와 ‘계약’했다는 점도 시사할만하다. 계약이란 상호 대등한 존재끼리 하는 것이니까.
물론 개개의 인간은 아드라비타 같은 존재가 보기에 여전히 하찮겠지만, 인류 집단은 저런 존재와도 대등한 계약을 성사할 정도의 힘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시나리오부터 체크하자.
「시나리오 :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호텔 일행은 이해할 수 없는 광활한 세계에 흩어진 채 깨어났다. 난데없이 자신을 ‘신인’이라 부르는 원시시대의 부족민 사이에서 깨어난 한가인은 천막 바깥의 노인에게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뭐야?”
당황스럽다. 내용 자체는 보자마자 알아들었다.
203호의 첫 번째 시도 당시에 우리는 원시시대의 천막에서 깨어났다. 시나리오 이해는 바로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고 있다.
천막 바깥으로 나가면 ‘늙은 늑대 발톱’이라는 부족의 지도자 격 노인이 있다. 그 노인과 대화하면 ‘꿈틀거리는 이빨’이라는 괴물이 덮칠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게 된다.
…
다 알겠는데, 그 이야기가 왜 지금 나오냐?
지금 난 우주선에 있는 것 안 보여? 시나리오가 바뀐 상태면 시나리오 이해도 그에 맞춰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줘야 하는 것 아니야?
크게 기대했던 시나리오 이해에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이 적혀있자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혼란에 빠진 내 뒤편에서 ‘긍지’가 나타났다.
“재교육은 받으셨나요?”
“상황은 이해했다. 질문이 하나 있어.”
“다행입니다. 질문이 있으신가요?”
“넌 인류의 긍지 호의 메인 AI라고 했지?”
“네.”
최대한 저 AI가 날 의심하지 않게끔 질문을 나름대로 가다듬었다.
“AI라면 너는 원래 어, 사람의 몸과 무관한 존재잖아?”
“당연하죠.”
“네 본체는 따지고 보면 이 우주선인 것 맞지?”
“물론입니다.”
“그 몸은 뭐야?”
대체 저놈은 왜 아리 몸에 들어가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저놈을 쫓아내고 아리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지?
“아하! 확실히 그 내용은 교육 장치에 없겠네요. 김아리 양은 인류의 긍지 호의 선장님이십니다. 선장님께서는 나노머신, ‘오래된 피’의 주인이시라 신체의 내구성이 아주 뛰어나시죠. 이 때문에 여정 도중엔 제게 몸을 빌려주신 상태랍니다.”
꽤 많은 의문이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시나리오상 아리는 이 우주선의 선장이며, 내부에선 ‘나노머신’으로 취급 중인 오래된 피로 인해 불로불사의 존재다.
이 때문에 아리는 500년에 달하는 우주여행을 냉동 수면 없이도 버틸 수 있다. 그래서 우주선의 AI는 아리의 몸을 평소엔 본인이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사람의 몸을 쓰는 건 ‘아드라비타’와의 소통 때문인가? 모르겠다.
잠깐 사이에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어서 머리가 포화 상태가 되었다.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며 생각했다.
동료들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황상 우주선 어딘가에 있다는 ‘승무원’들이 동료들 아닌가?
“나머지 승무원은 어디 있지?”
“모두 냉동 수면 중이십니다. 이제 한가인 님도 다시 주무시는 게 좋겠네요.”
“뭐?”
— 삑!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삽시간에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내 몸을 한걸음에 달려온 ‘긍지’가 조심스레 잡아들었다.
“한가인 님, 실례합니다. 아무래도 기억이 온전치 못하신 듯하니 돌발행동을 하실까 염려되어 마취했습니다. 다시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572일 16시간 11분 후에 뵙겠습니다.”
이미 굳어가는 입을 강제로 움직여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애초에 왜 날 깨운 거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드라비타가 갑자기 여정을 방해했기에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거든요. 다행히 아드라비타가 다시 협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번개 같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683,615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3호 – 저주의 방 ‘새로운 시작’
현자의 조언 : 3]
의식이 돌아왔을 때, 시야에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들어왔다.
우주선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헐벗은 원시인들이 내 주변에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날 향해 무릎 꿇고 있었다.
“… 설마.”
내 목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원시인들이 죄다 눈물 흘리며 감격하기 시작했다.
“오오! 신인께서 깨어나셨다! 신인께서 깨어나셨다!”
광란 속에서 내 눈이 향한 장소는 원시인들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황당할 정도로 불어난 상태창의 숫자만 넋 나간 채 바라보았다.
[683,615일 차]울부짖으며 내 손이라도 잡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천막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전사들은 내가 혼자 몸을 추스르는가 보다 생각했는지 협조해줬다.
천막을 거닐며 우주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을 되새겼다.
대체 왜 시나리오가 바뀐 걸까? 처음엔 단순히 미로의 합류 때문이라 생각했지.
한데, 우주선에서 잠들기 직전 번개같이 다가왔던 깨달음과 그 근거들을 다시 떠올렸다.
우주선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상정하지 않은 듯한 시나리오 이해의 내용.
마지막까지 깨어나지 못했기에 우주선의 존재 자체를 모를 동료들.
갑자기 이상한 짓을 벌여 우리 중 누군가를 깨우려 했던 아드라비타.
… 어쩌면 시나리오는 바뀐 적 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