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27)
326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6)
– 유송이
꿈을 꿨다. 아주, 엄청나게 긴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세포 하나하나가 모조리 얼어붙은 채 반투명한 관에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깥세상은 빛으로 가득한 것이 꼭 천국을 닮아있었다.
언젠가 밖으로 나갈 날을 고대하며 어렴풋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 자그마한 형상이 관을 향해 다가왔다.
… 어라?
— 치이익!
“유송이 님, 정신 차리셨습니까?”
“…”
“유송이 님?”
“이, 이번엔 나야?”
“예?”
정신 차려! 아리의 몸을 빌린 이 AI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라고!
기억과 자아가 ‘승무원’과 다르다 싶으면 슬슬 날 의심하기 시작하겠지. 그러니까 ‘아는 체’할 필요가 있다.
“아, 잠깐 머리가 아파서. ‘긍지’. 무슨 일이지?”
바로 긍지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나는 널 기억하고 있다고 어필하자 반응이 있었다.
“본래 차가운 곳에서 나오면 머리가 아프곤 합니다.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다행히 절 바로 알아보시는 것 보니 기억의 문제는 크게 없으시군요.”
그 말과 함께 아리가, 아니 긍지가 우주선을 걷기 시작했다. 다음 대사는 역시 가인 오빠에게 들은 대로였다.
“유송이 님, 아드라비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한가인 님과 유송이 님이 아드라비타와의 소통을 담당하셨거든요.”
아무래도 이 ‘우주선 각성’ 이벤트는 꼭 가인 오빠가 깨어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AI가 이번엔 나를 깨웠다.
“무슨 문제?”
“아드라비타가 며칠 전부터 우주선을 오염시키려 들었거든요.”
새하얀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오랜 냉동 수면에서 깨어나면 종종 기억상실에 걸릴 수 있다는 말을 전에 가인 오빠가 저 AI에게 들었다고 했었지?
그 말은 의외로 사실이네.
지금 내 기억이 어딘가 불분명하다. 오늘 아침 일찍 다 같이 일어나서 203호의 초반 구간을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회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저주의 방엔 언제쯤 들어갔는지에 관한 기억이 죄다 흐릿했다.
굉장히 심각한 건, 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 딱 한 문장만 명확히 떠올랐다는 점이다.
‘이야~ 이번엔 송이 역할이 아주 크네! 너만 믿고 기다릴게!’
회의가 끝나갈 때 가인 오빠가 한 저 말은 선명하게 기억나. 그런데 내 역할이 뭐야?
“긍지야.”
“예?”
“다른 승무원 깨우는 건 어때? 한가인 승무원을 깨울 수는 없어?”
“하하! 오랜만에 일어나서 외로우신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송이 님의 체감 시간 기준으로는 조만간 다른 분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웃으면서 말하는 것 치고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내용이다.
한숨 한번 쉬고 따라가던 중, 아까 AI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의문이 생겼다. 아드라비타의 오염이란 대체 뭘까?
가인 오빠는 초반부터 ‘기억상실’ 때문에 AI로부터 의심을 사서 행동을 조심했지만, 나는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는 듯하니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드라비타의 오염이라는 건 대체 뭐야?”
“으음…. 매우 전문적인 개념을 두 글자로 축약한 것이라 설명이 어렵습니다.”
“내가 그 개념을 이해해야 아드라비타와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니가 설명을 찰떡같이 잘해야지!
“그 말씀은 설득력이 있군요.”
긍지는 잠깐 멈춰선 채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이기 시작했다. 흡사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행동 같아서 신기했다.
“기존 생명의 유전자와 영혼을 비틀어서 아드라비타의 종복으로 만드는 과정이랄까요?”
“어…. 최면이나 세뇌 같은 거야?”
“마법의 힘이 아니라 생물학적 과정이긴 한데, 결과는 비슷합니다. 아하! 매우 비슷한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비슷한 사례?”
“혹시 동물 길러보셨습니까?”
“엄청 많이.”
“오호! 그렇다면 이해가 쉽겠군요. 개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개?”
“사람이 사랑하는 존재를 만날 때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보통 인간이 연인이나 반려자, 부모나 자식을 만나면 옥시토신의 분비량이 50% 정도 증가합니다.”
“그래?”
“개가 주인을 만날 때 옥시토신의 분비량은 60% 혹은 그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으음….”
“개는 인간을 사랑하도록 개량된 늑대입니다. 상당수 개는 자기 부모 견이나 자식 견에 대해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강한 감정을 인간 주인에게 느낍니다.”
“들어보긴 했어.”
“아드라비타의 오염이 그와 같습니다. 그는 숭배받길 원하는 존재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긍지는 다시금 걸어갔다.
그러니까 아드라비타가 오염시킨 인간은 아드라비타를 사랑하고 숭배한다는 이야기야? 개가 인간을 사랑하듯이? 이건 좀 혐오스럽네.
그때, 긍지가 거대한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유송이 님, 부탁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이 녀석은 저와 소통을 거부하거든요. 참, 팔찌로 시각과 청각을 차단해주시고 제 손을 잡아주세요. 감각을 천천히 되돌리셔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감각을 차단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긍지의 손길에 이끌려 걸어가던 중, 긍지가 내 손바닥을 툭 툭 건드렸다. 이게 신호다 싶어 최대한 느릿하게 감각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형상이 시야에 흐릿하게 비춘다 싶더니 어느샌가 거대한 비행 고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송이 님, 괜찮으십니까?”
“응.”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시죠. 저놈이 제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아서 말이죠.”
“… 제 말 들리시나요?”
느긋하게 허공을 부유하던 비행 고래가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듣□ □다.」
‘듣고 있다.’
어라?
“지금 말한 것 맞죠?”
「아□ 5□□가 □□ 않아 정□적□ 소통 불□.」
‘아직 5회차가 되지 않아 정상적인 소통 불가.’
“아직 5회차가 되지 않아 정상적인 소통 불가? 맞나요?”
“무슨 대화를 하시는 겁니까?”
긍지는 둘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아드라비타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 출렁!
“으악!”
고래의 빛나는 몸 전체가 출렁임과 동시에 일종의 충격파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사방을 향해 뻗었다.
순간적인 기습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힘의 방출에 나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는 작은 소녀에 불과한 긍지 또한 뒤로 날아갔다.
그때, 허공을 날아가던 내 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붙잡은 듯 허공에서 멈추더니 부드럽게 착지했다.
‘실수. 미안하다.’
“… 네.”
방금 아드라비타는 자신의 잡음 섞인 의사 표현을 내가 정확히 이해하자 놀라서 충격파를 뿜어낸 것이다!
아드라비타가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들□□?」
“… 예?”
‘들리나?’
“들리나?”
‘희한하군. 인간은 본디 청각을 통해 소통하는 존재일 텐데….’
“지금은 어떻게 의견을 전달 중이신 건가요?”
‘나는 전달하지 않았으며, 명료하게 생각 중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뜻을 전한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지 고민해보라.’
아드라비타가 내게 의사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내가 모종의 힘으로 그의 생각을 읽고 있다?
설마 이심전심?
그동안 이 힘으로 신적인 존재의 생각을 읽은 적은 없었는데?
“떠오르는 힘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당신 같은 존재의 생각을 읽은 적은 없어요.”
‘그야 나는 너희에게 어떻게든 뜻을 전하려 노력했고, 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어렴풋이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이 나와 그 모두에게 대단한 기회라는 것!
“하실 말이 있으시다면 -”
‘우선, 방해꾼을 내보내야겠군.’
기묘한 파동이 공간을 메웠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자 긍지가 사라졌다.
“… 당신의 목적은 대체 뭔가요?”
‘너희를 해칠 생각은 없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원래 악당들도 죽이기 전까진 해가 없는 체하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해요.”
‘미쳤다?’
“아닌가요?”
‘내게 변화가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광기는 아니리라. 광기는 없으며, 오로지 적응이 있을 뿐.’
“적응? 제 말은, 당신은 이미 우리를 여러 차례 도왔으니까요.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죠.”
‘너희를 돕는 것이 왜 내 죽음과 연결되는가?’
“저주의 방이 해결되면 내부의 모든 존재가 사라지잖아요?”
‘…’
아드라비타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소통의 벽을 느꼈다.
“저기요?”
‘아이야.’
“예?”
‘아직 이 장소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죽음이라. 그리 여길 수도 있겠지. 허나 호텔의 본질은 단절이 아니다.’
“네?”
‘죽음이란 영원한 끝이니 곧 단절이요, 삶이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예정하고 있으니 역시 단절이라.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모두 호텔의 본질이 아니다. 오로지 순환만이 있을 뿐.’
“저기….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굳이 이렇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셔야 하나요?”
‘더없이 명쾌하게 말했는데 네 작은 머리가 이해하지 못함이 어찌 내 탓이겠느냐.’
“…”
니가 멍청한 게 내 잘못임?
그 말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동시에, 이심전심이 아드라비타의 ‘기분’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지금 나와의 대화를 꽤 즐거워하고 있었다.
“철학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쉬운 이야기로 돌아가죠. 정말 방의 해결을 바란다면, 제일 쉬운 지름길 좀 알려주세요.”
‘이미 알려주지 않았느냐? 코어를 챙겨서 산맥으로 향하거라.’
“코어라면 당신이 미로에게 보여준 기계?”
‘코어는 곧 인류의 긍지 호의 메인 동력. 그것을 되찾는 것이 우주선의 사명이니라. 챙겨가면 산맥의 군단이 너희를 침범하지 않으리라.’
이 말대로라면 의외로 승엽이의 가설과 은솔 언니의 해석이 맞았다는 이야기다.
미로가 봤던 기계장치는 우주선의 동력원이고, 그걸 챙겨서 산맥으로 가면 AI가 우릴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더 쉬운 방법도 있지.’
“더 쉬운 방법? 그런 걸 제가 또 좋아하죠. 평생의 꿈이 인생을 날로 먹는 거라서요.”
‘…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시작하자마자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너희에게 있는 것 같구나.’
시간대여기로 소환한 아리를 죽이는 것!
아무래도 죄수는 우리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두 번 더 해라.’
“네?”
‘두 번 더 탈출해서 5회차가 되면, 내게 걸린 제약이 대부분 사라진다. 그리하면 내가 직접 너희를 인도하리라.’
“…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절 설득해보시겠어요?”
‘무리지.’
“예?”
‘나도 너흴 믿기 힘든데, 너희라고 어찌 날 믿겠는가. 그러니 최선을 다해보거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 말하자 또 할 말이 없었다.
‘이쯤 하자꾸나. 제법 즐거운 대화이긴 하나, 슬슬 내게 제약이 가해짐을 느낀다.’
“모, 목적!”
‘…’
“당신의 목적이 뭔지 말해보세요!”
‘나는 진정한 끝을 보고 싶다.’
“네?”
‘호텔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파국이 아닌 진정한 끝을 보고 싶구나.’
“그게 대체 무슨 -”
의식이 흐릿해진다. 이것이 우주선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