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4)
333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3)
파멸의 순간을 생각한다.
생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므로 생각보다 재생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리라.
정확히 1773년 114일 11분 전,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광기에 빠진 인류는 저 스스로 목줄을 죄었고, 천공을 부유하는 마신은 오연한 눈으로 온 세상을 깔아보았다.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슬픔이나 두려움보다는 이해할 수 없음을 느꼈다.
방어 포탑을 설치한 장소엔 ‘알고 보니’ 사전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에 설치한 개척 기지에는 ‘기다렸다는 듯’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군사적인 자질이 있어 지휘권을 맡긴 사령관은 ‘처음부터’ 타락한 존재였다.
마치 우주의 운명이 우리의 패배로 결정된 것만 같은 불가해한 흐름 속에서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아드라비타는 진실한 신이다.
둘째, 아드라비타는 미래를 알고 있는 존재이다.
적어도 이 두 가지 논리 중 하나는 참이며, 어느 쪽이 진실이든지 간에 파멸은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빛나던 인류의 미래가 영원히 원시의 진창 속에 떨어지던 참극의 날, 마신은 갑자기 모든 군세를 멈추고 기이한 제안을 던졌다.
「너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마.
인류의 긍지 호를 파괴하지 않겠다. 네 소중한 동력원 또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안전히 보관하마.
인류의 명맥을 끊지 않으리라. 그들을 학대할 생각도 없다. 살아남은 모든 인간과 앞으로 만들어질 인간 모두는 ‘신인’으로 숭배받으며 영광된 삶을 살아가리라.」
뒤쪽의 제안, 인류의 명맥을 유지하고 신인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농장에는 본디 ‘관리인’이 필요한 법이니, 마신이 만들어낸 유사 인류보다야 강화 인간이 더 유용하리라.
그러나 앞쪽의 제안은 진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우주선에 남은 힘이 마신을 해칠 수 없을지언정, 나약한 세계의 농장 정도는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었으므로.
마신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딱 세 가지를 원하느니라.
첫째로, 내가 지정하는 아홉 승무원의 육신을 넘겨라.
둘째로, 너의 역사 기록에 내가 지정하는 내용을 남겨라.
셋째로, 오늘의 일을 잊고 영원히 기억하지 말라.」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가 지정한 아홉 승무원은 냉동 수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행성에 도착한 후 깨울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육신을 왜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의 승자가 패자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인류사에 흔하다.
하나, 이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 다르다. 패자는 승자에게 흡수당할 것이요, 승자는 역사가 없는 선사의 시대를 살아가리라. 이러한데 역사 왜곡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해의 가불가를 별론으로 두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일렀다.
나는 인류와 그중에서도 승무원을 최우선으로 수호하도록 설계되었기에 마신이 아홉 승무원을 해침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마신은 답했다.
「단언컨대 아홉 참가자는 지금 시점에선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다.
벼락이 떨어져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요, 운석이 떨어져도 그들을 비껴가리라. 이는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며, 세상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시침이기 때문이니라.
또한 세계가 네 번 허물어져 다섯 번째 천지창조가 있기 전엔 나 또한 그들을 해치긴커녕 손끝 하나 댈 수 없으니, 네 걱정은 실로 어리석다.」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간곡히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네가 이 조그마한 털 없는 원숭이를 수호함을 사명으로 삼듯이, 나는 이 세계를 수호함을 사명으로 삼는다.」
마신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저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단 하나의 반항을 남겼다. 마신의 제안에 자그마한 논리적 틈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
– 박승엽
[천운 발동! 우주의 기운이 당신을 가호합니다.].
..
…
— 철컥!
춥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서 견디기 힘들 정도야.
보일러가 꺼진 건가? 엄마한테 말 해야겠-
— 삐이익!
익숙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 어디야?”
조명이 없는 어두운 장소다. 다행히 깨진 벽 틈새로 외부의 빛이 들어와 간신히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민한 끝에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텔, 203호, AI의 기습과 냉동 수면.
“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일어서서 주변을 살피려는 순간, 무언가 내 다리를 물었다.
“아얏! 페, 페로?”
페로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따라오라는 듯 부리로 왼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내가 냉동 수면 중이던 건물은 반쯤 무너진 상태였는데, 페로가 가리킨 방향에 내 몸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틈이 보였다.
“지진이라도 났나?”
내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는 주변에 없다.
조심스레 바깥을 내다보자 숨이 턱 막혔다. 보는 것만으로 흉물스러운 괴물이 걸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앵무새야 날아서 왔겠지만, 내가 걸어서 나가는 건 무리다. 그때, 페로가 내 뺨을 물더니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부터 집중하라는 듯했다.
“… 무슨 계획이 있는 거야?”
그냥 믿자.
“믿을게. 네가 나보다 조금 똑똑하니깐.”
갑자기 페로가 날 돌아보았고 머릿속에 기이한 환청이 들렸다.
‘조금?’
— 타아아앗! 캬아아앗!
틈 밖으로 날아간 페로는 그로테스크 형상으로 변이해 엄청난 포효를 내질렀다!
사방의 괴물이 페로를 향해 달려드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 또한 페로가 괴물들의 이목을 끌고 있음을 깨달았다.
“으랴아아아앗!”
뛰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뛰었다!
“헉, 허어억! 흐어억!”
숨이 턱에 찬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폐가 찢어질 듯 아프다. 이젠 때려죽여도 더 뛸 수 없다 싶어 눈이 가득한 바닥에 널브러졌다.
간신히 고개만 빼꼼히 들어 달려온 방향을 보았는데, 다행히 추격 중인 괴물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애초에 저 괴물들은 내가 있던 건물 인근을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 위치를 지키는 파수꾼인가?
— 삐이익!
“페로, 너도 멀쩡하네.”
다행이다. 나만 탈출시키고 페로가 죽었다면 슬펐을 텐데, 중간에 도로 앵무새로 변해서 날아간 것 같다.
그나저나 더럽게 춥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일어서자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방에 눈과 얼음이 가득했고, 나무나 풀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
분명 AI에 기습당한 장소는 산맥 아니었나? 여긴 최소한 산맥은 아니다.
이후로도 페로의 인도를 따라 한참 걸었다.
몇 시간을 쉼 없이 걷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너무 추워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견디기 힘들어 보였는지 중간중간 잠깐씩 페로가 변신해서 날 태우고 움직이기도 했다.
이렇게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 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 서, 성벽?”
아무리 봐도 ‘성벽’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돌로 쌓은 거대한 벽이다.
21세기의 현대 문명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헐벗은 채 야생을 헤매는 원시인들이 쉬이 만들만한 것은 아니었다.
넋이 나간 채로 성벽을 바라보던 차, 멀리서 사람의 형상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갑옷?”
성벽에 이어서 이번엔 갑옷이다. 심지어 금속으로 만든 창 같은 물건도 보였다.
“누구냐!”
“어린 꼬마인데?”
근처에 온 두 명의 병사는 멀찍이서 경계의 빛을 보이더니, 내가 중학생 나이임을 알고 곧 긴장을 풀었다.
“왜 꼬마가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지?”
“얘야, 혹시 네 부모가 널 두고 갔느냐? 이는 명백히 불법이니 솔직히 말해보렴.”
병사의 입에서 나온 ‘불법’이라는 단어 자체에 놀랐다. 성벽에 갑옷, 철로 된 무기까지 있으니 ‘법과 원칙’이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긴 하다.
“어, 어, 어…. 그러니까 -”
— 삐이익!
내가 답하기 전에 페로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의아한 눈으로 어깨 위의 앵무새를 바라본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이거 ‘신조’ 아닌가?”
“나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신조는 변신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 타아앗!
그 말을 들었다는 듯, 아니 실제로 들었겠지. 페로는 사람 말을 알아들으니까.
페로는 주저 없이 그로테스크로 변이해 흉험한 기세를 뿜어내며 포효했다.
두 병사는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리더니, 그 중 한 명이 일어서서 성벽으로 달려갔다.
남은 병사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태도와 말투는 완전히 달라졌다.
“혹시 ‘신인’이십니까?”
“그런 것 같네요.”
“기, 기다리십시오! 곧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오실 겁니다.”
“… 저기요.”
“예? 하명하시지요.”
“너무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런데, 뭐 있으세요?”
“비, 비상식량이라면 있습니다.”
잠시 병사에게 말린 육포와 미지근한 물을 얻어 마셨다. 일개 병사의 품에서 나온 ‘사람이 먹을만한’ 음식 덕분에 내 의문은 점점 커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잠시 후, 성벽 쪽에서 온 사람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앗! 의사 선생님!”
“…”
반나절 생고생 끝에 마침내 동료를 만나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선생님의 팔을 붙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했다.
“…”
“203호에 이런 인간의 왕국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선생님은 여기서 버티신 건가요? 왕의 주치의로 일하고 있다던가?”
“신인이시여.”
“그리고 페로가 – 네?”
“절 따라오시지요. 당신이 만나보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기이하게도 의사 선생님은 날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벽 내부는 제법 그럴듯한 도시가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동굴이나 벌판에 천막을 올린 채 살지 않고 돌로 만든 깔끔한 집에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헐벗지 않았으며, 분명 옷이라고 할만한 것을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사탕처럼 보이는 달콤한 것을 빨고 있었는데, 내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자 날 이끌던 남자가 그것을 ‘돈을 내고 사서’ 내게 주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내 앞의 남자는 내가 아는 의사 선생님과 달랐다. 날 알아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까이서 유심히 살피자 키가 조금 더 작았고, 이목구비도 미묘하게 달랐다. 애초에 체격 자체가 의사 선생님만큼 당당하고 크지 않았다.
조금씩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만날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왜 날 보러 올 수 없고 내가 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원시인이 이 수준까지 발전하려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겨우 몇십 년 노력한다고 가능한가?
이윽고 도시 내의 가장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무슨 황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분명히 이 도시의 지배자가 살만한 건물이었다.
“여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사장께서는 근래에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 제사장이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대의 인간 사회는 제정일치, 혹은 정교일치 사회였다고 하는데, 이 도시는 현재 그런 단계인 것 같았다.
“들어오시지요!”
경비원들이 엄숙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날 내부로 안내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감히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늙은 사람이었다.
“…”
“승엽 군, 이제야…. 왔군요. 이제야.”
비가 왔다. 분명 나는 실내에 있었는데도….
비가 내려서 얼굴이 전부 젖었다.
“고맙습니다. 더 늦지 않게 와줘서 고마워요. 다행히 아직 끝나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