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5)
334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4)
– 박승엽
쇠약해진 의사 선생님은 침대에서 쉬이 일어나지 못했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다행히 발음은 여전히 또박또박했기에 대화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또한, 본래도 현명하고 생각이 깊던 사람에게 세월의 흐름이 더해지자 더욱 지혜로워졌음을 느꼈다.
“여러분의 실패를 깨닫고 내 원래 부족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데, 이미 날 대체할 신인인 바르나가 도착해있더군요.”
…
“다행히 바르나의 성품이 선량하고 절 잘 따랐기에 원만하게 지냈습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행운이었지요. 두 명의 신인이 부족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셈이니. 바르나가 어떻게 되었냐고요? 안타깝게도 120년쯤 전에 죽었습니다.”
…
“벽돌을 만드는 게 그리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물론, 이후에 금속을 다루는 데 들인 공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습니다만. 승엽 군은 일상에서 본 물건들이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지 몰랐을 겁니다.”
…
“푸른 바람과 어떤 일이 있었냐라…. 이 부분은 말을 아끼겠습니다. 사적인 부분이니까요. 다만, 그녀에게 ‘원시인’이라는 표현은 거둬주시길 부탁합니다. 더없이 지혜롭고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의사 선생님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럴 때는 이 방의 ‘끝없이 많은 시간’이 고맙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만에 승부를 봐야 하는 다른 대부분의 방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을 테니까.
3시간 정도 흘렀을 때, 이야기는 마침내 우리에 관한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
“아드라비타는 여러분이 잠든 냉동 수면 설비를 대륙 전체에 흩어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중 저만 따로 남은 것과 완벽히 같은 이유입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마신의 목적, 이젠 이해하셨지요? 그는 영원한 방의 존속을 바랍니다. 호텔 파티의 탈출이나 해결은 물론이고 죽음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한 장소에 있었다면….”
“지진 등 자연재해로 인해 설비가 무너지며 여러분 중 다수가 탈출하거나, 혹은 몰살당할 수 있습니다. 아드라비타에겐 후자가 더 두렵겠군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냉동 수면 중인 우리가 한꺼번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대륙 전체에 흩어두었단다.
기가 막히면서도 이해가 갔다.
수백 년을 넘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이 세계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존재라면 당연히 자연재해 또한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인간도 국가 단위에선 자연재해를 사전에 대비하지 않던가.
“여러분이 대륙 전체에 흩어진 후,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페로가 저와 부족을 이 인근으로 이끌더군요. 그래서 이 장소에 도시를 세웠습니다.”
언젠가 깨어날 날 기다리며 도시를 세웠다. 엄청난 이야기다 싶으면서도 갸우뚱했다.
“페로가 선생님을 이 장소로 이끌었어요?”
“호텔에서 태어난 아이, 그 신비로운 새는 과거에도 몇 차례 갑자기 승엽 군의 위치로 날아가거나 송이 양과 함께 시작하곤 했죠.”
“그렇죠.”
“아마도 우리 개개인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듯합니다.”
페로가 우리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말은 놀랍지 않았다. 과거에도 갑자기 먼 위치를 날아서 내게 온 적이 있고, 매번 귀신같이 송이 누나를 찾아가곤 했기 때문이다.
“페로는 선생님을 왜 하필 제게 인도했을까요? 제 말은, 저보다 뛰어난 동료가 여럿이잖아요. 가인 형이나 아리 누나도 있는데….”
“푸훗! 쿨럭!”
갑작스러운 기침은 선생님의 약해진 몸이 토해낸 쇠약함의 증거 같기도 했고, 단순히 웃음이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승엽 군. 이 문제는 누가 뛰어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페로에겐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선택지가 없어요?”
“뭔가 오해했군요. 페로가 승엽 군을 깨운 게 아닙니다. 위대한 우주의 기운이 승엽 군을 깨우자 페로가 적절한 시기에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제야 깨달았다.
냉동 수면으로 인해 몸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얼어붙은 우리를 ‘저절로 작동해서’ 깨울 수 있는 힘은 하나뿐이다.
“천운!”
“틀림없습니다. 며칠 전 갑자기 인근에 지진이 일어나며 시설을 지키던 보안 유닛이 지반 틈새에 빠졌거든요. 괴물들의 수도 원래는 훨씬 많았습니다.”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신기하네요. 천운이 강력한 힘이긴 하지만….”
날 깨우기 위해 지진을 일으켰다고? 이런 게 가능하다고? 진짜?
이 의문만큼은 선생님도 뾰족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 대신, 선생님이 오랜 세월 구상해온 계획에 대해 말했다.
“승엽 군, 동료들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그들을 위기에 빠트린 존재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다행이네요.”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깨워야겠죠? 동료들을!”
“바로 그겁니다. 동료들이 대륙 전체에 흩어져있다고 했지요? 누구부터 깨워야 할까요?”
잠시 말문을 잃은 내게 선생님이 웃으며 답했다.
“아리 양부터 깨워야지요. 그녀에겐 지금도 ‘선장 권한’이 있습니다. 무척 쓸모 있을 겁니다.”
“누나는 어디 있어요?”
“여러분이 잠들었던 산맥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옮겼지만, 아리 양은 옮기지 않더군요. 어쩌면 선장이라 옮길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하!”
“조만간 산맥으로 출발합시다. 내 힘만으로는 아리 양을 구할 길이 없었으나…. 승엽 군의 ‘행운’이라면, 분명 모두에게 빛이 있을 – 쿨럭!”
쇠약한 몸으로 나와 장기간 대화했기 때문일까?
선생님의 입에서 갈색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피와 가래가 섞인 그 덩어리를 말없이 바라보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원망’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제야 깨어났습니까?”
“…”
“200년, 아니 100년! 아니, 50년 만이라도 일찍 깨어날 수는 없었습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나 또한 천운이 왜 하필 ‘이렇게 늦게’ 날 깨웠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내가 이렇게 늦게 깨어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천운은 그런 힘이니까.
잠시 침묵이 지나간 후,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 아니죠.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
“승엽 군,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다소 놀랄 테니 잘 들으세요. 내일 아침, 도시의 행사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주변 시비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게 치장했다.
알몸이 된 채로 몸 전체에 하얀 가루를 뿌리고 양 뺨과 이마엔 붉은 점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내 앞에 놓인 것은 흡사 천사의 날개옷을 흉내 낸 듯한 새하얀 날개옷이었다.
처음엔, 아무리 선생님의 부탁이라지만 이 바쁜 시기에 이런 뻘짓을 대체 왜 하나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출발해서 아리 누나를 구해야 하는데!
분장을 끝내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온 선생님과 함께 거리로 나왔을 때,그제야 도시의 모든 사람이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모여들었음을 알았다.
남녀는 물론이고 노인이나 어린아이조차 예외가 없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질 때쯤,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었다.
변함없는 마음은 없다.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도 주군이 땅과 봉급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주군을 갈아탈 것이요,부자간에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사랑이 사라지고 만다.
신앙심 역시 마찬가지이니, 보답 없는 믿음은 결국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랬기에 우리의 의사 선생님이자 빛의 도시의 제사장은 모두에게 날 보여야 했다.
대대로 이어온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었으며, 마침내 선조의 후예가 끝없는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려야 했으니까.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그 윗대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의 화신이자 위대한 선조의 힘을 이어받은 반신이다.
또한 불합리한 현세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인도할 존재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무함마드이며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이 깨달음은 내게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거짓말이니까.
뭐? 선조의 힘을 이어받은 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사후의 평온을 보장해줄 존재?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주냐고!
선생님은 대체 왜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
진정하자.
여기서 내가 선생님을 원망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긴 세월동안 이 사람들을 이끌며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문득,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음을 알았다.
도시의 사람들, 선생님이 일구어낸 신민들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선생님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내 손을 잡고 돌아가려 했다.
부드럽게 선생님의 손을 밀어내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답해주고 싶었다.
비록 반신도 뭣도 아닌 가짜였지만, 이 사람들에게 낙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들이 평생을 바쳐 믿어온 신앙이 거짓이 아니었노라 보여주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속였으니, 아예 마지막 순간까지 속이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이런 기분이라면. 무언가 일어날 것 같았다.
하늘에서 세 마리의 새하얀 비둘기가 나풀거리며 내려와 내 머리에, 어깨에, 손 위에 앉았다.
웅성거리던 광장에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고, 모두가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조심히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놀라움을 감추기엔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광장에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놀라서 소리쳤다.
“새! 비둘기! 신인님이 불러낸 건가요?”
기다렸다는 듯, 비둘기들이 내 몸을 떠나더니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스치며 하늘로 날아갔다. 나는 그 어떤 거짓도 없는 진실한 답을 전해주었다.
“모르겠네.”
광장의 사람들이 흩어질 때쯤, 선생님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모르겠네요. 그냥 우연 아닐까요? 제게 뿌린 하얀 가루가 곡식 가루라던데 그 냄새를 맡았을지도?”
“크하하하하!”
갑자기 선생님이 미친 사람처럼 웃자 주변 호위들이 당황한 눈으로 선생님을 살폈다.
“그것참, 믿음직한 대답이군요.”
그날 저녁에 선생님은 도시의 신민들에게 마침내 계시의 때가 왔음을 일렀다.
다음날, 우리는 도시의 정예병을 이끌고 산맥으로 출발했다.
*
산맥에 도착하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우리가 기억하는 시기로부터 수백 년은 흘렀을 텐데, 세월의 흐름이 대자연을 비껴간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산맥에는 보안 유닛이 적지 않습니다.”
“…”
“승엽 군이 해내길 바랍니다. 저는…. 죄송합니다. 몸이라도 젊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니죠. 선생님이 이만큼 하셨는데, 제가 마침표 정도는 찍을 수 있어야죠.”
“그래도 방호복은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정말이지, 이걸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선생님이 손짓하자 뒤편의 남자들이 ‘선조의 갑옷’이라 칭하는 방호복을 내 앞에 옮겼다.
— 우우웅!
방호복을 입고 산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위압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긴장한 날 위로하듯이 또 한 명의 동료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페로! 왔구나?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 삐이익!
페로는 날 도시로 안내한 직후 사라졌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페로는 한 장소에 붙어있는 시간이 드물어서 선생님도 페로를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원래도 비밀이 많던 새가 점점 더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어찌 됐든, 지금은 다시 내 옆에 와서 마음이 놓이네.
심호흡하며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클릭했다.
[천운 발동! 우주의 기운이 당신을 가호합니다.]“아리 누나! 제가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