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6)
335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5)
– 박승엽
어둡고 답답하다.
공간 자체가 좁은 것은 아니지만 온 사방에 이동을 방해하는 복잡한 기계가 많았고, 나는 방호복을 입고 있어서 훨씬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 덜컹!
“앗!”
“조심해. 그냥 가만히 있어.”
“네에에….”
무려 수백 년 만에 재회한 아리 누나는 예전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애초에 누나는 잠만 자고 있었으니까 크게 바뀌었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마침내 누나가 조작하던 기계에서 기묘한 금속음이 들려오더니 벽면에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빔 프로젝터 같은 기계였나보다.
영상의 시작은 이러했다.
「파멸의 순간을 생각한다.
생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므로 생각보다 재생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리라.
…
…
…」
영상이 끝난 후, 누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누나.”
“…”
“아리 누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요 -”
“미안한데 나부터 물어볼게. 머릿속 생각을 정리해야 해서 그래.”
“네.”
“대충 듣기로는 냉동 수면에서 깨어났더니 322년이 지나갔다?”
“322년이라는 숫자는 지금 처음 들어요. 그렇게 많이 흘렀어요?”
“AI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맞아. 깨어난 후에 상현이 세운 도시 국가에 합류했고 도움을 받아서 산맥에 다시 왔어. 거기부터 다시 말해봐.”
“산맥에 들어오자마자 로봇들이 나타났죠! 제 머리보다도 큰 포탄을 제게 겨누는 순간, 위기를 직감한 제 본능이 -”
“천운 썼지?”
“… 네.”
“그 부분은 대충 넘겨. 어차피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겠지.”
“포탄이 제 뒤로 떨어졌는데 그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갔어요. 이 비슷한 일을 세 번 정도 반복하니 우주선에 도착했어요.”
“내 생각보다도 더 기가 막히네. 여하튼, 우주선에 도착했을 때 천운이 끝났다고? 거기서부터 말해봐.”
“내부로 들어오니까 로봇들이 더 이상 포탄은 쏘지 않았어요.”
“그런 걸 쏘다가 우주선이 망가지면 내가 죽거나 깨어나기 때문이었겠지.”
“어느 시점부터 페로가 갑자기 절 이끌었어요. 아마 누나의 위치를 느낀 것 같아요. 그러다가 지하로 통하는 틈을 발견했죠.”
“더 말해봐.”
“움직이다 보니 페로가 갑자기 거대한 벽 뒤에서 멈췄어요. 그때! 제 본능이 이 뒤에 누나가 있음을 알렸죠.”
“그 벽을 어떻게 넘었어?”
“방호복의 힘으로 펀치를 날려봤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죠.”
“이상한 소리?”
“금속이 흔들거리며 마찰하는 소리? 끼이익 하는 소리? 가까이 가니까 저 흔적이 있었어요.”
손을 쭉 뻗어서 내가 들어온 벽면의 구멍을 가리켰다. 누나는 그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다음에는 뭐, 들어오니까 누나가 잠든 캡슐 같은 게 있었죠.”
“수고했어. 그리고 잘했어.”
갑자기 누나가 내 머리를 가볍게 껴안아 줬다.
“으아앗!”
“초등학생도 아니고 겨우 허깅 좀 했다고 놀라?”
“아니! 방호복을 입고 있을 때 껴안으시다니! 잠깐만요, 벗을 테니까 다시 한번 -”
“헛소리하지 말고 다시 앉아.”
“… 네.”
누나는 이후로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주변을 서성였다. 바깥에서 기다릴 선생님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누나! 이제 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바깥에서 선생님이 기다리실 텐데!”
“300년을 넘게 기다렸다면서 한두 시간 더 기다리는 게 대수야?”
“…”
바, 방금은 너무했다!
종종 아리 누나에게 몸통 박치기가 하고 싶다는 가인 형의 마음을 순간 이해할 뻔했어.
“무엇보다 이 장소에 AI가 남긴 기록이 많아. 다시 들어오기 힘든 장소니까 다 체크해야지.”
“…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세요.”
갑자기 누나가 날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나?”
“얘는 아닐 것 같은데.”
“네?”
“아니야. 그보다 내게 물어볼 게 있다면서?”
“아, 아까 AI가 남긴 영상을 보다가 뒷부분이 이해가 안 가서요. AI가 마신의 제안에서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고 반항을 남겼다는데, 뭘 말하는 건가요?”
“이 기록 자체.”
“네?”
“이 방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드라비타의 설계 하에 만들어졌다는 기록 자체가 곧 반항이지.”
“무, 무슨 말이에요?”
“죄수는 AI에게 ‘오늘의 일을 잊고 영원히 기억하지 말라.’라고 명했어. AI는 그날의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서 분리한 후, AI 본인이 접근할 수 없게 처리했지.”
이제야 이해했다. AI 본인이 해당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으니, 지시대로 그날의 일을 잊고 영원히 기억할 수 없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 데이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데이터가 사라진 건 아니야. AI가 접근할 수 없을 뿐, AI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접근할 수 있지. 나처럼.”
그 말을 끝으로 누나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의 침묵은 아주 길었다.
“저기….”
“승엽아.”
“예?”
“우리 이쯤 하고 탈출할까?”
“예에? 갑자기 무슨!”
당장 탈출할 수 있는 거야?
“203호의 탈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해? 첫 번째 탈출과 두 번째 탈출을 되새겨봐.”
“첫 탈출은 산맥 반대 방향으로 멀리 움직였던 은솔 누나랑 송이 누나가 본인들도 모르는 이유로 갑자기 -”
“타이밍이 산맥에 갔던 사람들이 내 몸을 빌린 AI와 격렬하게 싸운 시점하고 비슷하잖아?”
“그렇긴 한데….”
“두 번째 탈출은 미로가 시간대여기로 불러낸 날 죽이자마자 이루어졌지. 심지어 전원 탈출이었어. 공통점이 뭐야? 두 번 다 AI에 치명타를 줬잖아?”
“그렇죠?”
“이 방에서 우릴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 지옥 같은 판을 설계한 죄수? 아니야. 죄수는 우리가 깨어난 이후로는 다채로운 제약에 시달리는 존재야.”
“AI가 이 방의 직접적인 위협이다? 생각해보면 우릴 냉동 수면에 빠트린 것도 AI죠.”
“그래. AI에 큰 타격을 입히고 거리를 벌리거나, AI가 깃든 육체를 사전에 대비할 수 없게 갑자기 파괴하거나. 결국 AI에 치명타를 주는 게 탈출 조건이야. 그리고….”
누나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자그마한 알림이 떠 있었다.
「김아리 선장님, 인류의 긍지 호의 모든 기능을 정지하겠습니까?」
“여기서 엔터 한번 누르면 AI는 영원히 정지할 거야.”
그렇게 하면 203호를 탈출한다.
“탈출은 좀….”
“아쉬워? 상현이가 수백 년 동안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냥 탈출로 끝내기는 좀 그래?”
“제가 너무 철이 없나요….”
“아니야.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거든.”
“누나도요?”
아리 누나는 잠시 주변을 이리저리 거니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탈출한다. 해결을 위해 더 버텨본다. 무엇이 옳을까? 당장 탈출해야 한다는 근거가 있긴 해. 우린 이미 큰 위기니까.”
“큰 위기요?”
“AI의 중앙 관제 시스템을 살피다가 알아낸 건데, 한가인, 차진철, 엘레나 이렇게 셋은 이미 죽었어. 아드라비타의 권속이 쳐들어와서 냉동 수면 설비를 파괴했다고 하네.”
“으악!”
“조용히 해.”
“아, 아니 왜 죽어요? 심지어 죄수가 죽였어요? 우리가 죽어도 이 방이 사라지는 것 아니에요?”
“전원이 다 죽으면 그렇지.”
“네?”
“아드라비타의 관점에서 생각해봐. 우리가 전부 죽는 일은 네 말대로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한데, 굳이 전부 살려둘 필요 있을까?”
“어….”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어. 수백 년이고 수천 년이고 버티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겠어? 당장 너만 해도 지진의 힘으로 탈출했잖아.”
“그건 천운 -”
“천운이 지진을 일으켰다고? 이상하지 않아? 그동안 네가 천운을 여러 번 썼지만, 그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잖아?”
“그렇긴 해요. 그래서 저도 신기했는데.”
“단순하게 생각해. 지진은 축복과 무관하게 일어난 것 아닐까? 어떻게 지진이 우연히 일어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특정 지역에 수백 년이나 있다 보면 당연히 일어날 수 있어.”
“그건 그렇죠. 지진 안전지대는 없다고 하니까.”
여기까지 듣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천운의 힘으로도 지진이 일어나는 시기를 앞당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운은 지진을 일으킨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진에서 내가 안전하게 깨어날 수 있게 만든 것 아닐까?
“이처럼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그 자체가 변수야. 네가 그 증거지.”
“그렇네요.”
“다시 죄수의 관점으로 돌아가자. 아드라비타에게 우리는 전부 죽일 수는 없으나 전원 살려두면 반드시 변수가 생기는 존재야.”
“그래서 ‘위험한 참가자’는 죽였네요. 아리 누나는 선장이니까 유사시 우주선 통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렸고?”
가인 형, 진철 형, 엘레나 누나.
죄수는 이렇게 세 사람은 살려두기에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여기고 권속을 보내 냉동 수면 상태에서 죽였다.
“… 전 죄수가 보기엔 약해서 살았네요. 나름대로 태초의 인간도 썼는데!”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그걸 느낀 누나가 픽 웃었다.
“살아있어서 슬퍼?”
물론 그건 아니다.
“여하튼, 생존자는 너랑 나, 바깥의 상현이, 잠들어있는 묵성이랑 은솔이. 이렇게 다섯이야. 전력이 절반 이하니까 이후의 진행 자체가 무척 위험하지.”
“그러면 탈출하는 게 좋을까요?”
“더 해보는 게 좋다는 근거도 있어.”
“뭔데요?”
“첫째, 보통 탈출하고 나면 정보를 수집하고 작전을 다시 짜서 돌아오지?”
“그렇죠.”
“이 방은 아닐 거야. 확실해. 내가 볼 때 이대로 탈출하면 우린 다신 203호로 돌아오지 않아.”
“어째서요?”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탈출하는 게 죄수의 함정임이 밝혀졌어. 진짜 해결법은? 지금 상현이가 하는 것처럼 원시인들을 데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다음번엔 그 힘든 일을 누가 또 할래?”
“…”
진짜 해결법이 의사 선생님처럼 원시인들을 데리고 문명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이 힘든 일을 대체 누가 하려고 할까?
내가 생각해도 이런 미친 방에는 다신 돌아오지 않는 게 답이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어. 우리가 발전하는 만큼, 죄수도 발전한다는 거지. 203호의 죄수는 104호의 ‘주’처럼 미친놈이니까.”
그렇다.
아드라비타는 ‘주’와 유사하게 적극적으로 방을 설계하는 존재다. 이대로 탈출했다가 다시 들어오면 방의 내용이 기묘하게 뒤틀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번 탈출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따위가 아니야. 그냥 영원히 203호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포기하는 셈이지.”
“그렇네요.”
“둘째, 난 의외로 이 방의 해결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해.”
“의사 선생님이 이미 문명을 일으켰으니까?”
“그거야. 제일 힘든 구간은 상현이가 미친 듯이 고생해서 이미 넘겼어. 이젠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고 생각해.”
“마무리 작업?”
“인류의 새로운 시작, 그 방해물을 우리가 밀어주는 거야. 요 부분은 나중에 상현이 만나서 자세히 말해줄게.”
“네.”
누나는 다시 침묵에 빠졌고, 나는 누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봤다.
현재, 아리 누나는 우주선의 모든 기능을 선장 권한으로 정지시켜 AI를 소멸시킴으로써 호텔 파티를 전원 탈출시킬 수 있다.
탈출이 아닌 해결을 목표로 밖으로 나가서 더 진행한다면, 이 편리한 탈출은 포기하는 셈이다. 외부에서 AI를 소멸시키긴 어려울 테니까.
탈출해야 하는 근거는?
가인 형, 진철 형, 엘레나 누나가 냉동 수면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파티에 남은 전력이 약하다.
더 시도해볼 만한 근거는?
이대로 탈출한다면 203호의 유산은 포기하는 셈이며, 누나의 견해에 따르면 우린 이미 방의 해결에 거의 다가간 상태다.
가장 어려운 과정을 의사 선생님이 이미 처리했으니까.
침묵하던 아리 누나가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섰다.
“결정해.”
“예?”
“무지성!”
“예?”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골라! 우주의 기운을 믿고 픽!”
“에잇! 더 해봐요!”
생각하지 않았다.
나보다 10배는 똑똑한 누나도 결론 내리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내 머리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겠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골랐다. 인간적으로 의사 선생님이 300년을 고생하셨는데!
이 엄청난 공든 탑을 ‘겨우 탈출’로 끝낸다고?
그건 아니지.
아리 누나가 슬며시 웃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 더 하자. 이 빌어먹을 방을 끝장내고, 망상병에 걸린 고래도 회 쳐서 먹든지 하자.”
누나의 손이 하늘로 향했다.
“사실 더 해봐야 할 세 번째 이유도 있었어.”
“네?”
“이 방의 유산 두 개 중 하나가 뭔지 알 것 같아.”
“유산이요?”
그 순간, 누나의 목소리가 흡사 노래처럼 운율을 담은 채 퍼져나갔다.
“최후의 섬광이 모든 것을 정화하리라.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리고 빛이 일어났다.
누나의 손끝에서 일어난 섬광이 천공을 꿰뚫었다.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온 우주선의 외벽도, 억겁의 세월을 물 흐르듯 인내해온 진홍 산맥의 암석도….
그 어떤 것도 섬광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지형지물이 꿰뚫리며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이윽고 섬광은 하늘의 구름마저 증발시켰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순수한 힘이, 파괴가, 위력이 주는 충격이 일종의 감동처럼 몰려왔다. 눈물 흘릴 것 같은 기분으로 누나를 바라보 –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고래를 용서하지 않겠다!”
“… 그건 무슨 대사에요?”
“아? 이거 모르니? 예전에 유행했던 만화인데 -”
“몸통 박치기!”
“으아앗!”
오늘, 나는 가인 형이 때때로 아리 누나에게 몸통 박치기하는 이유를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