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7)
336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6)
– 박승엽
산맥을 내려온 나와 아리 누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의사 선생님이나 페로가 ‘얘 신인임’하고 말해주지 않으면 동네 꼬마와 구분하기 힘든 나와 아리 누나는 달랐다.
누가 봐도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과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삽시간에 산맥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군인들을 매료시켰다.
곧 누나가 지나갈 때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말았다.
저녁 무렵, 무려 300년 만의 호텔 파티 회의가 시작했다.
*
누나는 방의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 바를 말했다.
“203호의 저주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오래전, 가인이는 이 질문의 답을 방의 제목에서 찾았지.”
“새로운 시작!”
“그래. 인류의 미래가 원시의 진창에 떨어진 상황 자체가 저주이며 이 상황에서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 해결이라는 게 가인이의 해석이었어.”
“그런데, 그것들은 죄수가 남긴 가짜 기록을 보고 내린 결론 아닌가요?”
“승엽이 네 지적도 맞아. 그런데 이런 말 들어봤니? 숙련된 사기꾼은 100% 거짓말을 하지 않아.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을 섞지.”
“들어봤어요.”
“남긴 기록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을 거야. 또, 가인이에겐 ‘시나리오 이해’라는 힘도 있어. 죄수가 아예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남겼다면 ‘시나리오 이해’에 나오는 내용과 모순이 생겨서 가인이도 위화감을 느꼈겠지.”
“그 말은….”
“나는 앞서 말한 가인이의 해석 자체는 사실이라고 봐. 인류의 미래가 망쳐진 게 저주고, 이 상황을 끝내는 게 해결이야. 다만 그 방법론이 ‘우주선 타고 탈출’인 게 틀렸던 셈이지.”
거기까지 말한 후, 누나가 선생님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 인류의 새로운 중시조께서 이 문제를 8할은 해결했지. 감사합니다.”
누나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칭찬하는 것은 처음 본다. 그걸 느낀 의사 선생님이 슬며시 웃음 지었다.
“허허 참, 이렇게 띄워주는 것은 아리 양 답지 않군요.”
“비록 난 ‘빛의 도시’를 보진 못했지만, 바깥의 군인들이 입은 갑옷과 무기만 봐도 알 수 있었어. 이 정도면 분명 문명이라 할만해. 설마하니 호텔에서도 무슨 산업혁명까지 기대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아직 큰 위험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일으킨 빛의 도시에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심각한 위협이 있었다.
“다들 미로 양의 시작 지점, 부화장을 기억하시지요?”
“네.”
“300년 전의 우리는 그 장소가 단지 신인을 만들어내는 장소라 여겼습니다만,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서 더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부화장에서 태어난 신인들은 말벌 형태의 괴물에 의해 대륙 전체로 옮겨진다. 실로 감탄이 나오는 대륙 단위의 운송 시스템이었다.
그 운송 시스템으로 신인‘만’ 옮길 필요가 있을까?
“부화장은 신인이 태어나는 장소인 동시에 대륙에 가득한 괴물의 근원지입니다.”
가인 형은 빙의의 힘으로 괴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바로 멀쩡한 짐승의 몸에 정체불명의 촉수가 기생하며 괴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그 촉수를 대체 어떻게 세상 전체에 퍼트렸을까?
“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확인했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에서 내려온 말벌이 꿈틀거리는 살덩이를 세상에 뿌리더군요. 그 살덩이는 스스로 흙바닥을 기어가며 주변 짐승의 몸에 파고들었습니다.”
203호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원시의 세계에서 문명을 일으키고, 문명의 위협인 괴물을 만들어내는 부화장을 파괴해야 한다.
전자는 이미 끝냈으니 후자만 하면 된다.
그때, 아리 누나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도 깨우자.”
“은솔 양과 묵성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물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거리가 무척 멉니다.”
선생님이 펼친 ‘대륙 지도’ – 이걸 보는 순간 나와 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에는 누나와 할아버지가 냉동 수면 중인 위치가 나와 있었다.
최소 수백 km는 이동해야 한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이 방은 21세기가 아닙니다. 수백 km 행군을 위한 식량을 미국이나 중국에서 수입해 올 수 없다는 말이죠.”
나도 이 말은 이해했다. 군대를 이끌고 저 거리를 가려면 다시 도시에 가서 1, 2년 버티면서 식량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군대 끌고 갈 필요 없어. 나 혼자 다녀올게.”
누나는 그 말과 함께 간단히 손가락을 들었다. 시퍼런 섬광이 살짝 손끝에서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때를 기다릴 -”
“아니, 기다리지 말고 너희도 부화장으로 출발해. 시간이 촉박한 방은 아니라지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겠어. 어차피 너희 위치는 페로가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
선생님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려던 누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누나가 하려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회의 중 선생님이 세 번이나 피가 섞인 가래를 뱉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님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회의가 끝날 때쯤, 누나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승엽이가 날 깨우러 올 때 방호복을 입고 왔던데, 방호복은 어디서 찾았어?”
“지난 세월, 아리 양을 깨우러 산맥에 세 번이나 접근했습니다. 결국 그놈의 로봇을 뚫을 수 없어 번번이 돌아왔습니다만…. 성과가 없진 않았지요.”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혹시, ‘역사책’ 같은 것 있어?”
“있기야 합니다만.”
“하나 얻을 수 있을까?”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런 게 궁금하십니까?”
누나는,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감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이 방을 나가면 네가 세운 도시도 방과 함께 허물어지겠지.”
“…”
“그 전에 내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이 위대한 위업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선생님은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잠시 온몸을 떨었다. 노쇠한 눈에서 희끄무레한 물방울이 흘러나왔다.
“… 정말이지, 오늘따라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많이 하시는군요.”
나도 옆에서 같이 울 뻔했다. 아리 누나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산맥에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더니, 내려와서 노인이 된 선생님의 모습과 새로이 일어난 문명의 흔적을 보자 누나의 차가운 마음도 흔들린 걸까?
곧 누나는 시간 끌 것 없이 즉시 출발하겠다고 알렸다.
“참, 승엽이 너도 와봐.”
“네.”
*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걷는 아리 누나는 정말이지 신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신비로움을 한층 더하기 위함일까?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페로가 누나의 어깨 위에 앉았다.
“페로! 또 어딜 다녀온 거야? 선생님도 페로를 보고 싶다고 했어.”
— 삐이익!
“평소에 페로가 도시에 있지 않았나 봐?”
“네. 페로가 항상 어딘가 떠나서 잘 돌아오지 않았대요. 아마 우리를 깨울 방법을 찾아다닌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네가 냉동 수면 시설에서 깨어나자마자 페로가 옆에 있던 건 우연이 아닐 거야.”
페로도 선생님처럼 수백 년간 우리를 기다려왔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갑자기 누나가 내게 말했다.
“모르겠네.”
“네?”
곧 누나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포의 저택’에서 처음 만났던 생글거리는 표정이 나타났고, 다음엔 평소에 자주 드러내는 무감정한 인형이 나타났다.
조금 전 회의장에서 드러냈던 감성적인 문학 소녀 같은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가인 형과 있을 때 자주 드러내는 장난기 많은 모습도 스쳤다.
그야말로 천변만화하는 표정을 보며 누나가 아주 복잡한 생각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대체 무슨 생각 하세요?”
“… 많은 생각. 예를 들어, 너만 두고 나 혼자 떠나도 될까?”
“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의사 선생님도 계시니까! 제 걱정하지 말고 은솔 누나와 묵성 할아버지를 -”
“두 사람 다 데려오진 않을 거야.”
“네?”
“그럴 시간이 없어. 상현이가 기침하는 것 봤지?”
“… 그럼 누구를 데려오실 생각이세요?”
“은솔이. 회의하면서 느꼈어. 이번 일, 은솔이의 피리가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와.”
회의하면서 느꼈다고? 그런 내용이 있었어?
“뭔가 또 저만 모르는 이야기가 지나간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지.”
“그냥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야.”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넌 알수록 약해져.”
“…”
복잡하게 변화하던 누나의 표정이 하나로 고정되었다.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은 ‘걱정’이었다.
누나는 날 걱정한다. 대체 왜일까?
— 툭!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스쳤다.
“잘 있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잘 다녀오세요.”
곧, 누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나와 선생님 그리고 빛의 도시의 군대가 부화장으로 진격을 시작한 후, 우리는 거의 매일 괴물을 만났다.
며칠 전 회의에서 나온 내용이 새삼 실감이 났다. 이 괴물의 근원을 불태우지 않고서는 이 땅에 인류의 새로운 미래가 싹틀 수 없다.
“수비 태세!”
— 철컹!
다리 여섯 달린 집채만 한 황소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기 시작했을 때, 아무리 봐도 선생님의 후손으로 보이는 ‘대장군’이 우렁차게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병사들은 괴물의 돌진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퀴가 달린 거대한 방패를 정면으로 움직였다.
곧,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방패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하지만 밀려났을 뿐, 방패 자체는 여전히 멀쩡했고 도리어 황소가 고통에 신음하며 뒤로 주저앉았다.
즉시 병사들이 날카로운 투창을 던져대기 시작했고,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황소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우와…!”
“승엽 군, 어떻습니까?”
나는 언덕에서 선생님과 함께 수레에 탄 채로 저 웅장한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선생님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나타났다.
“대단해요!”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건 나보고 구체적으로 칭찬해달라는 말이잖아?
사람이 나이가 들면 도리어 유치해진다 들었는데, 진짜인가 봐.
하지만 게임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런 문명을 수백 년 동안 일궈낸 사람이라면, 저 장엄한 장면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겠지.
“괴물의 돌진을 막아낼 정도의 방패를 만들어낸 것도 대단하고, 저런 괴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맞서는 병사들도 대단해요.”
“저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선생님….”
“또 감상적인 모습을 보였군요.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키워낸 군사들을 데리고 여러분과 함께 진격하는 것! 이 순간을 300년 동안 꿈꿔왔습니다.”
이후로도 빛의 도시의 군세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전진했다.
흙 속에서 나타난 돌처럼 단단한 피부의 지렁이도, 어금니만 여섯 개 달린 자동차만 한 멧돼지도, 날개가 네 장 달린 대형 비둘기도.
그 어떤 괴물도 군단을 막아낼 수 없었다.
군단의 진군을 늦추는 요소가 있었다면 그건 괴물이 아니라 식량이나 물 정도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계 최고의 군대도 먹고 마실 것이 없으면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가슴이 웅장해지는 시기에 나는 뭘 하고 있었는가?
…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애초에 선생님은 내가 괴물과 싸우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본인 곁을 떠나지 말라 하며 항상 수레에 태웠다.
싸움은 도시에서 나온 병사들만 열심히 했다.
“이것 참, 누나가 걱정이 많았는데 이런 상황까진 예상하지 못했나 봐요.”
“아리 양이 걱정이 많았습니까?”
“네. 저만 두고 가는 게 걱정된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아마 군단의 힘을 신뢰하지 못했겠지요. 이해합니다.”
3일 후, 정찰병이 마침내 타락한 신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알렸다. 군단은 행군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이제 아리 양과 은솔 양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이 합류한 후 다 함께 저 끔찍한 땅을 모조리 불태우면 되겠군요.”
평소답지 않게 다소 거친 표현을 쓰는 선생님의 눈에서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선생님.”
“승엽 군?”
“이제 이 방도 슬슬 끝나가는 것 맞겠죠?”
수레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이 악물고 일어서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으악!”
“승엽 군. 다시는, 정말이지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