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8)
337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7)
흙먼지로 가득한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두 존재가 있었다.
부리에 어린아이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덩치의 괴조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녀의 조합은 어딘가 기묘한 구성이라 할 만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로테스크와 아리는 이동을 멈추고 근처의 호숫가에 멈추어 섰다. 그때, 그로테스크의 깃털에 파묻혀있던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 아리야.”
“응?”
“넌 무슨 무공이라도 익혔어?”
“…”
그로테스크의 힘이 강하다 하나 두 사람을 태우고 수백 km를 매일 달려갈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은솔만 올라타고 아리는 직접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은솔은 목적지까지 몇 달은 걸리겠거니 했다.
아리가 달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흙먼지 폭풍이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그게 아님을 알았다.
“평범한 인간 마라토너도 이 정도 속도는 나와. 내가 약간 더 빠르려나?”
“마라토너들이 그 속도로 하루 10시간씩 움직이진 못하겠지.”
“새삼 뭘….”
이건 또 맞는 말이라 은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의 신체 능력이 인간과 다르다는 건 호텔고에 처음 들어가서 운동회를 겪었을 때부터 알았으니까.
양손으로 호숫가의 물을 퍼 올려 마시려던 은솔은 순간 움찔했다. 물속에 희끄무레한 실지렁이 같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곧, 그녀는 한숨 한번 하고 물을 다시 퍼서 이번엔 그냥 마셨다.
“203호, 진짜 빨리 좀 나가고 싶어.”
“모두의 간절한 소원이지.”
“상현 씨가 특히 그렇겠다…. 수백 년을 고생하셨다며?”
“글쎄….”
아리의 애매한 답에 은솔 또한 침묵했다. 김상현에 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이 며칠째 이동하며 쉼 없이 했던 이야기니까.
곧, 은솔의 손에 볼품없는 피리가 나타났다. 생긴 것만 보면 관광지에서 손쉽게 구할 만한 별것 아닌 기념품 같은 외형이었다.
“이게 활약할 일이 있으려나?”
“그걸 믿고 널 데려가는 중이야.”
“그래….”
은솔의 시선이 아리를 지나쳐 머나먼 허공을 향했다. 아리는 흥미롭다는 듯 은솔에게 물었다.
“뭔가 보여? 오로라라면 내 눈에도 보이긴 하는데. 저게 바로 아드라비타의 영역인가?”
“…”
“은솔아?”
“아드라비타가 있어.”
“…”
“그가…. 가까이 있어. 어쩌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이만 자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
*
– 박승엽
군단이 부화장 인근에 멈춰선지 3일 차, 하늘에 오로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며 수없이 많은 괴물을 처치한 백전노장의 군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승엽 군.”
“네?”
“저 빛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 죄수가 뭔가 손을 쓰고 있는 걸까요?”
“그렇겠지요.”
“솔직히 무서워요. 대체 무슨 수가 아직도 남아있는 건지…. 애초에 5회차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날뛰는 게 말이 되나 싶어요.”
“아드라비타의 생각은 다르긴 할 겁니다.”
“다르다?”
“그의 눈에 우리가 어찌 보이겠습니까? 잘 쳐줘야 병아리나 닭 아닐까요? 사람이 닭과 무슨 승부를 겨룬다는 건 본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호텔이 죄수에게 엄청난 제약을 가했기에 대결이라는 게 성립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깨어난 후에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까?”
선생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자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드라비타는 203호의 기록물을 왜곡해 우리를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었고, 온 세상을 괴물로 채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AI조차 도구처럼 이용해 우릴 함정에 빠트렸다.
그러나 이 모든 수작은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부터 깔아둔 포석이 우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점에서 현실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되새기자 막연한 불안함에 시달리는 대신, 아드라비타가 남겨둔 패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알 것 같아요!”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아드라비타에게 남은 패가 있다면, 듣도 보도 못한 무언가가 이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진 않겠네요.”
“…”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수는 우리가 깨어난 후 새롭게 만든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깨어나기 전부터 깔아둔 무언가죠.”
“…”
“뭘까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방에 있던 무언가이려나?”
“오는군요.”
“네?”
“저쪽을 보세요. 아리 양이 돌아온 듯합니다.”
잠시 후, 아리 누나가 은솔 누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
— 로오오오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휴식하던 병사들 또한 삼삼오오 일어서서 은솔 누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마 무언가 종교적 행사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은솔 누나?”
아리 누나가 내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피리 소리를 들으며 의아해하는 내 눈을 보던 아리 누나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아니구나. 다행이네.”
“예?”
곧 은솔 누나가 한쪽 팔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 피리를 잡고 부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세 명의 신인이 제사장이 거하는 천막으로 들어섰다. 신인들끼리 회의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병사들이 곧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
“…”
— 로오오오!
말 없는 사람들과 공간을 가득 채운 기묘한 피리 소리.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선생님이 ‘픽’ 하고 웃었다.
“뭔가 하시려는 모양인데, 이쯤 하면 다 끝난 것 아닙니까?”
누나가 피리를 내리며 웃었다.
“상현 씨, 오랜만이야.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어.”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기엔, 솔직히 고생이 너무 많긴 했군요.”
“내 연주는 어땠어.”
“글쎄, 예전 생각이 나긴 하는군요.”
“…”
“서로 솔직히 이야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 하늘의 오로라가 보이시지요? 아드라비타도 우릴 보고 있을 겁니다.”
아리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좋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의심병이 좀 있거든?”
“그렇습니까?”
“직업병이지. 원래 관리국 경력 좀 쌓이면 길 가는 사람이 다 잠재적 악마 소환자처럼 보이곤 해.”
“나중에 한 번 진료를 봐 드릴까요?”
“예전에, AI의 마취 가스 공격에 당해 잠들면서 생각했어. 누군가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차진철이라고.”
“…”
“진철이가 방호복을 입고 있었거든. 방호복의 기능 한계를 실험해보진 않았지만, 마취 가스도 막아낼 만하지 않을까?”
“…”
“설령 방호복이 막지 못하더라도 차진철의 축복은 신체 자체를 강인하게 만들어줘. 별의 힘에도 약간이나마 저항할 수 있는 비범한 신체가 고작해야 마취 가스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대체로 추측이군요. 잊으신 것 같은데, 방호복을 얻을 때 호텔이 보장한 건 ‘도검불침’, ‘수화불침’입니다. 미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마취 가스 앞에선 무용할 수 있습니다. 또, 몸이 튼튼한 것과 마취 가스에 저항하는 건 별개의 문제죠.”
“네 말이 맞아. 나도 그래서 차진철이 아니라 승엽이가 온 것까진 그런가 보다 했어. 방호복이 의외로 허술했을 수도 있고, 용기의 축복이 수면제 앞에선 무용지물일 수도 있지. 그런데 제사장. 방호복은 대체 어떻게 얻었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리 양을 구하기 위해 산맥을 도전하다가 -”
“앞뒤가 안 맞잖아.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차진철이 마취 가스에 저항했거나, 못했거나. 저항했다면 어떻게든 차진철이 밖으로 나갔을 테고, 너와 함께 아직도 살아있었겠지.”
“…”
“저항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니까 입고 있던 방호복 또한 냉동 수면 설비 근처에 있어야 하지 않아? 로봇이 너무 강해서 승엽이가 깨어나기 전엔 시설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면서 방호복은 어떻게 찾았어?”
“그렇군요. 그 부분이 확실히 빈틈이 있었습니다. 이게 다 늙어서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가 둔해지거든요.”
천막 내부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몰랐다.
피리의 힘 때문에 무언가 심경 변화가 있던 걸까?
선생님은 순순히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하신 대로 진철 군은 그날 산맥을 탈출했습니다.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방호복을 입었는데도 내부의 팔 하나가 곤죽이 돼서 제가 절단해야 했지요. 목숨이라도 건져서 다행이었습니다.”
“…”
“사실, 진철 군이 남아있을 때만 해도 무슨 부족민들과 함께 문명을 일으켜 300년 큰 그림을 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우릴 구출할 생각이었지?”
“그게 정상적인 사람의 판단입니다. 다행히 우주선은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보안유닛 상당수가 해체된 채 우주선 내부의 부품이 된 상태였거든요.”
“둘이서 산맥에 돌격했어? 방호복은 네가 입고? 그런데…. 실패?”
“아드라비타는 거기까지도 읽었더군요. 우주선이 출발을 위해 보안유닛 상당수를 해체한 그 타이밍,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요?”
“…”
“진철 군은….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하긴 어려운 법입니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방호복을 입는다 해도 전투력이라는 면에서 진철 형과 비길 수는 없다. 신체 능력의 차이도 너무 심하고 별까지 더하면 아예 비교가 안 된다.
그런 진철 형조차 버티지 못하고 죽었던 흉험한 싸움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멀쩡히 살아나왔을까? 또, 애초에 선생님이 이 싸움의 존재를 우리에게 숨긴 이유는?
선생님의 표정이 서서히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흉한 기세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 쿠구궁!
이상한 소리가 천막 밖에서 들려온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또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내게 끝없이 영광을 약속했다. 자신의 사도가 되어 별을 움켜쥐라고, 그리하면 날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세우겠다고 하였다.”
…
“개의치 않았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살아있는 한 기회 또한 남아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
“첫 100년은 의지와 희망의 시간이었다. 머지않아 깨어날 동료들을 기다리며 결전의 순간을 준비했다.”
…
“다음 100년은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가 아낀 여자, 내 자식들, 내 손자들의 죽음을 무수히 보았다. 차라리 나 또한 세월 속에 으스러짐을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마지막 100년은 공포와 수용의 시간이었다. ‘젊음’이 없는 장생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고야 말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산채로 썩어 문드러졌다. 전신의 근육이 서서히 죽어가고, 수레에서 고개 한번 들 수 없는 무력함을 50년을 느꼈다.”
…
“역사책을 봤다면 알았겠지? 70년 전, 내 몸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움직일 수 있던 시기에 승부를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군단을 이끌고 이 땅에 도착했을 때….”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저 일이 일어났니?”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일평생 일궈낸 내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벌판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
*
– 김아리
바깥이 소란스럽다. 사실, 아까부터 대화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은솔이와 승엽이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 뛰어나간 지 오래였다.
불경한 오로라가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했을 때, 마침내 죄수가 ‘최초로’ 뿌렸던 포석이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온 사방에 병사들의 비명이 가득하다.
산채로 피부가 뒤집히며 알 수 없는 이형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고통이 그들의 정신을 무너트렸다.
가장 용맹한 전사도 죄다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야수로 변해갔다.
문득, 오래전 엘레나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불길한 상상의 힘으로 이 많은 원시인을 전부 괴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했었지. 그녀는 자신이 만든 괴물은 최초의 몇 마리뿐이라 했다.
어쩌면 엘레나는 그저 ‘트리거’를 건드렸을 뿐인지도 모른다. 원시인들이 최초로 창조된 순간부터 타고난 저주.
“왜 이제야 왔습니까? 왜 내가 이리될 때까지 오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상현이 토해내는 절망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그를 의심한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었지. 승엽이가 뭐라고 했더라?
의사 선생님이 300년의 고통을 인내하며 우릴 기다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람의 마음은 더없이 연약한 법이니까.
영원히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 흔들림 없는 정의감.
이런 단어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내 나이도 너무 많아.
그렇기에 새삼스레 상현을 원망하거나 그에게 실망하진 않았다.
300년의 기약 없는 기다림.
사랑했던 가족과 자손의 끝없는 죽음.
썩어가는 육신의 고통.
이런 고통을 감내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설령 여기까지 견뎌냈다 하더라도….
수백 년간 키워낸 문명의 병사들이 악신의 손가락질 한 번에 짐승으로 변하는 참극은 견뎌낼 수 없었으리라.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젊음을 되찾은 채 수레를 부수고 일어선 제사장이 있었다.
“상현아, 반로환동한 것 축하해!”
203호의 긴 악몽을 끝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