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39)
338화 – Re 203호, 저주의 방 – ‘새로운 시작’ (18)
– 김상현
— 로오오!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혼탁했던 정신이 맑아지며 더 냉정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 덕분에 조금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하아앗!”
머리를 우측으로 꺾어 적이 내뿜는 날카로운 기운을 피하는 동시에 왼손을 내밀며 장심에서 뻗어난 날카로운 뼈 창을 내질렀다.
상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앗! 대체 뭔 힘을 얻었길래 몸에서 창이 나와? 울버린이야?”
대답 대신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팔꿈치로 상대의 상체를 후려치는 순간, 그녀는 기묘한 낙법을 구사하며 뒤쪽으로 느릿하게 착지했다.
아리는 기묘한 힘으로 낙하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붉은 안개를 전신으로 뿜어냈다!
이건 별수 없이 뒤로 물러서서 기회를 보아야 –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지금의 내 육신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것이라면, 아무리 축복의 힘으로 탁월한 박투술을 연마했다 한들 저런 초자연적인 힘에 대적하기는 어려웠겠지.
그러나 아드라비타는 내게 반신의 힘을 내렸다.
피안개 사이로 뛰어드는 순간, 사방에서 형성된 날카로운 바늘이 전신을 찔러왔다.
그 순간,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오래된 피의 공세를 막아냈다.
상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뭔 힘이야!”
반복되는 공방 속에서 깨달았다. 마신이 내게 내린 힘과 아리의 오래된 피. 서로가 이 둘만 가지고 붙는다면, 내가 이긴다!
다음 순간, 안개 속에서 시퍼런 빛이 번쩍였다. 인지하자마자 즉시 전신을 옆으로 굴러야 했다.
… 섬광은 날아오지 않았다.
바로 저 힘이 이 싸움을 길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마신이 내린 강인한 신체의 힘으로 아리를 압박한다 해도, 그녀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날 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나는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로 번번이 물러서야만 했다.
물론 아리의 상황 또한 전혀 편치 않았다. 쐈다가 빗나가는 순간 이번엔 아리의 패배가 확정이니, 역설적으로 쉽게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꺄아앗!”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오자 아리의 고개가 즉시 그쪽으로 꺾였다.
은솔이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채찍을 피해 몸을 구르고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승엽이 고함지르며 괴물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다시금 피리를 집어들었다.
아리가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저 피리에 이 방을 이겨낼 실마리가 담겨있는 것처럼.
— 로오오오!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뇌리 깊숙이 파고드는 피리 소리가 썩어 문드러진 뇌세포를 하나하나 되돌리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기 전, 203호에서 얻은 ‘가족’들이 살아있던 당시의 기억.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여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가 낳은 아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 대화가 아니라 필담이었던가?
상대는 사람의 말을 입 혹은 ‘부리’로 꺼내는 일을 무척 어려워했던 것 같다.
*
‘선생님. 결혼과 출산은 물론 축하할 일입니다만, 걱정스럽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방을 나가야 함을 잊지 말아 주세요.’
‘□□군, 우리에겐 세력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하려는 일을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이 걱정스럽습니다.’
*
헛!
한창 전투 중이었는데 이런 실수를! 상대가 내 목을 베려 했다면 10번은 베었을 시간인데!
“… 왜 공격하지 않으셨습니까?”
“안식의 피리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효과?”
“무슨 생각 중이야? 뭔가 추억에 잠기는 것 같았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내 것인데, 떠올릴 수 없던 기억들이 돌아오며 정신을 점차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현아, 잠시 내 말 좀 들어봐.”
“…”
“네가 정신적으로 무너진 결정타는 저 사람들 때문이지?”
아리가 조용히 손을 뻗어 사방을 가리켰다.
흡사 초등학생이 살점이라는 점토를 아무렇게나 주물럭거려 만들어낸 듯한 끔찍한 괴물이 벌판에 가득했다.
“악신이 원시인들에게 남겨둔 트리거가 작동했구나. 아마 저걸 보면서 아드라비타에게 저항하려 했던 네 노력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
“아니라고 생각해.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적 근거가 있어.”
“논리적 근거….”
“첫째, 문제가 생긴 건 여기까지 온 군사들 뿐이야. 아마 죄수의 힘이 이 장소에서 특별히 강해지는 모양이지. 도시의 사람들은 여전히 멀쩡해.”
“…”
“생각해보니까 이건 너도 알겠네. 70년 전에 이 일을 겪었다며? 그때도 도시에 돌아가 보니까 도시에 있던 사람들은 멀쩡했지?”
“그랬지요.”
“둘째, 이들은 ‘인간’과 혼인해서 자손을 남길 수 있어.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겠네. 생물학적으로 자손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인간이라는 종의 개념을 넓게 보면 이들도 포함된다는 이야기야.”
“아리 양, 방금 그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날 설득하기 위한 말입니까?”
“그걸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건 아직도 ‘해결’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점이지. 인류의 새로운 시작, 빛의 도시는 여전히 멀쩡하니까. 문제는….”
아리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한숨 쉬었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정신을 맑게 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203호의 해결 조건을 방의 제목처럼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라 치자. 시작의 근간이 될 도시는 이미 만들어졌다.
문제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어린 문명을 위협하는 괴물이 이 세상에 가득하며, 그 괴물의 근원인 부화장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여기까지 끌고 온 군단의 힘과 남아있는 호텔 파티의 힘으로 부화장을 밀어버릴 셈이었으나, 바로 그 군단이 악신의 힘으로 무너지며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부화장을 파괴해야 하는가?
— 로오오오!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금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주선에서 모두를 구하기 위해 싸우던 차진철이 죽었다.
주변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며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이겨낼 수 없었다.
나 혼자서는 저 괴물들을 상대할 방도가 없었다.
나 또한 냉동 수면에 빠진 채 얼어붙은 동태가 되어 억겁의 시간 동안 썩어 문드러지리라….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새의 모습을 빌린 채 다가왔다.
“오래전의 일이 떠오르는군요.”
“뭔가 떠올랐어?”
“저와 진철 군이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싸우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전에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습니다만, 사실 당시의 우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성과?”
“아까 우주선은 출발하기 위해서 보안 유닛 상당수를 해체한 후 흡수한 상태였다 말씀드렸지요?”
“그래.”
“그런데 왜 출발하지 못했을까요?”
아리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아?”
“이 부분까진 생각하지 못하셨군요? 별것 아닙니다. 저와 진철 군이 우주선의 코어를 다시 분리했거든요.”
“코어. 그러고 보니 코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지? 어디 있는데?”
— 로오오오!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불가해한 선율이, 마침내 300년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내었다.
내가…. 무너지던 순간의 기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리 양, 이 방은 고통스러운 장소입니다. 얼마나, 정말이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는지 상상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
“하지만 200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지요. 어째서인지 아십니까?”
“…”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차진철이 사라진 후에도 나에겐 한 명의 동료가 더 있었다.
몸을 잃고도 억겁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십니까? 사람이 새의 몸에 들어간다 해도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비행을 위한 소프트웨어가 인간의 뇌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꼭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
“사람의 지능을 가진 새와 비행 훈련을 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상상 이상으로 재밌고 즐거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의 지성이 무너지던 날, 저도 같이 무너졌습니다.”
맑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변이한 인간들의 비명이 멈췄다.
하늘에는 한 마리의 새가 있었다.
새의 앞에 한 권의 서(書)가 있었다.
*
– ???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악몽의 끝을 느꼈다.
‘상태창’을 잃은 채 마도서를 남용한 끝에 찾아왔던 돌이킬 수 없던 파멸이, 또 다른 기적의 힘으로 무효가 되었음을 알았다.
생각건대, 나는 누구인가.
사람으로 태어나 20년을 살고, 새로 변해 300년을 산 자의 종족은 무엇인가?
한 권의 책을 바라본다.
필멸자의 틀을 벗어던진 깨달음이 내 조그마한 머리를 스쳤다.
나는 인간인가? 새인가? 이런 고민은 무가치하며 무용하다.
진실로 위대한 지혜를 받아들였다면, 육신이란 그저 옷에 불과한 것.
필요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 따위가 내 본질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돌리자화신(化身)의 힘에 의해 돌처럼 굳은 괴물들 사이에 선 소년이 넋 나간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책! 서, 설마!”
피리를 들고 있는 여성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보았다.
부리로 피리를 툭 툭 치자 그녀는 뒤늦게 정신 차리고 다시 피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날아올랐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끝없이 위로 비상했다.
끝없이 드높은 하늘, 아직 지상을 걷는 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소.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에겐 지성이 없으며, 지성이 있는 자들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장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바로 이 장소에 거대한 힘을 숨겼다.
최후의 순간,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다.
천지창조의 순간, 대우주가 창조한 진짜 태양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태양이 있었다.
거짓된 조물주가 만들어낸 오염된 땅을 단 한 순간에 정화할 수 있는 태양이 있었다.
코어를 향해 날아가는 내 몸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코어는 끝없이 열기를 방출하는 기계니까.
문제없다. 이번이 나의 마지막 비행이므로.
내게 필요한 힘은 온몸으로 버튼을 한 번 누르는 정도로 충분했다.
— 삑!
*
– 김아리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오로라보다도 더 위에 있던 ‘코어’가 지표로 추락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도,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괴물들도,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괴물들도 –
모조리 혼이 나간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없이 지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쏘시죠.”
“뭐?”
“저거, 바닥에 떨어트려도 터지지 않습니다. 아드라비타가 저걸 막으려고 오로라를 설치한 데다가 완충 지대까지 만들어놨거든요.”
“떠, 떨어트려 봤어? 이미?”
“300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아십니까? 그 시간 동안 제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수를 써봤는지 모르실 겁니다.”
“…”
“우리에겐 폭탄은 있는데 방아쇠가 없었습니다.”
손을 들어 올리며 – 어쩌면 이 방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문장을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한 줄기의 섬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