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42)
341화 – 선택의 시간 (2) Fin
– 김아리
내 쪽으로 돌아선 가인은 마치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목소리를 통한 대화는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
“펜 없어? 글을 알고 있다면 써봐.”
곧, 내 제안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나이프로 고기를 써는 것도 힘들어하며 내 손을 빌린 게 지금의 가인이기 때문이다.
펜으로 글씨를 쓰는 건 훨씬 더 정교한 손놀림을 요구하니 지금의 그에겐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가인은 본인에게 가장 편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야? 나는 – 내 목으로 말하지 마!”
자기 목으로 말하는 건 어려워하면서 내 목을 조종해서 말하게 하는 건 쉬워?
도대체 가인의 뇌 구조가 지금 어떻게 된 상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가인은 벽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인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중인 것 같았다.
피로감을 느끼며 다시 상현 쪽으로 가자 상현은 어느샌가 양손을 모은 채 어딘가에 기도 중이었다.
“결정 내렸어?”
“그렇습니다.”
“말 편하게 하라니까.”
“지금부터 할 일은 제 대죄를 고하는 일입니다.”
“대죄?”
“우선, 꼭 해야 할 일을 여태 하지 않았군요.”
그 말을 끝으로 상현이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
“아리 양이 워낙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해주셔서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만, 전 죄수의 목소리에 홀려서 모두를 해칠 뻔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괜찮아. 네가 아닌 누구라 해도 비슷하거나 더 못한 행동을 했을 테니까.”
진심이다.
상현이 203호의 후반에 정신적으로 무너졌던 일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거나 더 일찍 무너졌으리라 본다.
그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결정은 내렸어? 기억을 남길 셈이지?”
“그렇지요.”
상현은 짧게 답한 후, 창가를 바라보며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편히 만들 생각도 있었습니다. 축복의 힘으로 얻은 몇 가지 재주가 아깝긴 했지만,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
“괴롭습니다. 머릿속에서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끝없이 메아리쳤습니다.”
“…”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내 가족들, 내 백성들…. 그들 중 그 누구도 203호를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온 것은 나 뿐이죠.”
“저주의 방이니까.”
“내가 그들을 잊는다면, 세상에 그들이 존재했음에 대한 증거는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보낸 시간, 황무지에서 도시를 일으켰던 영광스러운 역사…. 그 모든 것에 대한 증거는 이제 내 기억뿐입니다.”
“…”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까 전의 이야기라면, 정말 별일 아니라고 생각 -”
“마신에게 홀린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부분은 물론 제가 평생 기억해야 할 대죄이나, 다행히 돌이킬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결국 모두가 203호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무슨 죄?”
상현은 이 시점에서 날 바라보는 대신 어딘가 먼 장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 혹은 호텔 파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대한 사과였기 때문이리라.
“저는 아내를 속인 남편이요, 자식을 속인 아비요, 백성을 속인 왕입니다.”
“…”
“그들에게 수없이 구원을 약속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있다고, 살아서 얻을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얻으리라 약속했습니다….”
“…”
“거짓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대체 이 호텔에 낙원은 어디 있고 구원은 또 어디 있습니까? 내 한 몸도 구하지 못했는데 가족과 백성은 어떻게 구한단 말입니까.”
“그들이 널 따르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겠지.”
“그게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
“저주의 방에서 죽은 NPC들은 어떻게 될까요? 참가자가 죽을 경우의 미래는 압니다. 경험했으니까요. 한빙지옥에 갇혀서 고통받거나 NPC로 살아가게 되죠. 그렇다면, NPC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참가자가 죽으면 NPC가 될 수 있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NPC가 전 참가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애초에 방마다 별 하나가 통째로 구현된 상태인데, 수십억에서 수백억에 달하는 지성체가 전부 전 참가자는 아닐 것 같았다.
뭐, 모를 일이지만.
“모르겠어.”
“깔끔히 소멸했다면, 본인이 태어난 저주의 방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진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죠?”
“…”
“내 아내가, 내 자식이, 내 백성들이 지옥에 떨어졌다면 어찌합니까?”
“미안해. 그 부분은 나도 모르겠어.”
“예전에 가인 군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이?”
“호텔에서 죽은 자를 위하는 길이 두 종류라 하더군요. 하나는 ‘부활’이며, 우리가 이미 확인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이라 들었습니다.”
“기억나네. 참고로 부활에 대해선 관리국에서도 파악하고 있었어. 부처님은 이번에 내가 들어와서 처음 들었는데 -”
여기까지 말하다가 깨달았다.
‘부처님’이라는 두 번째 구원의 길이 존재함을 우리에게 알린 존재는.
“제가 가인 군에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김상현이다. 부활하기 전, 105호의 의사이자 호텔의 숨겨진 NPC였던 김상현이다.
“맞아.”
“우스운 일입니다. 정작 지금의 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는데, 당시의 전 무언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호텔 직원이었으니까 호텔의 비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겠지.”
“‘부처님’은 대체 어디 있을까요?”
“…”
나도 궁금하다.
“벌써 2층입니다. 남은 저주의 방은 적지 않으나, 2층의 숨겨진 요소는 대부분 찾아냈다는 말입니다! 거울의 방, 부활의 방, 신비의 장인! 이제 다 찾지 않았습니까?”
“숨겨진 방이 두 개, 숨겨진 NPC가 두 명이니까 NPC는 하나 남긴 했네.”
“압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알았습니다. 그는, 부처님은 가장 드높은 위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상현에게 어렴풋이 남은 NPC 시절의 기억? 아니면 그냥 직감?
“그는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 도달할 모든 질문의 해답을 쥔 자이며, 모든 수수께끼의 창시자입니다.”
“너, 지금 대체 -”
“소원이 있습니다. 호텔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탈출보다도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호텔이 만들어낸 지옥,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갇혔던 이에게 탈출보다도 간절한 소원이 생기고 말았다.
“어릴 때, 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거든요? 매일 어머니와 자식들을 때렸습니다. 그 개새끼가 밤길에서 총 맞아 죽는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릅니다.”
상현의 말이 조금씩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런 환경에서도 우릴 열심히 키웠지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그리하면 세상이 보답해준단다. 살아보니 개소리였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호텔에 들어와 있더군요.”
끓어 넘치는 감정의 격류가 논리를 앗아가고 생각의 흐름만 남긴 것 같았다.
“그런데, 203호에서 사이비 교단의 교주이자 사기꾼이 된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니다, 어머니께서 거짓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 내가 정직한 자가 아니기에 벌을 받았구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상현은 거짓말을 했기에 벌을 받아 호텔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호텔에 떨어졌으니까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돌이키고 싶습니다. 수백 년을 해온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만들고 싶습니다.”
“너….”
“호텔 어딘가,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을 그자.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두를 굽어보는 자. 나는 부처님을 반드시 만나야겠습니다. 그리고 빌고 또 빌겠습니다. 부디, 203호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구원이 있기를!”
어느새 무릎 꿇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사죄하는 남편이요, 신도들을 속였음을 고해하는 제사장이었다.
또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해온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반대편에서 같이 무릎 꿇고 기도했다.
“부디, 구원이 있기를.”
“… 부디, 구원이 있기를.”
*
시간이 흐른 후, 상현과 가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인이 말인데, 저 상태로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상현이 대답 대신 어물거리는 것을 보며 그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너, 아무래도 가인이에게 무언가 빚을 졌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
“가인 군은 지옥에 갇혀있던 제게 두 번째 기회를 줬습니다. 또, 203호에서 부족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피해 다니던 저 대신 괴물들과 맞선 것도 가인 군입니다.”
“그…. 알겠어.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빚은 둘이 있을 때 열심히 갚도록 해. 지금은 다른 모두를 위해 한 발 떨어져서 냉정히 좀 말해봐.”
“…”
“쟤가 어떤 상태인지 제일 잘 아는 건 너일 테니까.”
상현은 열차의 의자에 기댄 채 잠시 고민하더니 솔직히 대답했다.
“위험할 것 같네.”
“어떤 부분이? 갑자기 우리 몸을 빼앗는다던가?”
“예를 들어 우리가 함께 저주의 방에 맞설 때, 여러모로 우리 중 탁월해진 가인 군이 보기엔 우리 일 처리가 답답할 수 있다.”
“그럴 수 있겠지.”
“과거의 그라면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했겠지만…. 지금의 그라면, 그냥 우리 몸을 움직여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방향으로 처리할 것 같은데.”
“…”
“왜냐하면 가인 군이 생각하기엔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몸 자체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평범한 인간의 가치관과 몸을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옷처럼 여기는 자의 가치관은 말 한두 마디로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가 느끼기엔 우리가 어리석어 보이겠지.”
상현이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가치관은 말 한두 마디로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설령 우리가 강력히 항의한다 해도, 지금의 가인은 신체 강탈을 ‘사악한 행동’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어쩌면 더 교묘하고 빈틈없이 우릴 조종해서 들키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관리국 요원이 자주 겪는 일이다.
세상의 어둠에 발을 반쯤 들인 민간인들은 관리국이야말로 세상의 거악이라며 분노하곤 한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태워버리는 일에 분개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
물론 우리에게도 이유는 있다.
단지, 그 이유를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일반인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기에 설득 대신 총을 들이밀 뿐이지.
“좋아. 카탈로그 보니까 열차가 종점에 도착할 때 내리면 기억, 열차에 남으면 망각인 것 같네.”
“그렇게 쓰여 있군요.”
“가인이는 두고 – 나만 두고 너희끼리 다 정했어?”
다음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와 상현은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며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옆에는, 어느새 근처에 온 가인이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왜, 화났어? 또 네 목소리를 빌려서?”
이번의 문장은 나 혹은 상현의 목을 빌려서 낸 말이 아니다.
가인은 이제 자기 입으로 말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
“너무한 것 아니야?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의견은 무시하다니?”
“…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잘 쳐줘야 아이 같았는데.”
“에이! 그냥 말하는 법을 몰랐을 뿐이야. 참, 고기를 네 손으로 자른 건 사과할게. 들어보니까 그것도 불편한 모양이네.”
“…”
“참, 별걸 다 불편해한다. 내가 네 손 좀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너도 내 손쓰면 되잖아.”
“…”
가인은 내 표정을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접시에 남은 식은 고기를 조심스레 집어서 내밀었다.
“자!”
“뭐야?”
“아까 네 손으로 고기를 잘라서 화났지? 이번엔 내 손으로 고기 떼어서 주는 거야. 이런 것도 이해 못해?”
어이가 없었지만, 조금 더 있으면 입에 집어넣을 기세였기에 별수 없이 받아먹었다.
“이제 됐다! 됐지?”
“…”
“됐네. 그리고 이게 너희가 아까부터 보던 카탈로그인가? 이거, 이건 뭐야?”
가인이 첫 페이지를 지목하자 상현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유산을 고르는 페이지입니다.”
“나는 고를 수 없나 보네. 이미 참가자의 자격을 잃었다는 알림이 보여.”
“죄송합니다.”
“네가 왜 죄송해? 규칙이 그런 건데.”
“…”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열차를 서서히 메워갔다.
그때, 적막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철컹!
[이번 역은 호텔, 호텔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없습니다.]“도착했나 보네.”
“아리 양, 내립시다.”
상현은 도리어 마음 편한 표정을 지으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부터 가인에게 상당한 부채감을 느끼던 그는 지금 상황을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가인이 상황을 이해했으니, 이제 그 스스로 결정할 테니까.
문으로 걸어가려는 그 순간, 가인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너…. 이제 이름 기억났다. 아리 맞지?”
“맞아.”
“어떻게 생각해? 내릴까 말까?”
“… 너 알아서 해.”
“에이~! 네 표정에 답이 있네.”
“…”
“좋아. 난 여기 남을게. 그러면 바깥의 나는 꽤 많은 걸 잊겠네.”
“… 잘 있어. 이따가 또 보자.”
열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 건너편에 남아있던 청년이 갑자기 씩 웃으며 말했다.
“아리야,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알에서 깨어난 자가 다시 알로 들어갈 수는 없어.”
“무슨 말이야?”
“기억을 잊고 말고는 네 생각처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안녕!”
이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