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57)
356화 – 205호, 저주의 방 – ‘□□□□’ (5)
– 차진철
누님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남은 사람들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아리는 미로 앞으로 움직이며 오래된 피의 힘을 끌어냈고, 나는 즉시 창을 뽑아 노인의 몸을 향해 찔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즉시 알았다.
이 정도의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상대는 이 방에 단 세 명인데, 봉인된 환마나 방벽을 넘어오지도 못한 배화교주가 이 자리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저 노인은 이자성이다!
다음 순간, 노인의 허리춤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빛줄기가 벼락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무슨 간을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찰나’를 사용해야 했다.
세상의 시간이 느려진다.
섬전처럼 날아들던 빛줄기가 느려진다 싶더니, ‘검’이라는 실체가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내찌르던 창의 각도를 오른쪽으로 꺾어 이자성의 검로를 사전에 차단하고 –
그때, 변화하는 내 창의 각도를 읽은 것처럼 상대의 검이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내 창만 허공을 찌르며 빈틈을 노출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 또한 몸을 비틀며 창을 거두었다.
어딘가 재밌다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구나. 북두 대장군이라 했는가? 대장군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다.”
“…”
방금의 공방이 의미하는 사실은 명확했다.
저 괴물, 이자성은 ‘찰나’가 만들어낸 초 가속의 세계에서도 온전히 반응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다.
“또한, 안타깝구나. 여유가 있었다면 그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소리겠지.
천의맹주의 검이 다시 한번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낸다.
나 또한 다시금 찰나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차라리 천의맹주가 이전보다 두배 빨라졌다면 이해는 할 수 있었으리라.
205호 기준으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는 초인이니, 내가 축복의 힘과 찰나를 동원해도 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노인의 검은 느렸다.
찰나로 가속된 내 정신이 느끼기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그러나, 그의 검은 거리낌이 없고 막힘이 없었다.
분명 창으로 막아내려 했는데 ‘충돌’이라는 게 발생하지 않았다.
흡사 급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역풍 또한 추진력으로 삼아 비행하는 새처럼.
내 창은 그의 검에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찰나의 힘으로 내 인지 속도가 한없이 빨라졌기에, 노인의 검이 내 심장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을 ‘오랜 시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악몽과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마지막 수단이 남아있었다.
— 파아아아!
세상을 비트는 파동이 퍼져나간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은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맞서야 하는 법.
‘이계의 별’이 뿜어내는 파동이, 삽시간에 공간 전체를 갈아엎기 시작했다.
“크으읍! 진짜 더럽게 강하네!”
시간이 다시금 평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숨을 돌리며 상체의 상태를 살피자, 꿀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실시간으로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별의 힘을 두려워한 이자성이 검로를 비틀었기에 심장이 꿰뚫리는 일은 막았으나, 크게 다치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뒤에서 나타난 아리가 보온병에 담겨있던 자신의 피를 내 몸에 아예 들이부었다.
“아리야, 봐, 봤냐?”
“뭘 봐? 내 눈엔 둘이 휘리릭 촥촥 하더니 갑자기 네가 별을 소환했을 뿐이야.”
“저, 저 노친네 더럽게 강하다!”
“그 말은 칭찬으로 듣지.”
뒤늦게 시야를 천의맹주에게 향하자, 방금의 공방이 그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줬음을 알았다.
천의맹주가 별의 힘에 노출당한 시간은 기껏해야 0.5초나 되었을까?
그러나 위치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고, 무엇보다 그의 몸은 별의 힘을 견뎌내는 저항력이 전혀 없었다.
“정말이지 두려운 힘이로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에겐 정작 그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흡사 나뭇조각을 깎아내는 목수처럼, 잠깐 사이에 기괴하게 비틀린 피부와 살점을 칼로 썰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아리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프지도 않아?”
“아프지.”
아리와 미로가 서로 눈짓하며 반격하려는 순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마의 졸자들이여.”
“뭐?”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난데없이 과거 회상?
이건 솔직히 뻔한 수다.
이자성 또한 별의 힘에 타격을 받았으니, 상처를 돌볼 시간이 필요했겠지.
그러나 나도 상처를 재생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저 얕은수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전, 무고한 자 수천을 베었다.”
“…”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운 없이 환마 근처에 있었다는 것뿐이었지.”
“…”
“그때 생각했다. 우리는 이 참혹한 세계에서 너무 많은 이를 죽였으니, 우리의 손에 묻은 이 얼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고.”
아리는 흥미롭다는 투로 답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뭔데?”
“환마는 천고의 대악이니, 결코 이 땅에 다시 서서는 안 되는 자다. 한데, 너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의 부활을 꾀하는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말문이 탁 막혔다.
따지고 보면 저 노인은 환마의 부활을 막겠다는 ‘대의’를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 아닌가?
반대로 우린 이 무대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이유로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했다는 존재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아리는 간단히 답했다.
“그냥.”
“…”
이 순간만큼은, 천하의 이자성도 말문을 잃은 것 같았다.
“재밌잖아. 절대 고수 셋이서 치고받고 날뛰면 볼만하겠네.”
아, 아리는 지금 이자성의 정신을 흔들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맞지?
그때, 노인은 어딘가 허허로운 분위기로 답했다.
“너희는 환마와 닮았구나.”
“뭐?”
“오래전에, 비검문과 금가장이라는 세력이 있었다. 둘 다 하남성에서 나름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었고, 딱히 갈등을 빚지도 않았지.”
“…”
“어느 날 갑자기 비검문주의 셋째 아들이 금가장의 장남을 잡아 가두더니 참혹하게 살해했다. 이런 일을 금가장 쪽에서 참아넘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하남성에서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나는 천의맹주로서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움직였지.”
“… 환마가 한 짓이야?”
“그때, 내 앞에 나타났던 환마는 예쁘장한 여자아이의 몸을 빌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환마의 농락이었음을 알고 절망하는 금가장주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지.”
“…”
“그가 내게 무어라 말했는지 아나?”
“모르지.”
“왜 그리 심각하냐 묻더군.”
“아니, 내가 솔직히 그런 놈하고 닮진 않았는데….”
“어쩌면 바로 그런 태도가 환마를 천하무적의 초인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뭐?”
갑자기 무슨 말일까?
저런 정신나간 태도가 환마를 무적의 초인으로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모두가 당황함도 잠시, 여지껏 조용히 있던 소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환마에게 직접 물어보든가!”
— 철컥!
은발을 빛내는 소녀의 손에 자그마한 시계가 들려 있었다.
바늘이 회전하는 순간, 허공에서 한 명의 청년이 나타났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56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5호 – 저주의 방 ‘□□□□’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갑작스레 정신을 차렸다. 주변 상황은 그러니까….
내가 시간대여기의 힘으로 소환당한 상황인 건가?
“가인아!”
고민할 틈도 없이 미로가 손을 뻗어 전방의 노인을 가리켰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요전에 약속한 일종의 ‘신호’다.
시간대여기의 힘으로 소환된 사람은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는데, 급박한 상황에선 이걸 고민하고 있을 틈이 없다.
따라서 미로가 지목하는 존재를 즉시 공격하자고 약속했다.
“내가 저놈을 묶어보마!”
동시에 진철 형이 몸을 날려 노인에게 달려들었고, 그 옆에서 아리 또한 사방에 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냉병기와 냉병기가 부딪히는 소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는 마도서를 소환해 상대에게 빙의하려 시도했다.
…
이건 뭐지?
부유하는 의식이 노인의 몸을 강탈하는 순간, 노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가 싶더니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현상을 겪었다.
생각해보면, 빙의를 통한 신체 강탈이 통하느냐 그렇지 못하냐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상대의 격이다.
이 ‘격’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강함과 다른 개념이다.
예컨대, 싸움에 있어선 승엽이 수준으로 약하다 해도 신적인 존재의 전령이나 시종이라면 빙의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반면 꼬리치기 한방에 건물을 무너트릴 괴수라 해도 그냥 짐승이라면 빙의에 저항할 도리가 없다.
노인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주변에 보이는 은솔 누나의 시신, 실시간으로 바닥을 피로 적시는 진철 형이나 긴장 가득한 아리의 표정 등을 미뤄볼 때 무지하게 강한 존재 같긴 했다.
그러니까 날 불렀겠지.
하지만 빙의를 튕겨낼 정도의 격을 갖춘 존재는 아니었다.
즉, 영혼의 격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기술로 마도서의 힘에 저항한 것.
노인은 벽을 만들어내었다.
마도서의 힘으로 넘나들 수 없는 이상한 벽이 나와 노인의 사이에 존재했다.
그 벽은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무언가가 아닌, 정신과 정신을 가르는 벽이었다.
그가 해낸 묘기의 원리를 이해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종종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다큐를 보곤 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흥미로운 동물은 다름 아닌 비버였는데, 고작해야 덩치 큰 쥐 정도로 보이는 동물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거대한 댐을 만든 것을 보며 감탄하곤 했다.
딱 그런 느낌이다.
아무리 천재라 한들 인간일 텐데, 대체 무슨 수로 이런 묘기에 가까운 기술을 만들어내었는지.
절로 감탄이 나왔으나 동시에 웃음도 나왔다.
그래봤자라 여겼기 때문이다.
필멸자가 뛰어봤자 벼룩이고, 날아봐야 참새인 법.
— 고오오!
화신의 힘이 발현되며 마도서에서 솟아난 검은 실을 닮은 마력이 날아드는 순간, 노인은 이번엔 난데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 광경을 보며 정말이지 설마 했는데, 노인이 이번에는 칼로 마도서의 마력을 베어내는 신묘한 기예를 부렸다.
심지어 그는 이 모든 일을 진철 형과 아리와 싸우면서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이 단계까지 오자 어떤 의미로는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손이 세 명의 초인을 당해낼 수 없는 법.
결국 차진철이 노인의 검을 몸으로 받아내며 달려들어 그의 행동을 제약했고, 아리는 사방을 피안개로 덮어서 노인의 감각을 교란했다.
그 순간 – 화신의 힘이 노인의 육신을 그대로 강탈했다.
*
한참 동안 미로가 훌쩍거리면서 내게 상황을 설명했다.
“절대 고수라고?”
“으응….”
“어쩐지 마치 내 힘을 아는 것 같다 싶더라니.”
“응?”
“내가 이자성의 몸에 빙의하려 했을 때, 그는 마치….”
“마치?”
“자신의 정신을 쪼개어 내부에 벽을 만들어낸 것 같았어. 내 빙의를 막아낼 수는 없지만, 한 번에 몸 전체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일을 막았다고 해야 하나?”
“뭔 소리야?”
이해하지 못하는 미로에게 설명해주는 대신 생각했다.
정신을 쪼개어 빙의에 저항한 것, 화신의 힘의 마력 자체를 베어내는 기묘한 검기.
아무리 봐도 내 마도서의 힘을 미리 알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낸 느낌이었는데, 205호의 설정상 ‘환마’라는 나와 유사한 존재가 날뛰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천하검 이자성은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모를 환마에 맞설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냈다.
“불길한데….”
“응?”
“이자성이 저런 기술을 만들어냈다면, 조원홍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에?”
“미로야, 이제부터 잘 들어. 은솔 누나, 진철 형, 아리까지 다 죽었으니 지금 내가 얻은 깨달음을 전달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 알았어! 기억력은 자신 있어.”
“… 아니다. 어디다 적어줄 테니 잊어버리지 마.”
벌써 제법 많은 수의 동료가 죽었다. 남은 사람들이 잘 탈출할 수 있을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해야 20분도 채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으로서는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