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63)
362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11)
– 이은솔
일찍이 당나라의 시인, 조송이 말하길 ‘한 명의 장군이 공을 세우니, 일만 명의 백골이 쌓이는구나! (一將功成 萬骨枯)’라 하였다.
나는 이 사실을 방벽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체감했다.
매 순간, 제국과 배화교의 병사들이 토지의 거름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쌓이는 백골산(白骨山)은 곧 명장이 태어나는 요람이니, 칼 한번 휘저어 병졸 서넛을 한 호흡에 썰어대는 초인들의 웃음소리가 전장에 메아리친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 동료들은 백골이 아닌 명장에 속해있다는 점 정도였다.
“으하하!”
천지를 뒤흔드는 거한의 웃음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양 사이에 뛰어든 늑대처럼 날뛰며 수백의 병졸을 으스러트리는 차진철은 사람이라기보다 살인 기계처럼 보였다.
문득,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우리가 호텔에 들어온 첫날, 그때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그때의 차진철도 지금처럼 전장에서 날뛰며 웃을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상념임을 알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예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전혀 같지 않으며, 이는 가인이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와….”
순간적으로 감탄이 나왔다.
조금 전, 차진철이 맨주먹으로 배화교 고수의 몸통을 갑옷째로 으스러트렸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저 주먹질에 누군가 ‘파천대력권(破天大力拳)’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붙였다는데, 웃기면서도 이해는 갔다.
아니, 펀치 한 방에 철갑옷을 입은 고수를 으스러트리는데 이게 어떻게 평범한 주먹질로 보이겠어?
북두 대장군이 가문 대대로 이어받은 전설의 신공절학으로 보이지.
그 단어를 처음 들은 차진철은 분명 부끄러워했었는데, 이젠 부끄럽지 않은가보다.
본인도 주먹을 내지르며 파천대력권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진철이와 달리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할아버님은 내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다.
살과 피, 뼈와 뇌수가 넘치는 지옥을 보며 할 말은 아니지만, 진철이보다 훨씬 ‘재미있게’ 싸우고 있기도 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라는데, 바꿔 말하면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힘껏 무기를 휘두르고 달리기만 해도 그게 곧 신공절학이요, 보법이 되는 진철이와 할아버님은 상황이 달랐다.
할아버님은 정말이지 치열하게 머리를 써가며 싸워야 했는데, 이 생각을 하는 중에도 또다시 배화교의 고수와 싸우기 시작했다.
시꺼먼 망토를 두른 남자가 유백색으로 빛나는 반월도를 휘두르며 할아버님에게 접근했다.
남자가 무어라 외치며 반월도를 복잡하게 휘저어 수십 가닥의 검풍을 뿜어내자 할아버님은 자세를 거북이처럼 웅크리며 최대한 갑옷으로 검풍을 받아내었다.
다음 순간, 할아버님의 웅크린 몸이 스프링처럼 펼쳐지며 오른팔, 즉 괴력이 담긴 아브라스 전사의 팔에 들려 있던 방천화극이 배화교 고수에게 날아들었다.
상대는 반월도를 휘저어 극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미 위에서 내가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
어지간한 고수의 힘으로도 할아버지의 오른팔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다.
힘에서 밀린 상대는 크게 당황하며 연거푸 바닥을 굴러 할아버지의 공세를 간신히 피해냈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상대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양손으로 반월도를 움켜쥔 채 무어라 경문을 외기 시작했다.
분명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술이다!
극도의 긴장감이 할아버지와 배화교 고수, 그리고 이 싸움을 지켜보던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그 순간 –
할아버지가 왼손을 품에서 꺼내 손가락 한번 딸깍하니까 배화교 고수의 머리가 단박에 터졌다.
잘 싸우시네.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건장한 체격과 전신을 두른 철갑옷.
여기에 사람이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위엄찬 방천화극까지!
누가 봐도 전설의 여포가 환생한 듯한 웅장한 외견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이런 모습을 한 채로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신화적인 일기토를 할 것처럼 굴었다.
딱, 분위기만 그렇게 잡았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홀린 상대가 뭔가 필살기를 준비한다 싶으면 주저 없이 총을 쐈다.
이 시대의 무인들에게 있어서 21세기의 권총이란 꿈에도 상상 못한 악마의 무기 그 자체다.
대놓고 꺼내 든다면 무언가 위험을 느껴서 반응은 하겠지만, 지금의 할아버지처럼 방천화극 들고 폼 잡다가 갑자기 빈틈을 노려 방아쇠를 당기면 고수고 자시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할아버님은 저러면서 무슨 상현 씨에게 정통 무협이 어쩌고 한 건지 원…. 그래도 잘 싸우셔서 다행이네.”
전장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방벽에서 버티는 제국의 군세와 수도로 들이치려는 배화교의 군세.
여전히 머릿수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배화교 쪽이 압도적이나, 이 무대에서 일반 잡졸의 머릿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수’의 숫자고, 천의맹이 합류한 시점에서 병력의 질은 우리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40대에서 50대 정도로 보이는 장년의 남자였는데, 제법 멋들어진 장포를 두른 채 전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엘레나가 말한 인상착의와 유사했기에 혹시나 해서 정신을 집중해서 –
그가.
나를.
본다.
배화교주가 나를 본다.
이름 없는 무명소졸의 목숨이 깃털처럼 가볍게 사그라드는 지옥도, 그 양극단에 선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여자의 눈에 비친 남자는 현대였다면 영화배우를 해도 되었겠다 싶을 만한 대단한 미남이 나이를 먹은 듯했다.
남자의 눈에 비친 여자는 거대한 방벽 위에서 흡사 신을 흉내 내듯, 지상을 내려다보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딱히 독순술을 익히진 않았으나 단순한 움직임이었기에 읽을 수 있었다.
‘안녕하시오?’
다음 순간, 불가해한 악의가 내 목을 틀어쥐었다.
“끄으읍! 흐으읍!”
누군가 내 목을 움켜쥔 채 마구 흔드는 것 같다!
“무, 문주님!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근처의 호위들이 크게 당황하며 날 구해내려 했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인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배화교주 조원홍이 수 km를 격하고 날 죽이려 하고 있음을!
“으어업!”
이번 회차에선 이렇게 죽는 거야?
체감상 3, 4km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는데, 그 거리에서 조원홍을 한번 본 게 죽을 정도의 실수였다고?
이게 무슨 –
“타아아앗!”
한 줄기 노호성이 울려 퍼지며 봄바람 같은 따뜻한 기운이 날 감싸자, 내 몸이 자유를 찾았다.
내 목을 움켜쥐었던 악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자성이 나타난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몸을 추스르게. 교주가 백보격살을 이런 식으로 응용할 줄이야….”
“백보격살? 백 걸음(약 100m) 거리에서 상대를 죽이는 술수인가요?”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시야가 마주치는 게 시전 조건이었던 모양이군.”
“…”
“조화문주의 천리안과 상성이 좋지 않은 힘이로다. 앞으로 내가 없을 때 교주를 바라보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의 무사들이 이미 많이 죽었구나….”
“죄송합니다.”
“무엇이?”
“…”
“그들 스스로 나라를 구하겠다며 칼을 들었는데, 자네가 죄송할 것이 무에 있는가? 혹시 자네가 천의맹의 무인들을 억지로 전장에 밀어 넣었다 착각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지난 8개월. 배화교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천지를 뒤엎기 시작했네. 그리하자 맹의 무인 중 칼을 들고 도산검림에 나아가려는 자가 적지 않았지.”
“문주님께서 막으셨나요?”
“이 제국은 한번 뿌리부터 엎어야 한다고 여겼다. 내 생각이 틀렸나?”
“…”
“심지어 지금도 잘 모르겠구나. 그대가, 소년 황제가 진정 배화교주보다 낫다 할 수 있을지….”
“노력하겠습니다.”
“문주, 내 하나 충고하지.”
“경청하지요.”
“조원홍과 배화교의 저력은 정말이지 끝이 없음이야…. 그들이 무려 800년간 불길한 신의 도움을 받아왔음을 잊지 말게.”
“…”
그 말과 함께 이자성은 떠나갔다.
“후우….”
긴장이 풀리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며칠 전, 상현 씨는 천의맹의 협조를 본인이 얻어냈으면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얻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할아버님은 ‘무림인의 생리’라고 설명했는데, 그런 점도 물론 없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천의맹의 무인들 또한 대부분 광명 제국의 백성들이다.
그 사람들이라 한들 ‘애국심’이 없었겠어?
아무리 황실이 긴 세월 무능함을 보였다 해도 정말 나라가 망하겠다 싶으면 지키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지.
이들을 그동안 천의맹주가 억눌러왔으나 한계가 있었다.
즉, 천의맹은 진작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다.
단지, 그들에게 황실을 용서하고 전장에 뛰어들게 할 명분이 없었을 뿐.
“다음 회차로 가면 승엽이 보고 시작하자마자 천의맹에 친필 사과라도 보내라고 할까?”
*
– 유송이
가인 오빠가 잠들어있다는 천장산 인근, 하남성에 도착한 후 비로소 깨달았다.
천장산은 무슨 동네 뒷산이 아니었다.
에베레스트! 까진 과장이겠지만,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산이다.
당연히 저런 산을 뒤지려면 식량부터 시작해서 준비할 물품이 무척 많은데, 그 모든 것을 구매할 돈이 우리에겐 없었다.
“페로야, 저 수레도 가져와.”
“제발! 수레까지 가져가시면 어찌합니까? 장사 밑천입니다요! 아가씨….”
“… 조, 좋아. 수레는 저쪽 좌판의 수레를 챙길 -”
“흐으윽!”
내 나름대로 ‘공정하게’ 약탈하려 노력했다.
한 사람의 재물을 전부 다 빼앗으면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살겠어?
좌판의 물건을 챙겨가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 밑의 수레까지 싹 뜯어가면, 그 상인은 그냥 죽으라는 말이잖아?
이건 너무 미안했기에 최대한 여러 사람의 재물을 ‘적절히’ 나누어 뜯어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널브러진 채 울기 시작했다.
“… 저, 전부 호텔 때문이야!”
아니, 미리 내 주머니에 금화 은화를 풍족히 넣어뒀으면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될 필요 없잖아!
당황해서 어찌할 바 모르는 나와 달리 미로는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등산에 필요한 물건으로 수레를 꽉 채워라.”
“어르신! 어찌 이리 법도가 -”
“하아아…. 참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백룡의 분노가 날 -”
“채, 채우겠습니다!”
백룡의 분노는 또 뭔 개소리야?
쟤는 강도질에 왜 이리 과몰입한 거야?
슬슬 힘이 빠져서 나도 주저앉고 싶어질 무렵, 아리가 창백한 표정의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
“천장산에서 오랫동안 약초를 캐온 사람이래. 지형을 잘 알 것 같아서 데려왔어.”
“안녕하세요.”
“모,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살려는 줄게. 그런데….”
“예?”
“너, 돈은 좀 있니?”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약탈이 끝날 때쯤, 그나마 한 가지 사실이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최소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진 않았다.
*
저녁 무렵, 천장산을 오르며 아리와 의견을 나누었다.
“어디쯤 있을 것 같아? 지도를 봐도 모르겠는데.”
“글쎄…. 몇 가지 봐둔 위치는 있는데, 확신이 드는 장소는 없어.”
“휴우….”
“그보다 걱정스럽네.”
같은 생각이다. 가인 오빠가 조언을 통해 얻어낸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강자 2인. 암중의 기습을 주의하라고 했지? 그나마 하남성에선 우릴 공격하지 않았어.”
“그들로서도 천장산이 환마의 봉인지라는 사실은 철저히 숨기고 싶을 테니까. 모두가 보는 장소에서 우리와 싸우면서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겠지.”
즉, 이 광대하고 위험천만한 산에서 우릴 죽일 생각이라는 의미다.
“환마펀치!”
— 쿵!
엄청난 소음과 함께 굵직한 나무가 뒤로 쓰러졌다.
“…”
“아, 아리야! 이것 봐! 내 펀치로 나무를 쪼갰어!”
“와~! 미로 대단해!”
한없이 성의 없는 대답이었는데도 미로는 희희낙락하며 주변의 자연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 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거야?”
“방호복을 입어본 건 처음이니까. 본래 어린애들이 특별한 힘을 얻으면 저럴 수 있어.”
“승엽이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미로의 마음이 더 순수한 것 같아.”
“… 우리, 너무 요란하게 움직이는 것 아니야?”
“설마 이제 와서 들킬 걱정 중인 건 아니지?”
성 내부의 시장을 뒤집어엎은 시점에서 산맥에 숨어서 잠입하는 시나리오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다.
사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위풍당당한 ‘백룡신갑’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때, 숫제 가냘프게 들리는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잡이로 데려온 약초꾼이 샛길을 안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흐으음….”
아리가 어딘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