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66)
365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14)
– 이은솔
푸르른 달빛 아래에서 괴이한 건축물이 그 형상을 드러냈다.
건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였음에도, 저 ‘탑’이 통상적인 거주 등 목적으로 지어지지 않았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마리의 뱀이 서로의 몸을 배배 꼬아 쭉 늘어진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잠시 정지.”
할아버님이 함께 오지 못해 하나하나 말로 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물론, 방벽의 병사들을 통제하고 황제 근처에서 무게 잡고 있을 사람도 한 명은 필요했기에 별수 없었다.
어차피 이자성이 대화창을 볼 수 없다는 점도 할아버지가 방벽에 남은 또 한 가지 이유였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아직은 탑 주위의 배화교도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더 움직이면 들킬 겁니다.”
이자성은 조금 감탄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날이 어두운데, 저 먼 곳의 사람이 정녕 그리 또렷하게 보이시는가? 그대의 천리안은 실로 대단하군.”
“…”
“설마하니 여기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하늘 탑이 완공 단계라는 맹주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니까요. 다만,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라는 말이죠.”
“흐음….”
“새롭게 세운 작전은 이해하시죠?”
“나는 조원홍만 막아달라 그 말 아닌가? 하늘 탑은 그대들이 알아서 부술 테니?”
“네.”
“어째 내 일이 제일 쉬워서 미안할 지경이군. 출발하세.”
누가 봐도 제일 어려운 일이 배화교주 조원홍을 막아내는 것인데, 그런 쉬운 일을 맡게 되니 미안하다는 이자성의 말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이쯤 되자 이자성의 이런 태연자약한 태도가 절대고수의 오연함인지 정신병적 허세인지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젠 나아가야 할 때다.
상현 씨가 살짝 팔을 들어서 아까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불길함’을 충전 중이던 동료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제 -”
“손 떼. 내가 귀머거리인줄 알아?”
“…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살벌한 목소리.
불길한 상상을 터트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엘레나의 마음이 뒤틀린 상황이다.
우리야 이젠 익숙해졌지만, 처음 보는 이자성은 혀를 차며 말없이 전방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
망토를 펄럭이는 엘레나가 세상에 저주의 문장을 토해냈다.
“어둠이 내려온다…. 오늘 밤, 모든 이에게 악몽이 내려오리라.”
불온한 색채가 온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다음 순간, 흡사 어린아이가 붓을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처럼 현실이 마구잡이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분명 어두운 밤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파란색 태양이 떠올랐다.
다음엔 지표에서 시퍼런 물감이 뒤섞인 듯한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며 다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마구잡이로 뒤틀리는 감각이 공포심을 자아내었다.
끝없이 정신을 괴롭히는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리를 소환했을 때,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만물이 뒤틀린 악몽의 세상 속에서 – 오로지, 피리만이 모든 변화를 무시한 채 특유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 라아아아!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피리 소리.
그리고….
바닷물이 사라지며 내 발은 다시금 단단한 지면을 밟았다.
푸른 태양이 사라지며 하늘은 다시 흐릿한 달만 떠 있었다.
옆에 있던 상현 씨와 진철이도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리를 흔들어댔다.
“으읏, 역시나 엘레나의 힘은 피아식별을 못 하는군요….”
“맹주는 어디로 간 겁니까?”
천의맹주 이자성, 그는 피리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혼자 달려 나갔다.
“그냥 혼자 갔어.”
“괜찮겠습니까?”
“마도서의 힘을 칼로 썰어냈다는 양반인데, 불길한 상상으로 만들어낸 환각에 당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 가자.”
“… 저는 여기 있을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세요.”
잠깐 사이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엘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을 차리는 대로 성으로 돌아가.”
하늘 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릴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신, 온 세상에서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이 들려왔다.
엘레나는 기도 한 번으로 하늘 탑 인근을 지키던 수백에 달하는 배화교도를 일거에 악몽에 빠트린 것이다.
“엘레나 말 들었지? 최대한 빨리 해결하자.”
*
건장한 체격의 남자, 멀쩡했다면 분명 창을 들고 달려들었을 배화교의 무사가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 지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배화교도들이 죄다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누군가는 신을 찾고, 누군가는 조원홍을 찾았다.
불가사의한 광경을 바라보던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저들이 칼을 들고 자신에게 용맹하게 달려드는 쪽이 나았으리라고.
아까 전의 작전 회의를 떠올린다.
황실에서 준비했다던 하늘 탑 파괴를 위한 수단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다고 한다.
원거리에서 탑을 파괴할 수단이 사라졌으니, 파괴를 위해선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한데, 가까이 다가가자니 탑을 지키는 수백의 배화교도들이 문제다.
조화문주는 이런 잡졸들과 일일이 싸울 수 없다며 두건을 둘러쓴 요술쟁이에게 무어라 지시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요술쟁이의 정체는 배화교의 배신자였다.
이쯤 되자 이자성은 헛웃음이 나왔다.
저쪽에는 사람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 불길한 신의 장손을 소환하겠다는 정신 나간 교단이 있다.
이쪽에는 그 교단의 배신자를 끌어들여 손짓 한 번으로 사특한 요술을 부려대며 권좌를 지키려는 탐학한 정치가들이 있다.
“아아….”
탄식 속에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전쟁은, 애초부터 누가 이겨도 미래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자성은 마음을 굳혔다.
“나는 적어도 사람의 편에 서겠다.”
그때, 벽력같은 노성과 함께 익히 잘 알고 있는 자가 나타났다.
“이자성!”
“교주, 오랜만이구려.”
“네놈! 대체 무슨 술수를 썼느냐? 무슨 수로 600명이 넘는 교도들을 일거에 환상에 빠트려서 -”
“모른다네.”
“그걸 말이라고?”
“… 조원홍. 정말 내가 이런 술수를 썼다고 생각하나? 피차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닌데.”
벼락같이 달려온 장년인, 배화교주 조원홍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좋다. 네놈이 이런 술법에 조예가 있을 리 없으니, 직접 손을 쓰진 않았겠지. 하지만, 술법을 쓰는 자들 옆에서 같이 온 주제에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구차하지 않으냐?”
노인, 이자성은 그 말에 장탄식을 터트렸다.
“허어…. 그 말도 맞소. 내 무슨 변명을 -”
— 파아아아!
다음 순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언뜻 느끼기엔 바람 같으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하면 파도 같았다.
노인이 말년에 얻어낸 한 줄기 깨달음이 알려왔다.
알 수 없는 힘이 세상 전체를 뒤틀고 있노라고.
노인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짐을 느끼며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교주의 눈빛에 흉맹한 살의가 깃들었다.
이윽고, 지상에 선 두 명의 절대고수가 충돌했다.
*
– 이은솔
최후의 섬광이 사라진 후, 우리는 하늘 탑을 파괴할 또 다른 수단에 대해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애초에 창과 칼로 ‘건축물’을 어떻게 부수겠어?
하늘 아래 두려움이 없다는 이자성도 칼로 탑을 썰 수 있냐고 묻자 당황하는 태도를 보였다.
불길한 상상 혹은 별 조각이 답인데, 엘레나의 힘은 하늘 탑을 지키는 배화교도를 무력화하는 데 쓰였으니 남은 것은 별 조각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배화교도들을 지나쳐 하늘 탑에 들어오자마자 진철이는 부숴야 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뭔가 찾았어?”
“모르겠습니다! 뭔가 보이십니까?”
“잘 모르겠는데? 시간 없으니까 뭔가 중요한 위치를 별 조각으로 후려쳐봐!”
“중요한 위치가 대체 어딘데요!”
“나야 모르지.”
“그럼 전 어떻게 압니까? 애초에 신의 손자를 소환하는 술법이라는걸 난생처음 보는데!”
“탑을 아예 무너트려야 하나?”
듣기만 해도 서로의 혈압이 동시에 오르는 멍청한 대화가 지나갔다.
애초에 둘 다 ‘술법’같은 것에 대해선 문외한이니, 부수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함은 당연하다.
이자성은 날 무슨 사악한 마술의 대종사로 여기기 시작한 것 같지만.
그때, 상현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 이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가자 시퍼렇게 빛나는 문양이 벽에 양각된 장소가 있었다.
또, 그 주변엔 일곱이나 되는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기에 무언가 중요한 장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인가?”
“어이쿠!”
— 서걱!
그때, 먼저 들어와 있던 상현 씨가 재빨리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끌었다.
간발의 차이로 시퍼런 날붙이가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멈추어라.”
차가운 인상, 190cm는 될법한 장신, 서역의 피가 섞인 이목구비를 가진 젊은 남성.
배화교의 13 사령 중 한 사람이다. 별호는 –
“귀혼마도!”
“… 황제의 조언자께서 날 알아보니 영광으로 알겠소. 그 고운 얼굴, 곱게 베어 땅에 묻으며 술 한잔은 따라주지.”
“너, 말 제법 잘하는구나?”
잠깐 사이에 뒤쪽에서도 챙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철이도 누군가와 맞붙기 시작한 것이다.
엘레나의 환각이 전혀 통하지 않았나?
탑에 오기까지 저항이 없던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만, 이들은 일반 배화교도보다 훨씬 강한 이들이기에 환각에서 더 빨리 깨어난 것이다.
상현 씨는 시간 끌 생각이 없다는 듯, 번개같이 철창을 뻗었다.
“철혼! 그대의 명성을 -”
— 탕!
그리고 귀혼마도의 머리가 터졌다.
나는 순간 말문을 잃었다.
“… 바, 방금 창 들고 싸우려는 것 아니었어요?”
“묵성 그 친구가 하는 걸 봤는데, 창 들고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총 꺼내서 쏘는 게 아주 잘 통합니다.”
“총은 할아버지가 빌려줬어요?”
“그렇지요. 여기 기다리십시오.”
곧, 뒤쪽에서도 총소리가 두어 번 울리더니 어딘가 허무한 표정의 진철이가 나타났다.
“고수고 자시고 권총 한 자루만도 못하구나….”
“교주에겐 안 통할 겁니다. 호신강기? 뭐 그런 게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진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퍼런 문양 앞으로 이동했다.
“다들 뒤로 좀 물러서시길.”
— 파아아!
피부를 짓누르는 듯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세상 전체에 악의를 담은 듯한 별 조각의 힘이, 하늘 탑의 술식을 으스러트렸다.
…
하늘에서 거룩한 자, 영원히 타오르는 청염의 왕자가 세 번 울었다.
첫 번째 울음은 필멸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하루살이 같은 삶을 동정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울음은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올곧은 선의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울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앞에 놓인 비참한 운명을 예지하였기 때문이다.
환영을 보았다.
강림이 좌절된 청염의 왕자가 베푼 마지막 자비를 보았다.
나 자신을 본다.
날카로운 칼에 의해 폐를 꿰뚫리고, 거칠게 뽑힌 마안이 입에 틀어박힌 채 죽어가는 나를 본다.
편안한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해 그저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나를 본다.
…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상현 씨와 진철이가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조금 전, 우리는 ‘각자의 죽음’을 보았다.
“… 혹시 -”
“그만.”
“…”
“카르다모스가 우릴 흔들기 위해 이상한 환영을 보여준 것 같아.”
두 사람은 답하지 않았다.
나 또한내 입에서 나온 말을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