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69)
368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17)
– 박승엽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내려다본다.
온 사방에 가득한 꼬챙이 끝에서는 사람이 생선처럼 꿰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더 기괴했다.
악마의 장난감이 될 것을 알면서도, 방벽에서 거하던 사람들은 저 스스로 쇠창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돼지가 자기 손으로 몸에 향신료를 바른 다음 프라이팬 위로 올라가는 모양새다.
이처럼, 사람들이 환마에게 저항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꺾이기까지 얼마나 잔혹한 일이 있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져서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눈 떠.”
“…”
“내가 직접 뜨게 해줄까? 바늘로 꿰어서?”
“아, 아니요!”
“명색이 황제인데, 네 백성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봐야 할 것 아니야?”
“혹시 복수를 원하시는 건가요? 서, 선대 황제가 당신을 봉인하는 일에 참여해서?”
“으음….”
“제, 제, 제 -”
“너, 자꾸 말더듬이처럼 굴면 주둥이를 찢어버릴지도 몰라.”
“… 제 아버지가 미우시다면, 무덤을 부수고 시체를 태워보시는 건 어때요?”
“이야~! 그래도 니 애비 아니냐? 부관참시하라는 말을 대놓고 하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선황은 분명 지옥에서 불타고 있을 -”
“미안한데, 난 사후세계 이런 것 믿지 않는단다. 배화교의 신? 그냥 엄청나게 강한 마귀일 뿐이지.”
“…”
“죽은 황제 새끼를 내가 어떻게 하겠냐? 그놈은 포기했어. 죽음으로 내 손에서 벗어난 셈이지. 그런데, 네가 남았네?”
“히끅!”
“걱정하지 말거라. 넌 내 손으로 꽉 붙들어둘 테니까. 아주…. 오랫동안. 나와 즐겁게 지내자. 그러니 -”
숨이 막혀서 차라리 기절하길 바란 그 순간, 갑자기 환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섰다.
“오호? 은인이 오셨네?”
은인?
“그 빌어먹을 감옥, 천장산에서 날 풀어주신 분이 오셨어!”
어떤 개새끼가 환마를 풀어준 거야?
환마는 빙그레 웃으며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이제 쉬고 싶었다.
하늘에 신이 있다면, 이젠 제발 휴식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랬기에 하늘에서 온 세상을 불태울 듯한 황금색 벼락이 그 형상을 드러내었을 때,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내게 편안히 쉴 시간이 왔음을 알았으므로….
이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콰르릉!
*
바늘이 자정을 향하는 순간, 소녀는 깨달았다.
시간대여기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불러내는 일은 타인을 불러내는 일과 근원적으로 다름을 알았다.
오래전의 육체, 정신, 영혼, 기억, 힘 – 혹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인 총체가 현재를 덮어씌운다.
다시금 순수함을 찾은 소녀는, 자신에게 있었던 혹은 앞으로 벌어질 또 하나의 미래를 보았다.
크리스마스의 악몽 속에서 친구들을 잃은 채 관리국에 들어간 자신, 요원이 되어 알게 된 세상의 끝없는 비밀들, 그 과정에서 내려온 무수한 결단을 보았다.
시간을 역행해 돌아온 소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순수한 가능성을 보았다.
친구들을 잃기 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호텔에 합류한 자신, ‘딸’의 존재와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어낸 동료들을 보았다.
그 끝에서 미로가 깨어났다.
동시에 신비로운 환영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로브를 쓴 여인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미로를 짓눌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지금의 난 다른 축복을 받은 모양이네요. 하지만 시간대여기에 저 자신을 기록하던 때, 내 축복은 정의였죠.”
“감히 그 입에 ‘정의’를 담지 말라. 그것의 독선이요, 폭력이니라.”
“이 토론을 꽤 여러 번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번 더 하실 셈인가요?”
“… 아아.”
하늘에서 황금의 물결이 내려왔다.
미로는 그 힘을 익숙하다고 여기는 동시에 생경하다고 여겼다.
어설프게 뒤섞인 두 소녀 중 한 명에겐 익숙했으나 다른 한 명에겐 처음 겪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제1 사도의 힘이냐? 분명히 며칠 전에 내가 죽였는데! 대체 뭐 하는 -”
“… 나는.”
“뭐?”
“너와 같은 종자를 무수히 파괴해왔다.”
환마는 강렬한 압박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미로의 정의가, 황금의 물결이 마치 파도처럼 하늘로 모여든다.
그때, 환마는 긴 세월 배화교의 제1 사도와 충돌하며 깨우친 ‘가장 훌륭한 대응법’을 시행했다.
즉시 뒤로 움직여 방벽의 무고한 이들 사이로 숨어든 것이다.
단순히 조종하던 몸 하나를 숨긴 것이 아니라 정신체 자체를 쪼개어 공포에 떠는 양민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미로가 생각하기에 이는 꽤 훌륭한 대응법이었다.
예컨대 엘레나라면,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해칠 수 없었을 테니까.
엘레나가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슈퍼히어로라 해도 이 상황에선 손발이 꽁꽁 묶였을지 모른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들의 정의는 곧 보편타당한 인류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열명의 범죄자를 놓칠지언정, 한 명의 무고한 자를 벌하지 말라.’
이것이 인류가 오랜 세월 고민한 끝에 도달한 하나의 이상향이 아니던가.
…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정의’가 있다.
‘열 명의 무고한 자를 불태워서라도, 한 명의 타락한 자를 놓치지 말라.’
무지한 자들은 이 논리를 정의가 아닌 광기와 폭력이라 여기겠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논리는 인류에게 매우 익숙한 논리이기까지 하다.
다만, 법이 아닌 ‘방역’의 논리일 따름.
특정 지역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그 지역의 돼지와 소는 전부 죽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개별 개체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감염당했는지 아닌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가축을 살리기 위해서, 나아가서 인류를 위해서 그들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로가 생각하기에 관리국의 신념 또한 이와 같았다.
사람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악마, 유령, 괴물 모두 합쳐 ‘혼돈 재해’란 일종의 대역병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
충성의 대상은 개별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이기에.
그랬기에 미로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방벽의 3만 7,892명의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
벼락이 내리쳤다.
단 일격.
미로가 만들어낸 심판의 힘이 방벽 전체를 으스러트렸다.
이윽고 방벽 전체에 거대한 침묵이 내려왔다.
쇠창살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꼬챙이에 꿰어서 고통 속에 신음하던 사람들도, 장대에 매달려 공포에 떨던 어린 황제도.
모두에게 공평한 안식이 내려진 것이다.
다음 순간, 침묵이 깨졌다.
가루가 된 잔해들 사이를 뚫고 시퍼런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인했다.
심지어 몸 전체에 입은 화상이 실시간으로 재생 중이기까지 했다.
“그건 차진철의 몸? 내구성이 대단하네.”
또한, 차진철의 몸을 방패 삼아 살아남은 이가 셋이나 있었다.
그들 모두는 환마의 인형이었으니, 이를 진정한 의미로 ‘살아남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지만.
“이! 이! 미, 미친 새끼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줄 알고는 있는 거냐?”
“필요한 만큼.”
그 태연한 대답에 환마는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었다.
“아니…. 너, 너, 너 -”
“희생을 두려워해서야 인류를 지킬 수 없지.”
“야 이 새끼야! 내가 수백 년 동안 죽인 사람 숫자를 다 합쳐도 지금 네가 죽인 숫자만 못하다!”
“사람의 목숨은 깃털보다 가벼운 법….”
“제발 인류애를 좀 가지라고 이 쌍놈아!”
문득, 미로는 자신에게 더 이상 정의의 힘이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벼락을 만들어내며 후원자가 내린 힘을 전부 소진했기 때문이리라.
또한, 조금 전의 일로 후원자가 내게 질려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정의의 힘은 미로가 가진 힘 중 일부일 뿐이었으므로.
혈류(血流)가 가속한다.
끓어오르는 ‘오래된 피’의 힘이 그녀의 몸에 초인적인 물리력을 부여했다.
다음으로 칠흑의 창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필멸의 창’이 깨어나자마자 생자(生者)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 시간대여기의 바늘이 기묘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환마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이 그의 기나긴 삶의 마침표일지도 모른다고.
다음 순간, 미로가 대치를 박차며 날아올랐다.
환마는 반대로 인형들 전체를 뒤로 물리며 양손을 합장했다.
총 세 개체의 인형이 불길한 일언을 중얼거리며 수인을 맺자 그들의 육신이 점토처럼 일그러지며 하나로 뭉쳤다.
세 개의 머리, 6개의 팔과 6개의 다리.
이미 인간이라기보단 인세에 다시없을 괴물, 즉 환마가 불러낸 아수라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아수라가 정면에서 미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발맞춰 환마는 차진철의 몸을 움직여 미로의 후방을 점했다.
환마는 이 공세에 자신이 있었다.
절반 이상의 힘을 털어 넣어 불러낸 아수라(阿修羅)의 위세는 그 이자성이나 조원홍조차 감당할 수 없는 천고의 마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방을 점한 북두 대장군은, 환마가 장담컨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육신을 타고난 무인이었으니까.
“그라아아아!”
아수라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인간이라면, 설령 고수라 해도 고막이 터지고 각막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위력!
하지만, 환마는 눈앞의 기현상에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갑자기 미로의 몸이 어딘가 흐릿해진다 싶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사자후에서 벗어난 것.
아수라는 더욱 큰 분노를 미로에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순 –
아수라의 여섯 손이 미로의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단박에 점했다.
동시에 북두 대장군의 손에 들린 거대한 창이 그녀의 후퇴조차 막았다.
아수라의 이러한 공세는 설령 천하제일 고수라 해도 인간의 신체 구조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었으며, 막아낼 방법도 없었다.
설령 근접 박투의 일인자라는 이자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이자성을 쓰러트린 본인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환마의 시야에서 벗어난 장소, 미로의 품속에 담겨있던 회중시계의 초침이 흔들렸다.
그리하자 미로의 몸이 ‘그 시간대에서’ 사라졌다.
아수라의 여섯 무기와 북두 대장군의 창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천하무적의 고수가 휘두르는 검이라 한들 존재하지 않는 적을 베어낼 도리는 없는 법.
사자후를 피해낸 방식과 똑같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움직임, 아니, 이것을 ‘움직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이 무슨 ‘보법’이나 ‘무공’이겠는가?
차라리 상대가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아수라의 거구를 단박에 날렸거나, 터무니없는 내구력으로 아수라의 공세를 몸으로 버텨내었다면 더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대체 이게 무슨 힘이냐!”
그랬기에 환마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미로는 대답 대신 칠흑의 창을 뻗었다.
회오리치는 무한한 악의.
살아있는 만물에 대한 무한한 증오가 아수라의 거체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아수라의 입에서 어린아이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진다.
세 명의 제물과 환마가 수천 년간 쌓아온 힘의 태반이 응축된 마수가 흡사, 끓는 물에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크으읍!”
찢어진다.
무너진다.
소멸한다.
조금 전, 저 불길한 창이 파괴한 것은 아수라라는 마물과 거기에 담긴 환마의 힘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
아수라에 깃들어 있던 환마의 영혼 그 자체, 나아가서 불멸성의 근원 중 일부.
환마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 자신조차 망각했던, 아니 망각했다고 착각했던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다.
그 또한 미천한 필멸자였던 시절의 감정.
공포와 절망.
고통과 슬픔.
환마의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 때 –
차진철의 육신이 뒤로 돌았다.
— 쾅!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차진철의 거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
미로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상대가 모든 걸 내던지고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 새끼가 진짜! 근성 어디 갔어! 절대고수의 위엄 어디 갔냐고!”
…
환마는, 긴 세월 잊고 있던 나약했던 시기의 기억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나에게 그런 건 원래 없다!’
긴 세월 강호에서 암약하며 위험한 순간이 없었겠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부끄러움 없이 도주하는 것이야말로 환마의 생존비결!
‘단지, 지금처럼 강해진 후엔 도주할 일 자체가 드물었을 뿐!’
추격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