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70)
369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18)
“… 여기까지인가.”
미로가 추격을 포기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실적인 이유였는데, 차진철의 몸을 빌린 환마의 이동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또, 기다리다 보면 최소한 탈출 판정은 나올 것 같았다.
조금 전에 파악한 환마의 성향을 고려할 때, 제 발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작다.
또 다른 위협인 배화교주 역시 수도에서 벌어진 일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205호 ‘따위에서’ 미로 자신의 시간을 전부 소모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1시간은, 가장 중요한 순간을 위해 남겨둔 안배다.
미로가 마음을 굳힐 무렵, 방벽의 잔해 틈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가?”
노인의 말소리. 한번 들어본 목소리였다.
“이자성?”
“… 날 아시는가?”
“여태 어떻게 살아있었지?”
미로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가 노인의 상세를 살폈다.
팔다리만 잘린 것이 아니라 전신에 고문당한 흔적이 가득했는데, 아무래도 환마가 낸 상처 같았다.
여기에 자신이 떨어트린 번개로 인한 전신 화상까지.
대체 무슨 수로 살아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환마가 널 죽이지 않았구나. 황제를 마지막까지 죽이지 않은 것처럼 괴롭히기 위함이었나?”
“…”
“내 벼락에선 어떻게 살아났어? 최후의 순간을 위한 한 수라도 있던 거야?”
노인은 대답 대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성정은 예전과 같군.”
“그? 환마?”
“예전에도 그랬지. 평소엔 잔인한 척, 교활한 척, 위대한 척 다 하다가….”
“…”
“진정으로 위기에 처하면 진면목을 드러낸다오. 한없이 추하고 나약한 존재. 영원히 성장할 수 없는 잔혹한 어린아이. 그것이 환마의 실체지.”
미로는 가인이 정신을 되찾는다면 환마를 감당할 수 있다던 조언의 의미를 깨달았다.
물리적, 마법적인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강함의 문제다.
“내가, 한 단계 나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했소.”
죽어가는 노인의 목소리에선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곧 다가올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한때는 그 마인의 길이 답이라 여겼지.”
“환마의 길?”
“세속의 이치, 법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얻는 것.”
“내게 물어보는 것이라면, 난 그런 식으로 강해지진 않았는데.”
“또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자성은 미로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깨달음을 털어놓았다.
“불멸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뭐?”
자신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미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10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노인의 깨달음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생이….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이번엔 포기해도 되니까. 그렇기에 불멸자는 매번 비겁해지고 추해진다.”
“환마처럼?”
“끝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을 진실로 위대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이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 한 번의 기회가 끝나는 그 한순간…. 그 찰나에 일생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곧 궁극이리라.”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
미로는, 이 노인의 집념에 순수한 의미에서 감탄했다.
그는 대화가 시작할 때부터 사지가 뜯겨 있었고, 벼락에 의한 전신 화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절대고수로서 숨겨둔 마지막 한 수와 약간의 운이 더해져 어찌어찌 아직 살아남은 듯했으나, 그뿐.
그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무의 궁극’에 대해 고민한 것.
극단에 치달은 무극을 향한 집념, 혹은 광기의 결과물이다.
이런 것이 ‘재능’혹은 ‘자질’이라면, 노인은 분명 천하제일의 자질을 품고 태어났으리라.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껍질을 깨트리지 못했을 뿐이다.
미로는 가볍게 고개를 털며 죽은 자에 대한 상념을 털어낸 후, 자그마한 종잇조각에 다시금 무력해질 자신을 위한 약간의 기록을 남겼다.
… 마지막 문장에서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섣불리 적을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고민하기엔,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그녀는 한숨 한 번으로 손을 내려놓았다.
“모르겠다. 이 정도는 너네 알아서 해.”
— 철컹!
회중시계의 바늘이 자정에서 벗어났다.
한없이 반신에 가까워졌던 자신이 다시금 무력한 소녀로 돌아갔다.
*
– 미로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 폐허 속의 나를 발견했다.
무슨 대지진이 일어나서 도시 전체를 무너트린 듯했다.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던 중, 손에 들린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뭐, 뭐야?”
종이에는 ‘내’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각.
나는 고통스러웠던 205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78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복도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복도에서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 해결? 누군가 벌써 유산을 얻었다던가!
…
아니네.
한두 번 깨어나 본 게 아니라 이런 건 딱 보면 안다.
해결이 아니라 탈출이고, 그 과정이 그리 시원시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몇몇 사람들, 예컨대 은솔 누나나 승엽이는 토악질까지 하고 있었다.
“어, 언니! 괜찮아요?”
“승엽이 너, 일단 가서 목욕이나 할까?”
다행히 두 사람이 진정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해도, 일단 저주의 방에서 나온다면 흐릿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명료했던 기억이 불투명해지고, 때로는 중요한 기억도 잊곤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나 이런 배려가 없다면 모두의 정신이 호텔에서 견뎌내지 못했겠지.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은솔 누나와 승엽이를 보살피는 시점, 미로는 다소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혼자 가만히 서서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것이 무슨 문장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해?”
“207호…. 30분…. 20분….”
“뭐?”
“이자성…. 이자성…. 무슨 말?”
“뭐하니?”
“으아앗!”
미로는 혼자 놀라더니, 날 거칠게 밀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자 미로가 어딘가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이따가 설명해줄게!”
미로의 설명해준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였다.
모두가 목욕재계하고 다과 테이블로 모인 후, 미로는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다들 이해하셨나요!”
미로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활짝 미소 지었다.
나는 순수한 의미에서 감탄했다.
미로의 설명 중 꽤 많은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기 때문이다.
날 깨우는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던 사고가 터져서 엄청난 위기가 발생했다.
이 상황에서, 미로는 주저앉아 절망하는 대신 마지막 수를 꺼내 모두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눈앞의 소녀는 여전히 어딘가 미숙했고, 영리하다 싶으면서도 어린아이 같았지만….
조금은 믿을만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잘했어!”
활짝 웃으며 미로를 안아주는 은솔 누나를 바라보며 모두가 가볍게 웃었다.
본격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석해볼 시간이다.
205호의 두 번째 시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티는 둘로 쪼개져서 한쪽은 방벽에서 배화교를 막고, 다른 쪽은 내 봉인을 풀기 위해 이동했다.
제국 측 세력은 다행히 천의맹을 끌어들여 배화교와의 일전에서 승리했으며, 위기에 처한 배화교는 ‘하늘 탑’이라는 건축물을 지어 신적인 존재의 강림을 꾀했다.
이걸 제국 측 세력이 여차여차해서 부쉈고, 마침내 배화교를 핀치에 몰아넣은 시점.
난데없이 환마가 난입해서 동료들을 몰살했단다.
얼마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는지, 동료 중 상당수는 자신이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예컨대, 묵성 할아버지의 기억은 방벽 밖으로 나가 정체불명의 무림 고수와 만난 지점에서 끊겨 있었다.
비슷하게 진철 형은 길 가다가 선생님과 눈 한번 마주친 게 기억의 끝이었고, 의사 선생님도 딱 그 수준이었다.
이건 뭐, 길 가다가 트럭에 치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사고가 벌어진 까닭은 단순했다.
미로는 날 깨우기 위해 의사 선생님을 소환했고, 선생님은 지하 어딘가를 향해 적당히 최후의 섬광을 쐈다.
그런데.
산 어딘가를 향해 적당히 쏜 레이저가 ‘우연히’ 나를 정확히 꿰뚫어서 죽였단다.
덕분에 환마는 ‘나’라는 억제기조차 풀린 채 완벽히 깨어났다는 이야기다.
내 추측인데, 솔직히 이런 상황까지 호텔에서 안배하진 않은 것 같았다.
워낙 황당한 소리였기에 선생님이 입을 쩍 벌렸다.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어? 어…?”
미로가 당황하자 선생님도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의 톤을 낮추었다.
“크흠. 미로 양, 추궁하는 게 아니라, 너무 황당한 확률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딱 내 생각이다.
듣자 하니 천장산의 크기가 엄청나다는데, 그런 거대한 산 지하 어딘가에 내가 파묻혀있다.
그냥 적당히 감으로 레이저를 쐈는데 정확히 날 꿰뚫었다고?
산의 크기에 비하면 내 덩치라는 건 모래알 수준일 텐데?
상대가 총을 쏘자 나도 총을 쏴서 총알로 총알을 맞히는 수준의 난이도가 아닐까?
이런 확률에 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은 것인지, 미로는 크게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런가요?”
그때, 아리가 가볍게 탁자를 쳤다.
“미로, 그때의 기억을 잘 떠올려 봐.”
“기, 기억?”
“정말 ‘레이저’가 가인이를 꿰뚫었어?”
“무슨 말이야?”
“나도 최후의 섬광을 여러 번 쏴보았는데, 위력이 장난 아니야. 사람 몸에 닿았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기체로 만들어버릴 위력이지.”
미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가인이의 손 따위가 남을 리 없다?”
“그거지.”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았으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한 미로의 기억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국 터무니없을 정도로 운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으음…. 레이저를 너무 정확히 쏴서 죄송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모두에게 사과하는 선생님을 제지했다.
정말 운이 없어서 레이저가 내 몸을 꿰뚫었다면, 재수가 더럽게 없었을 뿐인데 사과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뭘~! 원래 동료 한두 번은 죽여봐야 호텔 경험 제대로 쌓았다 할 수 있는 거야.”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리의 말에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이 주제는 마무리되었다.
다음으로 나온 이야기는 모두가 궁금해한 주제, ‘과거의 미로’다.
애초에 시간대여기의 ‘자정’에 ‘과거의 미로’가 저장되어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모두에게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런 심각한 정보를 왜 숨겼냐고 미로에게 물어보려 했다.
옆에 있던 누나가 가볍게 내 손을 잡았다.
“…”
“본인도 불안했겠지.”
“… 그렇겠네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무언가 말을 할까 말까 하는 표정만 지었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로는 그냥 고개 한번 숙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진철 형이 픽 웃으며 말했다.
“뭐, 이제라도 말해줘서 다행이네. 어찌 됐든 그 힘으로 모두를 살렸으니 다행이고.”
“고마워요~!”
상황이 풀어지자 미로가 재빨리 손을 들어서 화이트보드에 무언가 적었다.
1.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다 보면 탈출이 뜰 것.
2. 자정의 시간을 아껴라. 207호에서 30분 이상 필요. 이미 20분 가까이 소모.
3. 이자성을.
이자성을.
여기까지 적고 미로는 손을 뗐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리가 질문했다.
“이건 뭐야? 혹시 초사이언 미로가 남긴 기록?”
“초사이언이 뭐야?”
옆에서 진철 형과 할아버지가 정신없이 킥킥거리던 중, 미로는 멍한 표정으로 아리를 바라보았다.
은솔 누나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엄청 강한 미로라는 뜻이야. 그냥 자정의 미로라고 하자. 자정의 미로가 남긴 기록 맞지?”
“네.”
“이자성을. 에서 끊은 건 뭐야? 혹시 까먹었 -”
“아, 아니에요!”
미로가 단호히 부정했다.
“애초에 종이에 적힌 내용이 여기서 끊겨 있었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