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72)
371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20)
– 이은솔
205호의 세 번째 시도.
황궁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계획을 되새겼다.
어제 회의에서도 나온 말인데, 제국 파티의 진행은 큰 틀의 문제는 없었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황실과 천의맹 사이에 있었던 해묵은 원한에 대해 사과하고, 대의를 위해 협력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두 번째 시도 때는 이자성의 제자인 상현 씨가 직접 갔었는데, 이번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기로 했다.
다름 아닌 황제의 친필 사과다.
“폐하, 그 부분은 표현을 이렇게 고치시지요.”
황제가 적고 있는 ‘사과문’ 혹은 ‘반성문’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자 불평이 들려왔다.
“이거 은근히 짜증 나네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거 연좌제 아니에요?”
옆에 있던 상현 씨가 답했다.
“폐하. 205호에선 연좌제가 실제로 합법입니다.”
“…”
“아버지 덕에 황제 자리에 앉았으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과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풋! 아, 죄송합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황제가 사과문을 쓰는 사이에 어제 가인이의 조언을 통해 얻은 정보 중 하나를 떠올렸다.
“‘이자성의 사고방식은 그대들과 다름을 명심하라’.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현 씨가 답했다.
“당연한 말 아닙니까? 이자성은 말 그대로 옛날 사람이지요.”
“당연한 말을 우리에게 해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 이것 아닙니까? 자식이 아비의 죄를 대신 사죄하는 상황 자체가 전근대적인 것 같습니다만….”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장문의 사과문을 쓰고 있던 황제가 답했다.
“방금 그 말을 듣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이디어?”
…
황제의 의견을 들은 나와 상현 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현 씨는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답했다.
“폐, 폐, 폐하. 너무 과합니다. 그런 짓을 하면 폐하께서 장난치려 든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나도 재빨리 답했다.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게 뻔합니다!”
황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조화문주, 나라 망하기 직전이니 조정의 신하들은 다 개무시해도 됩니다.”
“그게 뭔 -”
“그리고, 내가 1회차 때 보니까 조정의 신하들 다 쓸데없어요. 그놈들 나라 망한다 싶으니까 황제인 나보다도 더 먼저 도망가던데.”
“…”
“이거 통한다니까요? 예사롭지 않은 직감이 이게 답이라고 외치고 있어요.”
승엽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직감.’
보통 사람이 하면 그냥 헛소리이기 쉬운 단어이나 행운의 축복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황제의 친필 사과문이 완성되었다.
*
– 김상현
마차에서 내려 천의맹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고민했다.
이게 맞나? 말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승엽 군이, 황제가 너무 즉흥적인 판단을 내린 것 아닌가?
“후우우….”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행은 예전과 유사하다. 사방에 천의맹 무인들이 늘어섰고,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곧 이자성이 몰래 도착해 차군악에게 내 실력을 확인하라 지시할 –
… 다르다.
이자성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모습을 드러낸 채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 -”
“잡소리 그만하고, 이게 무슨 장난인지 설명하라.”
“…”
“맹 바깥의 마차.”
“제가 타고 온 마차입니다.”
“장난 그만두게. 내부에 몇사람 더 있음을 알고 있으니.”
“… 우선, 이 편지를 읽으시지요.”
조심스럽게,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황제의 친필 사과문을 전달했다.
이자성이 사과문을 내던지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적으셨나?”
“그렇습니다.”
황제의 친필 서한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황제라는 단어에 얼마나 대단한 무게감이 담겨있는지 새삼스레 깨우쳤다.
주의 깊게 편지를 읽던 이자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침내, 황제가 즉흥적으로 추가한 ‘그 문구’를 본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매, 맹주님.”
“상현아, 네가 진정 날 우롱할 셈이냐?”
어찌나 흥분했는지 직책과 별호를 무시하고 내 이름이 바로 튀어나왔다.
주변의 천의맹 무인들 또한 이자성의 분노를 느끼고 같이 투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살벌한 분위기.
아까 전 황제가 아이디어를 꺼내던 순간을 되새겼다.
*
사실, 황제가 맨 처음 낸 아이디어는 더욱 황당무계했다.
“저, 이제부터 이자성 손자 하면 안 될까요?”
“??? 농담을 무슨 그렇게 -”
“아니, 생각해봐요. 원래 옛날엔 왕자는 본인을 낳은 생모 말고 후궁들도 어머니라고 했잖아요?”
“…”
“그러니까, 죽은 이자성의 딸도 관점에 따라선 제 어머니인 거죠. 그러니 사과문에 할아버지라고 적으면 절 조금 더 귀엽게 -”
“제발….”
은솔은 양손으로 얼굴을 싸맨 채 중얼거렸다.
“폐하. 아니 승엽아. 그런 건 이자성의 딸과 네 사이가 좋을 때나 의미 있는 거지!”
“예?”
“네가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됐다는 게 무슨 의미야? 황궁 암투의 최종 승자가 네 어머니라는 소리라고!”
“그, 그런가요?”
“네 어머니가 높은 확률로 이자성의 딸을 죽였다는 의미인데, 그 아들인 네가 그런 말 하면 이자성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자성에게 일검참황(一劍斬皇)같은 무시무시한 별호가 생길지도 모른다.
은솔의 지적에도 황제는 쉽게 굴하지 않고 다음 아이디어를 꺼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자성의 제자 하는 건 어때요?”
“제발, 사과문이나 열심히 -”
“아니 누나,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황제에게도 스승은 있잖아요? 천하제일검이면 황제의 스승 할 자격이 충분한 것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이자성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려는 생각입니까?”
“그런 것도 있죠. 그리고….”
“그리고?”
“겨, 겸사겸사!”
“겸사겸사?”
“… 무공을 배우면 좋지 않을까요?”
“…”
아마도 이게 승엽 군의 진짜 속마음이겠지.
평소 자신의 약함을 절감했을 터다.
이자성에게 무언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리인데, 이해는 했다.
무공은 초능력과 달리 배울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자성이 이걸 받아들일지가 문제였을 뿐.
*
날카로운 바늘 수백 가닥이 내 피부를 찔러댄다.
이자성이 내뿜는 무형의 기운이 주변을 장악했다는 것.
“장난이 아니라 하니 진지하게 묻겠다. 정말 황제가 내 제자가 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황제에게도 스승이 있는 법 아닙니까?”
비로소 상황을 눈치챈 천의맹 무인들이 입을 쩍 벌리기 시작했다.
“태사(太師)를 말하는가…. 그 관직이 무림인에게 내려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이제 스승님이 그 첫 번째가 되시는 겁니다.”
“…”
“스승님께서 태사(太師)의 자리에 앉으심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황실과 천의맹의 갈등을 영원히 봉합하는 그 시작이 될 것이며 -”
“그 갈등을 봉합하는 더 쉬운 길이 있지.”
“예?”
이자성의 싸늘한 눈동자가 날 향했다.
“황실이 무너지면 된다. 조원홍이 제국을 집어삼킨다 한들, 수도의 모든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겠느냐? 맹을 몰살하려 들까?”
“그, 그것은 -”
“나는 조원홍을 잘 안다. 그는 내게 말하겠지. 새롭게 태어날 제국에서 천의맹의 위치를 보장할 테니, 얌전히 있으라고.”
숨이 탁 막혔다.
*
– 박승엽
마차에서 기다리던 중, 대화창이 깜빡였다.
김상현 : 망함!
선생님의 메시지는 딱 두 글자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까 전 합류해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그 앞에 앉아있던 은솔 누나의 표정이 동시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으아앗! 여, 역시 쓸데없는 소리를 사과문에 집어넣은 것 아닌가?”
“이걸 어쩌냐? 그냥 저번처럼 상현이가 가서 비무 한번 하면 되었을 일인데!”
“처음부터 좀 아니었어…. 갑자기 제자 하겠다? 어제까지 원수였는데 그게 말이 돼?”
“이자성 저놈에겐 그냥 무림인답게 칼로 보여주는 게 답이라 하지 않았냐! 괜히 정치적인 술수를 쓰니까 -”
요란을 떠는 두 사람 사이에서 생각했다.
지금이다.
지금, 내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 상황을 이렇게 끝낸다면, 이자성이 자신을 놀린 것으로 받아들이며 상황이 종료된다면.
세 번째 시도 자체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서 서방 제국으로 도망갈 준비나 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 덜컥!
“엇? 폐하 – 승엽아?”
“두 분 다 마차에 있으세요!”
마차에서 내리며 손을 뻗어 시야 한쪽의 홀로그램을 터치했다.
[천운 발동!] [우주의 기운이 당신과 함께합니다.]주변 사람을 밀쳐내며 선생님과 이자성이 대화하는 장내로 달려갔다.
불길한, 아주 불길한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게 조원홍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있느냐? 구태여 타락한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어 수렁에 빠질 이유가 있냐는 -”
이자성의 눈이 내게 향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지금부터 내가 할 행동이 그에게 통하기를 간절히 –
아니다. 기도가 아니야.
행운의 원리는 내가 소망하고 후원자가 이루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주사위를 던지며 6이 나오길 기도하고 후원자가 6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던지면 당연히 6이라는 믿음.
이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야말로 그 본질.
그러므로 행운이란 정신병적인 자기 확신이다.
의심하지 않았다.
고민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자성.”
“…”
“내 태사가 되어줘.”
“직접 와서 말한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뭘까?”
“내, 황실의 수작을 모를 줄 알고 -”
“황실과 천의맹의 우호적 관계? 배화교와의 일전을 앞두고 당신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천의맹이 제국과 운명을 같이하게 만들려고?”
“…”
“다 필요 없어! 내가 온 이유는 그런 게 아니니까! 솔직히 이놈의 제국 망하든 말든 상관없어!”
진심이다.
정말로 이놈의 제국 망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어.
내 진심은, 내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순수했다.
“난 무공을 배우고 싶어. 천하제일검의 제자가 되고 싶어!”
나는 정말 무공을 배워서 강해지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제국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잡소리보다 10배는 중요했다.
“항상 생각했어. 내가, 내가 너무 약하다고. 하다못해 달리기라도 좀 빨라질 수 없을까? 주먹질이라도 더 세게 할 수 없을까?”
“…”
“하다못해 마주하는 적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없을까.”
“당당함이라….”
이자성이 날 내려다보았다.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경지에 오른 고수의 눈이 날 살폈다.
기묘하게도 그 눈은,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는 듯했다.
“그러니 이자성, 아니 스승님!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세요.”
무협지에서 제자가 스승을 모실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절 아홉 번인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 –
무언가,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날 멈춰 세웠다.
“…”
“…”
천의맹의 공터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어찌할 바 모른 채 당황하던 그 순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네.”
“정말 무공을 익히고 싶으십니까?”
“그럼요.”
“제 가르침은 아주 엄격합니다.”
“당연하죠.”
“폐하 또래의 어린아이들을 1,000번은 울려 봤습니다.”
헉!
“… 괘, 괜찮아요.”
“신기한 기분이군요.”
“네?”
“원수의 아들이 내 제자가 되겠다고 달려올 줄이야….”
“…”
“그리 나쁘지 않군요.”
그 말과 함께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구배지례(九拜之禮).
절이 끝났을 때, 노인 또한 내 쪽으로 가볍게 고개 숙였다.
마침내.
나는 천하제일검의 제자가 되었다.
*
삽시간에 맹을 폭풍처럼 뒤집어엎은 황실의 마차가 떠나간 시점, 이자성은 말없이 황실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
“스승님! 제 말을 무시하실 셈입니까!”
“군악, 내 듣고 있으니 말해보거라.”
“황제 놈이 -”
“사제.”
“… 사제가 뻔한 함정을 팠는데 왜 빠지신 겁니까!”
“함정?”
“우리를 배화교와의 싸움에 내세우려는 수작 아닙니까? 보나 마나 조화문주 그 요녀가 머리를 굴려서 -”
“아닌 것 같던데?”
“네?”
“내, 제자를 관(觀)했다.”
“…”
“거짓말이 아니더구나. 제국이 어떻다, 배화교가 어떻다. 이런 정치적인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
“황제로서는 참으로 철이 없다고 해야겠지. 이런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며 정치적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니. 허나….”
“…”
“한 명의 무인으로서는 족하리라.”
“스승님….”
“너도 듣지 않았느냐? 적 앞에서도 당당해지고 싶다 하더구나.”
“…”
“무엇이 문제겠느냐? 강함을 원하는 아이가 가르침을 구했으니, 늙은이가 그 요청에 응했을 뿐. 이 또한 세상의 순리이니라. 그러니 기대하거라.”
“기대요?”
“내, 황제 놈의 눈물로 황궁 전체를 적시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