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73)
372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21)
– 이은솔
천의맹을 끌어들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히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황제가 이자성의 제자로 들어간다는 다소 황당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결과 자체는 아주 좋았다.
구체적으로 왜 좋은지 따져보면,
첫째, 황제라는 직책 때문에 밖에 쏘다닐 수 없어서 시간만 낭비하던 승엽이가 매일 펑펑 운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둘째, 이자성이 시간 날 때마다 황제 옆에 붙어있게 되자 일종의 ‘호위’역할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동료 중 누군가가 황제 호위를 전담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상 의심스럽던 이자성을 조금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발생하고 며칠 후, 마침내 배화교의 세력이 평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벽 위, 옆자리에서 평야를 내려다보던 할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놈들이 평야에서 한판 붙자고 할 모양인데?”
“그렇네요. 뭐, 이기겠죠.”
큰 걱정은 없다. 평야에서의 대회전은 이미 한번 이겨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겼는데, 이번엔 상대가 무슨 전술을 쓸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지는 게 더 이상해.
물론, 할아버님은 툴툴거렸다.
“너 인마, 위에서 구경하는 위치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니냐? 난 밑에서 굴러야 한다고!”
“…”
“아니, 뭔 놈의 세상이 젊은 놈은 위에서 손가락 까딱하면서 지시하는데 나 같은 늙은이는 팔다리가 휘어지도록 전쟁터에서 굴러야 하는 거냐?”
“억울하면 황제의 조언자 하세요. 여기도 그렇게 쉬운 위치는 아니거든요?”
“말이나 못 하면 참….”
“평야의 대결 보다는 이후의 하늘 탑이 더 신경 쓰이네요. 보나 마나 이번에도 건축하겠죠.”
“이번에도 파괴해야지. 이번엔 상현이 레이저가 있으니 더 편할 게다. 천장산으로 가는 애들에겐 상현이 레이저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말해뒀으니….”
하늘 탑 파괴까지는 별 이상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번째 시도에서 진행한 부분만큼은 수월하게 가는 느낌인데, 그다음이 문제일 뿐이지.
“참, 황제의 수련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내 질문이 나오자마자 할아버님이 웃었다.
“큭! 으하핫!”
“그렇게 재밌어요?”
“시종들이 난리다. 승엽이 고놈이 매일 우느라 바쁘다더라.”
솔직히 그 대목에선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뭔가 강해진 것 같나요?”
멀리서 상현 씨가 다가오며 답했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성취가 나올 단계가 아닙니다.”
상현 씨는 황제의 호위라는 직책 덕에 승엽이의 훈련을 근처에서 자주 살필 수 있었다.
덕분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궁금해서 수련 내용을 보았는데, 의외로 과학적입니다. 신체 단련은 달리기와 스쿼트 위주로 시키더군요.”
“스쿼트?”
“아, 이쪽 표현으로는 ‘마보 자세’라고 합니다.”
할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몸은 다 똑같으니까. 단련에 좋은 동작, 운동은 정답이 있기 마련이지.”
“이론 강의도 재밌었습니다. 철학과 신비학 이론이 뒤섞인 듯하더군요.”
의사이자 우주비행사이자 특수부대 출신.
현대 과학의 총아라 할만한 상현 씨가 보기에, 무공이란 철학과 신비학이 뒤섞인 재미난 학문인 모양이다.
“사실, 정말 재밌는 건 무공의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방법론 쪽입니다.”
“방법론?”
“외우게 시켜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쓰게 시키더군요. 세 번 틀리면 연무장을 뛰고 와야 하고.”
“… 나, 이자성이 갑자기 강남 스파르타 학원 선생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때, 할아버님이 어딘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 참, 이래서 늙은 게 서럽다.”
“…”
맥락 없이 나온 나이에 대한 한탄이나 이 자리에 그 의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다.
205호에 처음 진입해서 ‘무공’이라는 ‘배울 수 있는 초능력’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모두가 해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곧 포기해야만 했다.
무공은 특정 나이대가 지나면 입문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가의 자식들은 10살 이전부터 익히는 게 보통이고, 늦어도 10대 중반엔 입문해야 한다더군요.”
상현 씨가 답한 내용은 내가 얻은 정보와 비슷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승엽이도 좀 늦게 입문하는 셈인데, 이 자리의 사람들은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다.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상현 씨가 피식 웃었다.
“설령 익힐 수 있었다 해도 익혔을지 모르겠군요.”
할아버님과 달리 상현 씨는 그다지 아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승엽이의 수련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무언가 깨달았나?
“생각보다 성장이 아주 느린 힘입니다.”
“성장이 느려요?”
“수신 호위라는 직책을 내세워서 이자성에게 몇 가지 물어보았는데, 무인 흉내라도 내기 위한 최소한의 수련 기간이 3년입니다.”
“…”
“그것도 매일 최소 8시간은 수련했을 때 기준인데, 호텔에서 그렇게 넋 놓고 수련할 일이 자주 생기겠습니까?”
“그렇네요. 203호처럼 무지막지한 시간이 주어지는 방이 또 있는 게 아니고서야.”
“승엽 군도 유의미한 성취를 내긴 힘들 겁니다. 그냥 신체 단련 정도의 효과겠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죠.”
“그건 맞습니다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강해진다는 목적 달성에 있어서 무공은 효율성이 꽤 떨어진다. 성장 속도가 유산과 비교가 안 된다.”
“효율성이 떨어진다?”
“21세기 군인이 냉병기 훈련 따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익혀서 손해라서가 아닙니다. 그걸 할 시간에 총을 몇 번 더 쏘는 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죠.”
여기까지 듣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공 익힐 시간에 유산 숙련도를 높이는 게 낫다 이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환마가 타인의 몸을 강탈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요? 못해도 몇백 년은 걸렸겠지요? 가인 군은 마도서 얻은 첫날부터 가능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다시 병사들의 훈련을 점검하겠다며 떠나갔다.
뒤에 남은 두 사람, 나와 할아버지는 어딘가 미묘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 상현이 녀석은 확실히 무공이 아쉽진 않겠구나.”
“그렇네요.”
“성실의 축복이 있고, 그걸 통해 강해질 수 있으니까. 또, 최후의 섬광 또한 숙련도를 높이면 나름의 성취를 얻을 수 있겠지.”
“그렇죠.”
다음 말은, 약간의 열기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유산도 없고, 축복도 성장성이 없지.”
“…”
“이 방에서 내 나름대로 수를 찾아봐야겠구나.”
이 말을 끝으로 할아버님도 떠나갔다.
강함이라.
승엽이는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상현 씨는 무공 따위를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기 강화 수단이 있다.
할아버님은 나에겐 그런 것이 없으니 별도 수단을 찾아보겠다 한다.
나는 어떨까?
유산이라면 있고, ‘탐욕의 손’은 성장성도 확실한 힘.
상황 자체는 강화 수단 자체가 부족한 할아버님보다는 별도의 수단이 있는 상현 씨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가 더디게 나아가는 이유는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탐욕의 손을 한계까지 발휘하면 동료들이 큰 위기에 빠진다.
이에 대한 두려움이 탐욕의 손이 가진 잠재력을 깎아 먹고 있다.
“이쯤 하자.”
이런 생각 자체가 위험해.
탐욕의 손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이니까.
장소가 저주의 방이기에 작동하지 않았을 뿐, 호텔이었다면 조금 전 내 갈망에 반응했겠지.
뜨거운 차 한잔 들이키며 복잡한 상념을 저 멀리 치웠다.
“천장산에 간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
– 유송이
사람은 학습 능력이 있어.
처음 겪는 위기에선 당황에 빠져 좌충우돌하겠지만, 같은 일이 두 번 발생한다면 보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지.
지금의 우리처럼.
광대한 넓이를 자랑하는 천장산에 오르기 위한 각종 물품이 필요한데 돈이 없는 상황, 저번에는 별수 없이 하남성의 무장 강도가 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상인들에겐 미안해.
다행히 이번엔 그럴 필요 없었다.
우리 상황을 이해한 은솔 언니가 간단히 해결해줬기 때문이다.
“HP 마켓에서 은 접시 파니까 이거 두 개 주문할게. 그리고 호텔 비품 좀 챙겨가.”
돈이 없으면 값비싼 물건을 챙겨가면 되는 것.
내심, 호텔 비품을 챙겨가는 것도 일종의 도둑질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아냐. 괜찮아.
호텔은 우리에게 나쁜 짓을 아주 많이 했으니까 비품 정도는 얼마든지 챙겨가도 된다.
“아가씨! 정말, 이 정도로 되겠습니까? 그, 금 씨 집안을 찾아가시면 훨씬 더 많은 값을 치러드릴 겁니다.”
눈앞의 상인은 연신 내게 사죄했다.
본인의 전 재산을 모아도 내가 내민 호텔 산 금 촛대를 구매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옆에 그로테스크가 위협적으로 부리를 들이밀었기 때문일까?
상인은 날 속이려 드는 대신, 근처의 부유한 가문을 찾아가면 더 많은 돈을 치러줄 수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됐어요. 부족한 가격 대신, 내가 말한 물품을 당신이 잘 구해주세요.”
“제, 제 자식이 쓴다 생각하고 최고의 품질로 구해보겠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어차피 여기서 모은 돈을 호텔 밖으로 챙겨갈 것도 아닌데, 손해를 보든 말든 뭔 상관이겠어?
그냥 당장 필요한 물건만 구하면 그만이야.
그리고….
205호가 초기화되며 이 남자는 모든 일을 잊었지만, 내 기억은 멀쩡하다.
덕분에 미로가 환마 펀치로 그의 좌판을 쪼개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 사과의 의미도 있으니까.”
“네?”
“아닙니다. 빨리 움직이세요.”
“아, 알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자 미로가 헬멧을 벗고 닭 꼬치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었다.
“너, 그거 훔친 것 아니지?”
“앙이야. 웅으면서 당라고 -”
“삼키고 말해. 삼키고.”
“아니야. 웃으면서 달라고 하니까 줬어.”
“…”
특유의 힘이 담긴 말을 자각 없이 쓴 걸까?
아니면 위압감 넘치는 ‘백룡신갑’을 보고 상인들이 알아서 바쳤을까.
모를 일이다.
어느 쪽이든, 그놈의 ‘환마 펀치’보다는 나았다.
“잘했어. 아리는?”
“처리하고 온대.”
“처리라….”
30분쯤 후, 갑자기 ‘끼익’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상인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두리번거렸으나, 곧 생업으로 돌아갔다.
아리의 신호다.
미로와 함께 약속한 장소로 이동했다.
성 외곽의 허름한 골목, 조금 전까지 보았던 화려한 시장과 전혀 다른 장소다.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오늘 먹을 빵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찌를 수 있는 빈민가.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탐욕스러운 눈길이 우리 쪽을 향했다.
그리고….
— 쿵!
그로테스크가 바닥을 한번 내리치자 빈민들이 싹 사라졌다.
“아~! 아쉽네.”
“… 대체 뭐가 아쉬워?”
환마 펀치를 날릴 기회가 사라져서?
이 대책 없는 소녀의 모습에 한숨 쉬는 것도 잠시, 어둠 속에서 아리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환마의 봉인을 지키는 두 명의 고수 중 1인, 약초꾼이다.
아리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신분을 감추고 있던 그 남자를 처리한 것이다.
“뭔가 알아냈어?”
“밖으로.”
“응?”
“밖에 가서 이야기하자.”
어딘가 의미심장한 것이 무언가 알아낸 것 같았다.
*
시장 상인에게 저녁 무렵까지 등산용 물품을 준비하라 알린 후 성 바깥으로 나왔다.
아리는, 무슨 대화라도 할 것처럼 약초꾼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옆에선 미로가 죽은 사람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 아리야.”
“응?”
“너야 이미 글렀지만, 미로는 아직 어리니까 좀 순수하게 키워봐.”
“그렇네. 미로는 잠깐 뒤로 돌아있어.”
미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돌아서자 아리는 약초꾼의 눈알을 뽑아서 –
“으아악!”
“조용히 좀 해. 송이 넌 아직도 호텔 1일 차야?”
“야! 이런 짓 할 거면 나도 뒤로 돌아있으라고 하라고!”
“넌 순수하게 크지 않아도 돼. 이미 글렀잖아.”
눈알을 뽑더니 그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뇌를 헤집었다.
오래된 피를 응용했거나, 관리국 요원으로서 습득한 기묘한 술수를 쓰는 듯했다.
예전엔 여유가 없어서 이런 수법까진 쓰지 못했는데, 요번엔 미리 기습해서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하는 모양이다.
이런 짓을 왜 하는지는 알겠어.
알겠는데, 진짜 역겨워서 토 나올 것 같다고!
미로는 뒤쪽의 끔찍한 소리를 들었는지 아예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
“…”
“뭔가 알아냈어?”
“잠깐 기다려. 머릿속으로 정리 중이니까.”
아리가 고민에 빠진 시점, 현재 우리의 문제점을 되새겼다.
목적은 천장산 지하의 가인 오빠 해방.
문제는 그 지하까지 어떻게 가냐는 것.
요전엔 미로가 선생님을 소환해 레이저로 길을 뚫었지만, 이번엔 쓸 수 없는 방법이다.
제국 파티 쪽에서 최후의 섬광을 써야 하니 우리는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다른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