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80)
379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28)
사람의 기억이란 참 오묘한 면이 있다.
많은 기억은 불과 10분 전의 일인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부모님이 조금 전에 시킨 일을 까먹고 하지 않아서 혼난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지.
그리고 어떤 기억은,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유성(流星)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었다.
아무리 괴악한 마인이라 해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와 가족이 있는 법.
유성은 남만(南蠻)의 정글에서 살아가던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날붙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량한 부족 – 같은 건 솔직히 아니었다.
혹독한 정글에서 생존이란 곧 투쟁이기 때문이다.
유성이 기억하는 부족 사람들 또한 눈빛이 형형한 전사요, 생존 전문가들에 가까웠다.
가혹한 땅에서도 사랑이 있었다.
얼굴조차 흐릿한 유성의 어머니는, 저녁마다 그를 껴안고 부족의 전설이 담긴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아버지는,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밤에 자기 전에 꼭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
철기로 무장한 한인(漢人)들이 정글을 불사르고 모든 이를 죽였다.
여자는 범하고 죽이고, 남자는 팔다리를 베어 죽인다.
어린아이들은 목줄을 메어 짐승처럼 끌고 갔다.
그날, 부모님을 죽인 한족 남성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유성의 첫 번째 주인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채찍질과 가혹한 노동.
손가락이 세 개나 잘리고 팔다리가 반쯤 휘었다.
하염없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망가자 한족은 개를 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이리 세상이 가혹할까?
굶주린 개에게 산채로 다리를 뜯기며 생각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빌고 또 빌었다.
신, 악마 중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를, 이 모든 고통을 모두에게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때, 눈 앞에 상자가 나타났다.
…
세상이 나에게 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평생토록 부조리한 고통만을 받았기에 나 또한 같은 것을 돌려주었다.
첫 번째 주인은 뙤약볕 아래 나무에 묶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살려두었다.
죽기 전에 그 남자가 보아야 할 것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아꼈던 아내와 첩, 자식들 모두가 비참하게 으스러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했으니까.
어느 시점이었을까?
주인의 눈에 더 이상 생기가 없었다.
몸은 여전히 살아있었으나 마음이 죽었던 것.
그 눈을 보았을 때….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압도적인 쾌락이 영혼을 마비시켰다.
이후로도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때의 쾌락과 비교할만한 즐거움은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쌓아둔 게 없었으니까.”
“…”
“최초의 살인은 내 부모와 부족을 몰살한 자들에 대한 복수였어. 10년 혹은 그 이상 응축된 원한을 단박에 터트린 셈이었지.”
“…”
“최근에 알게 된 표현을 빌리면 이해하기 쉬워. 최초의 살인은 충분한 빌드업 후에 터트린 카타르시스고, 이후의 살인은 근본 없는 막장 전개지.”
“… 이상한 말을 쓰는구나. 너는 마귀에 불과하다.”
“야 인마!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나와야 하는 반응이 있잖아!”
“…”
“너도 어, 한때는 피해자였구나? 세상의 부조리함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지랄.”
딱 한 마디였지만, 유성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지랄이다.
애초에 이게 몇 년 전 이야기인가?
1,000년도 넘었고, 당시 유성의 부족을 죽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유성 본인조차도 지금의 살인이 딱히 그 시절의 원한에 대한 복수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유성을 사로잡은 생각은 따로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
“…”
“사실, 난 악행을 하지 않았어.”
“또 무슨 -”
“들어봐. 난 부모를 잃은 적도 없고, 복수한 적도 없어. 심지어 살인한 적도 없어.”
“…”
“애초에 이 세상은 한 달쯤 전에 창조됐고, 이제 2, 3일 후면 소멸해. 무슨 1,000년 전의 어쩌고?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아. 그냥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일 뿐이라고.”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유성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호텔 파티’도 저주의 방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203호의 내용을 미루어보면, 205호 또한 수천 년의 역사가 실제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단지 호텔 파티가 한 달 전에 깨어났을 뿐.
그리고….
이런 철학적인 문제는 유성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핵심은 내가 살아야 한다 이거야.”
자신에게 영생을 약속한 자.
바깥에서 온 자는 허무하게 죽었다.
그가 끝까지 살아남아 유산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면 약속을 지켰을까?
지켰을 것 같다.
‘영혼의 함’은 매우 강력한 유산이고, 여기에 ‘환마’의 혼을 담아 종복으로 부리는 것은 제법 매력적인 선택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유성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이혼마공과 마도서는 비슷한 방향의 힘이나 근본이 다르다.
한쪽은 고작해야 인간이 만들어낸 마공.
다른 한쪽은 한 호흡에 별을 주름잡는 마신이 만들어낸 권능.
나는 노예로 태어났고, 그는 옥좌에서 태어났다.
이 격차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결코 메꿀 수 없다.
그는 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종복으로 부림에도 거리낌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죽었다.
다른 이의 생각도 비슷할까?
운이 좋은 소년, 피리 부는 여인, 불만 많은 노인, 정신 이상한 서역의 미녀.
…
불안하다.
그들이 영혼의 함이 아니라 홍염철선을 택할 것이 두려웠다.
설령 영혼의 함을 택하더라도, 내부에 내 혼을 담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
늦은 시각, 엘레나는 침대에 누울 준비를 했다.
“아~ 은근히 할 일 없네.”
가만 보면 205호에서 황제 다음으로 할 일이 없던 사람이 자신이다.
배화교의 배신자이자 서방에서 온 사절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외국에서 온 외교관이 해당 국가의 내전에 쉽게 끼어들 수 있을까?
당연히 멀리서 구경하며 여차하면 황제를 데리고 망명할 밑 준비나 하는 게 전부였다.
“슬슬 끝나겠지?”
엘레나가 생각하기에도 205호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그냥 교주를 죽인 시점에서 끝내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끌어? 귀찮게시리….”
— 탈칵!
그때, 문이 열리며 묵성이 들어왔다.
“할아버지?”
살짝 불쾌했다.
‘그래도 여자 방인데 노크 정도는 하시지….’
“무슨 일이에요?”
“엘레나, 네가 방금 한 말 말이다.”
“네?”
“조원홍이 죽었는데도 이 방이 끝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니?”
“뭔가 알아내셨나요?”
“이건 일종의 배려야. 호텔이 너희에게 해준 배려지.”
‘너희?’
“화, 환ㅁ-”
— 탕!
한 줄기 총성과 함께 엘레나의 의식이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범인이 환마임을 알아챘다.
노인은 슬며시 웃었다.
그녀가 ‘알아채는 것’까지도 계획 일부였기 때문이다.
“방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영혼의 함 때문이야. 함에 ‘너희가 원하는 NPC’를 담으라고 호텔에서 여유 시간을 준 셈이지.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바깥에 나가면 친절하게 대해줄 테니.”
*
다음 목적지의 문을 여는 순간, 남자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 쨍그랑!
문을 채 열기도 전에 은솔이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 뭐야?”
짐작은 갔다.
이전 회차에서 묵성의 몸에 빙의한 환마에게 된통 당한 후, 은솔이 모종의 대책을 마련한 듯했다.
예컨대 문을 열기 전에 ‘대화창’으로 메시지를 보낸다던가?
방금 환마가 그 절차를 무시하고 문을 열자 즉시 위기를 감지하고 뛰어내린 것.
“피곤하게 하는 아가씨일세! 바닥이 돌이라 엄청 아플 텐데. 곧 동료가 될 사이끼리 서로 이러지 말자고.”
이 말은 진심이다.
환마는 새로운 동료가 될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가 되기 위해선 ‘약간의 섬세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은솔은 문언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리며 고함질렀다.
“호위!!! 호위!!!”
거처를 호위하던 위병들이 놀라서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무, 문주님? 무슨 일 -”
“이자성!”
“예?”
“이자성은 어디 있지? 아까 황궁으로 돌아왔다고 했잖아!”
적이 환마라면 평범한 호위병 따위는 100명이든 1,000명이든 의미 없다!
바로 그 순간,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준엄한 기세를 뿜어내며 나타났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하늘에서 구세주가 내려온 것 같았다.
*
– 박승엽
“으아악! 또, 또 시작이다! 또 환마야!”
정국이 안정되며 황궁으로 돌아왔는데, 이틀이 채 지나기 전에 난리가 났다.
방벽에서 활약했던 고수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 제1 사도와 조화문주를 해쳤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엘레나 누나와 은솔 누나를 죽였다는 말인데, 당연히 환마가 난입했다는 이야기잖아!
당장 나 혼자서라도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
“아, 안 됩니다! 아무리 천의맹주라 해도 -”
“비켜라! 내 눈으로 폐하의 안전을 확인해야야겠으니!”
사부님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내 거처로 들어왔다.
혹시 저 존재가 환마라면….
숨이 막혔다.
끝이야?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거야?
“폐하! 괜찮으십니까?”
“…”
“죄송합니다만, 확인 좀 하겠습니다.”
사부님의 품에서 작은 구슬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배화교에서 만든 복마신주라고 합니다. 제게 준 것은 크기가 작은 대신 효력은 좀 떨어진다더군요.”
“복마신주?”
“빙의를 막는 물건입니다.”
구슬이 사방에 불꽃을 뿜어내며 나와 사부님 주변을 감쌌다.
“…”
“…”
“다행입니다. 폐하께서는 멀쩡하신 것 같군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부님을 보면서 나도 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맹주님, 할아 – 탈혼노야 말이죠 -”
“환마입니다. 환마가 그의 몸을 빼앗아 혈겁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노인은 표정을 갸웃거리며 답했다.
“폐하, 제가 하나 질문드리겠습니다.”
“네?”
“조화문주에게 신비로운 힘이 깃든 피리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지. 은솔 누나의 유산, ‘안식의 피리’다.
“네.”
“조화문주는 죽기 직전까지 피리를 부르더군요. 그러자 환마가 크게 당황하며 타인의 몸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오! 서, 설마?”
“안타깝게도 문주를 지킬 수는 없었으나 환마가 깃든 육신은 베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물건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자성이 검고 탁한 빛깔의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아….”
보는 순간 알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과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느끼는 내 영혼이 말해왔기 때문이다.
이 상자야말로 홍염철선에 이은 205호의 두 번째 유산이다!
“이건….”
넋이 반쯤 나간 채 상자를 살피던 중, 사부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예?”
“이 상자를 보니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강호의 오랜 전설이지요.”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