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83)
EP.382 382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31) Fin
382화 – 205호, 저주의 방 – ‘절대고수’ (31) Fin
– 박승엽
정신이 돌아온다.
곧, 또 다른 나의 기억이 내게 돌아왔다.
충격적인 정보에 놀라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사부님이 불가해한 검격으로 쪼개버린 하늘이 서서히 닫혀가고 있었다.
아샤의 형상 또한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성, 내 무공 스승.
그의 몸이 흡사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려갔다.
“사, 사부님! 몸이 -”
“… 깨었구나.”
“사부님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
“봤냐?”
“예?”
“이놈아, 입으로는 만날 사부님, 사부님 하면서 설마 못 본 건 아니지? 내가 하늘 쪼개는 것 봤지?”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사부님을 살폈다.
아샤를 직시한 대가로 멀어버린 눈, 여전히 감출 수 없는 극도의 허무감.
그리고 –
마치 어린 소년과 같은 미소.
말년에 거둔 제자에게 자랑하고픈 마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 네! 봤어요!”
“하, 하하! 하하하! 내가 누구?”
“천하제일검!”
“아니지, 제자야. ‘검’이라는 글자가 왜 필요하냐?”
“천하제일고수 이자성!”
“크으!”
“… 즐거우세요?”
“당연하지.”
“이런 건 다 의미 없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무슨 세속의 이치를 떨쳐낸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승엽아.”
“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푸훗! 아니, 너무 기준이 마음대로인 것 아니세요?”
“이놈아, 난 원래 편협한 인간 아니냐?”
“그건 그렇네요.”
“그렇긴 뭘 그래! 뭐, 아크샤의 혼은 잘 익혔고?”
“네.”
“나가서도 매일 수련해야 한다. 내가 준 가르침, 환마 놈이 준 가르침. 둘 다 잊지 마라. 그놈이 나보다 무공은 약해도 널 가르치는 재주는 괜찮더라.”
이 와중에 ‘환마 놈이 나보다 무공은 약해도’를 강조하는 모습에 다시 한번 빵 터졌다.
그동안은 근엄한 모습만 보였는데, 다가오는 죽음이 사람을 바꾼걸까?
“…”
대화의 시간이 길지 않았는데, 잠깐 사이에 사부님의 몸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마치 눈사람이 땡볕에 녹아내리면서 서서히 허물어지는 듯한 광경.
나도 모르게 품에서 ‘영혼의 함’을 꺼냈다.
지금이라면,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
“그만두거라.”
“스승님….”
“여기서 끝내고 싶구나.”
“…”
“나는…. 꿈을 이뤘다.”
“꿈을 이뤘다고요?”
“범속하게 100년을 사느니, 단 하루를 살더라도 무(武)의 끝을 보고 싶었다.”
“…”
“하늘을 베었다. 100년을, 아니 1,000년을 수련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라 여겼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영원히 잡을 수 없던 깨달음이, 아지랑이보다 흐릿했던 무언가가…. 내게 내려왔다.”
“…”
“이것으로 됐다. 찰나의 순간에 내 모든 것을 담았으니, 이 순간의 나는 진짜구나. 그러니까.”
“사부님.”
“나를 다시 가짜로 만들지 말아다오.”
하늘에선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노인의 잔해를 흔적도 없이 쓸어냈다.
여태껏 말없이 상황을 지켜봤던 송이 누나가 날 가볍게 끌어안았다.
천하제일고수 이자성이 죽었다.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진격 명령이 떨어지며 배화교의 잔당이 토벌되었다.
이것이 205호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223일 차
현재 위치 : 선택의 레스토랑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문득, 번쩍이는 공간에서 정신을 차렸다.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깔끔한 테이블, 그리고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향기.
레스토랑이다.
“선택의 레스토랑? 이거 혹시 선택의 시간인가?”
호텔 바깥도 아니고, 선택의 시간에 깨어날 줄은 몰랐다.
아마 ‘영혼의 함’의 기능을 설명해주는 역할인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지.
선택의 시간은 저주의 방과는 미묘하게 다른 판정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예쁜 원피스를 입은 송이와 깔끔하게 차려입은 승엽이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날 바라보았다.
“둘 다 왜 그래? 아, 내가 죽었는데 선택의 시간에 나와서?”
“가, 가인 형!”
“야, 예전에도 이랬는데 나한테는 유산 얻을 자격 없어. 아마 영혼의 함에 관해 설명하는 역할이겠지.”
“가인 오빠가 여기서 나오다니!”
설명해줬는데도 둘 다 입만 쩍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러면 환마는 진짜 바보짓 했잖아?”
“환마?”
여기서부터 둘다 말문이 트여서 205호 후반부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내가 죽은 후, 환마는 살기 위해 이자성의 몸을 빼앗고 이자성을 흉내냈다고 한다.
아마 송이와 승엽이는 본인을 살려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승엽이의 무공 스승 이자성으로 위장한 후, 두 사람의 영혼을 구별할 수 없는 승엽이를 속이려 했던 것인데….
“환마 이 인간, 그냥 개지랄 말고 나왔으면 됐잖아! 가인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알아서 우릴 설득해주든지 했을 텐데!”
상황은 이해했는데, 그건 아니다.
“아니야.”
“대체 – 어? 오빠? 뭐가 아니에요?”
“살려줄 생각 없었어.”
“…”
“두 번째 시도에서 환마 손에 몇 명이 죽었냐? 그런 사악한 놈을 왜 살려?”
“형은 그놈을 통제할 수 있을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리! 환마가 마도서의 힘에 겁먹어서 당장은 숨죽였을지 모르지만, 너무 사악해. 빈틈을 보이면 무슨 짓을 하겠어? 내가 항상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고.”
“…”
“영혼의 함에 꼭 205호 NPC를 담을 필요는 없어. 어느 방의 NPC든 다 담을 수 있거든. 물론, 아직 소멸하지 않은 방이어야겠지만. 104호, 206호, 207호 남았네.”
“…”
“개인적으로 생각해둔 후보도 둘 정도 있어. 하나는 가능할지 모르겠 -”
“와, 진짜 형….”
승엽이가 내 말을 끊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환마는 죽기 직전까지 형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형이 약속해줬다고, 형만 살아있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다는 것처럼….”
“생각보다 순진한 친구 -”
송이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심지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담을 생각이었어….”
“…”
“환마, 너 그냥 205호에서 죽어서 다행이다. 다 알고 선택의 시간까지 왔으면 지금 오빠 말 듣고 피눈물 흘렸을 텐데.”
“진짜 그놈은 죽어서도 사부님에게 감사해야 해요. 사부님이 미련 끊어줘서 그나마 편히 갔네. 밖에 나왔으면 가인 형 하는 소리 듣다가 충격에 빠져서 기절했을 듯.”
이상하게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숨을 쉬듯이 사람 죽여대는 미친놈을 속인 게 뭐가 문제야?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음식과 함께 ‘홍염철선’의 설명이 적힌 종이가 서빙되었다.
설명을 읽은 송이가 간단히 평했다.
“홍염철선도 나쁘지 않네요.”
“미로만 열심히 죽이길래 쓸모없는 유산인가 했는데.”
“심판 대상에서 아군은 제외할 수 있었군요. 애초에 우린 조원홍의 적이어서 몰랐을 뿐.”
“기억난다. 홍염철선의 힘을 최초로 확인한 엘레나가 말했어. 홍염철선을 사용할 때, 조원홍이 ‘나 조원홍은 이제 피하지 않겠다’라고 외쳤다고 해.”
“항상 느끼지만, 오빠는 기억력이 좋네요. 여하튼, 그 말은 ‘자신도 심판 대상에 포함한다’라는 의미였군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사용자나 아군은 제외하는 셈이지.”
“심판 기능 외에 불꽃을 부리는 힘도 있네요.”
악행을 저지른 ‘적’을 심판하는 기능.
불꽃을 부리는 힘.
나쁘지 않다.
다만, 선택지가 둘이니 비교해봐야 한다.
“아무래도 영혼의 함이 -”
“영혼의 함 쪽이 -”
나와 송이가 동시에 말했다.
스테이크를 가위로 썰던 승엽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네. 적을 즉사시키는 힘? 좋긴 한데 우리가 원하는 대상을 고를 수 없는 건 여전해. ‘죄’의 판단 기준도 애매하고.”
“대상이 랜덤에 가까워요. 게다가 대적자가 꼭 죄인이라는 보장도 없고.”
“심지어 100% 죽이는 힘도 아니야. 환마는 영혼의 함으로 저항했잖아?”
“대적자쯤 되면 저항할 가능성도 있죠.”
“불꽃을 부리는 힘도, 글쎄….”
“애매한 느낌.”
“애초에 호텔도 우리가 영혼의 함을 선택하리라 예상한 것 같지 않아?”
“네?”
“나만 살렸잖아.”
그 말에 송이와 승엽이가 ‘아’하며 놀랐다.
“그렇네요. 홍염철선의 설명 역은 엘레나가 담당하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그냥 이 종이 하나로 대신했네요.”
“그렇지. 아까 잠깐 말했지만, 영혼의 함 기능을 상세히 설명해줄게.”
영혼의 함은 한 번에 한 명의 혼을 담을 수 있으며 두 가지 사용법이 있다.
첫째, 사용자 자신의 영혼을 담는 것.
이 경우 사용자는 매우 강력한 불멸성을 얻는다.
육체가 파괴되어도 당연히 죽지 않으며, 영혼의 함 자체를 무력화할 정도로 초월적인 힘이 아니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아마 불멸성과 별개로 몸을 잃으면 ‘참가자의 자격’은 잃을 것 같네.”
“유령 같은 상태로 우릴 돕는 건가? 유산이나 축복은요?”
“그건 한번 써 봐야 알겠어.”
둘째, 타인의 영혼을 담는 것.
즉, 저주의 방 내부의 NPC를 담을 수 있다.
환마가 이 방법을 통해 저주의 방을 탈출하고 싶어했지.
그리고.
“다른 NPC를 설득할 때도 쓸 수 있겠지.”
“… 104호에서 한 명 떠오르네요. 206호에서도 써먹을 수 있으려나?”
“꼭 저주의 방 NPC일 필요는 없어.”
“동료의 영혼?”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전혀 다른 ‘존재’를 떠올렸다.
지금은 육신이 없는 망령 혹은 그 미만의 존재가 된 무언가.
“이 부분은 밖에 가서 시험해봐야겠네.”
송이가 중요한 부분을 질문했다.
“영혼의 함 자체에 사람의 몸을 뺏는 기능이 있어요? 환마처럼.”
“애매하게 있긴 있어.”
“예? 애매하게?”
“신체 강탈에 특화한 마도서에 비교하면 아주 약해. 공포영화의 악령이 사람에게 빙의하는 정도의 힘?”
“… 그게 대체 어느 정도인데요?”
“일반인은 어렵겠지만, 훈련받은 사람은 이겨낼 수 있는 정도.”
“환마는 겨우 그 정도는 아니던데?”
“그건 그 녀석이 ‘이혼마공’이라는 별도의 힘으로 강화해서 가능한 일이야.”
주의 깊게 듣던 승엽이가 말했다.
“형 말대로면, 영혼의 함에 담기는 존재는 높은 확률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상태로 우릴 돕겠네요.”
“그렇지.”
“그 상태로도 힘을 쓸 수 있는 존재를 찾아야겠어요.”
“좋은 지적이야.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이자성을 살리는 것도 반대였어. 그 사람은 육신이 없는 채 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
승엽이는 내 말에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 이상으로 이자성을 ‘진짜 스승’처럼 생각했구나.
몇몇 동료들이 종종 보이는 ‘방 내부의 일’에 과몰입한 듯한 모습.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배려해줄 필요는 있겠지.
이자성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승엽이의 태도가 이렇다면 이자성이 205호에서 죽음을 택해서 다행이다.
내가 떠올린 ‘두 후보’가 환마나 이자성보다 상자에 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엔 이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화가 끝날 때쯤, 나와 송이의 시선이 승엽이에게 향했다.
승엽이가 어딘가 미안하다는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 방에선 제가 크게 활약하진 않았는데….”
나와 송이가 동시에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결국 205호는 제국이 어떻게 배화교를 무너트리냐가 핵심이었다.
두 번의 회전에서 연이어 조원홍을 패배시킨 제국 측 동료들의 기여도가 크다고 봐야겠지.
김묵성, 김상현, 이은솔, 차진철.
이 네 사람의 지분이 크다.
그렇지만 이들 중 생존자가 없었다.
송이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가끔 하는 생각인데….”
“뭔데?”
“우리 사이가 조금만 안 좋았으면,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분위기 험악했겠네요.”
“…”
“약간 그, 왕조 국가에서.”
“갑자기 왕조 국가?”
“왕위를 실력이 아니라 먼저 태어난 순으로 주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이 죽을 때마다 그놈의 실력을 가리기 위해 매번 전쟁해야겠지.”
“우리도 유산을 1인당 1개씩 순서대로 얻어서 분쟁이 줄어든 것 같다, 뭐 그렇네요.”
뜬금없는 비유다 싶으면서도 어딘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면 다음 순서는 할아버지인가? 물론 마지막까지 살아계셔야겠지만.”
“104호까지 생각하면 남은 유산이 둘이네요. 104호, 206호.”
“…”
“한 사람은 두 개 얻을지도.”
이렇게 205호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