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387)
EP.386 386화 – 한여름 밤의 꿈 (2)
386화 – 한여름 밤의 꿈 (2)
– 유송이
대혼돈의 멀티버스! 아니 호텔!
축복의 성소에서 나오자마자 겪은 일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마침내 나 말고도 제정신인 사람이 두 명 더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가인이 고 녀석이 호텔 밖으로 뛰어내렸다고?”
“그렇다니까요!”
“미로랑 엘레나는 그…. 고, 고백?”
“네.”
“요즘 애들은 참! 아니, 미로는 요즘 애는 아닌가?”
“할아버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황당함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일까?
할아버지의 표정이 오히려 평온해졌다.
“흠….”
“할아 -”
“승엽아, 어제 일을 다시 말해보거라.”
“네.”
또 한 명의 정상인, 승엽이가 어젯밤의 일에 대해 알려왔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가지는 알겠다. 모든 일의 원흉이 그 술자리인 것 같구나. 참여하지 않은 사람만 멀쩡하지 않으냐?”
승엽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참여했는데요?”
“이놈아, 넌 음료수 마셨다며? 그건 참여하지 않은 거야!”
“그런가요?”
“호텔에 기묘한 이벤트가 발생한 상황이다. 발생 조건은 술에 꼴아 쓰러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할아버지, 파티 타임에 술을 마신 게 처음이 아니잖아요? 언니가 칵테일도 여러 번 만들어줬는데.”
“적당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가 필름이 끊겨 쓰러질 정도로 마셔야 발생하는 이벤트겠지.”
상황을 약간 이해했다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할아버지가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그리 큰일은 아닐 게다. 지금은 파티타임이니 위험한 이벤트가 발생할 리 없으니까. 게다가 내 후원자가 ‘재밌는 시간 보내라’라고 말했거든.”
“제 후원자는 지금 나가면 위험하다고 했는데요?”
“…”
후원자들의 모순적인 언동을 승엽이가 간단히 정리했다.
“우리에겐 위험하지만, 후원자에겐 재미있는 일인가 보죠.”
“…”
“어떻게 해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태지?”
나와 승엽이, 할아버지가 돌아다니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렇다.
김상현, 한가인 : 호텔 밖으로 나감.
미로, 아리, 엘레나 : 1층 데스크 근처에서 멍하니 널브러진 상태.
차진철 : 2층 테이블에서 고민에 빠짐.
이은솔 : ?
“은솔이는 어디 간 거야? 피리를 써서 동료들을 깨워야 할 타이밍인데!”
“본 적 없긴 한데, 피리로도 깨울 수 없을걸요? 팔찌로도 깨울 수 없었고, 정신 오염을 막는 축복들도 죄다 먹통이 된 상태니까.”
“… 뭔가 알 것 같은데.”
유산과 축복이 바보가 됐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무언가 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꿈이다.”
“예?”
“네?”
나와 승엽이가 둘 다 당황하던 차, 할아버지가 부연해 설명했다.
“요원 일 하면서 인간을 악몽에 빠트리는 괴물을 여럿 잡아봤다. 승엽이 너도 ‘악몽 나비’에 한번 당해봤지?”
“네. 엄청 힘들었죠.”
“동료들의 상태가 꿈꾸는 것과 유사하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했다? 당연하지! 원래 꿈은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서 파고드는 것이 본질이니까.”
“유산 축복 등이 바보가 된 이유는 -”
“이 장소가 현실에서 반쯤 벗어난 상태니까. 혹은, 꿈은 정신병이 아니니까.”
“호텔 자체가 현실이 아닌 ‘모두의 꿈’이 겹친 뭐 그런 공간이다?”
“그렇지!”
“그럼 우리는요?”
“모두의 꿈에 초대받은 외부인 같은 거지.”
승엽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몽유병 환자들을 깨워야지!”
“어, 어떻게요? 유산도 통하지 않는다면서?”
“글쎄, 일단 한 명은 어떻게 깨워야 할지 알겠구나.”
*
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지하의 ‘의상실’로 이동했다.
호텔의 의상실답게 평범한 장소는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옷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장소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검은색 양복과 체크무늬 넥타이로 갈아입은 채 나왔다.
그런데, 변화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송이야, 나 좀 도와다오. 네 팔찌가 통한다면 편할 텐데, 그게 아니니 분장을 좀 해야겠구나.”
“네.”
나와 승엽이가 도와드리는 사이 할아버지가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관리국 요원들은 몽마나 악몽 나비처럼 꿈을 무기로 휘두르는 괴물들과 자주 싸우지. 이때 대응법의 핵심은 ‘이게 현실이 아닌 꿈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야.”
“자각몽에서 깨어나는 법 같은 건가요? 리얼리티 체크(Reality Check)?”
요원들의 경험과는 다르겠지만, 영화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비슷하지. 보통 현실에선 할 수 없는 동작을 하곤 한다.”
“손가락을 뒤로 꺾는다거나?”
“그런데, 이 방식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어.”
“아리 이야기인가요?”
“아리는 거의 모든 동작이 가능하거든.”
“예?”
“아리는 평소에도 손가락을 뒤로 꺾을 수 있고, 잠깐은 목을 잘라서 들고 다닐 수도 있고 -”
승엽이가 화들짝 놀랐다.
“에엑! 누나 평소엔 그런 짓 하지 않았는데!”
“너희가 놀랄 테니까.”
보통 사람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동작을 해보며 이게 꿈임을 깨닫고 깨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아리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동작 자체가 거의 없어서 이 방식으로는 깨어날 수 없다.
“그래서 아리는 이 방식을 써서 깨어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변장’이 끝났다.
거울 앞에 선 할아버지는, 평소 봐온 당당한 근육질 체격이 아니었다.
푸짐한 뱃살, 느긋한 표정, 어딘가 달라진 이목구비.
은퇴한 부잣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이 방식이요?”
“아리가 깊이 신뢰했던 사람. 하지만, 현실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
“누군데요?”
“아리가 최초로 만났던 관리국 한국 지부 부장이다.”
*
변장한 할아버지가 아리 앞에 나타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었던 아리의 눈이 갑자기 맑아지더니, 충격받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
“아리 요원, 깨어나게.”
“…”
“이잉! 정말이지 어설프기 짝이 없군! 이 중요한 장소에서 꿈이나 꾸고 있단 말인가?”
“묵성아.”
“한심스럽다. 엄마 보고 싶다고 매일 울 때부터 한심스럽더라니 -”
“묵성아, 나 깼어.”
“… ”
“엄마 보고 싶다고 운 적 없어.”
꿈에서 깨어난 아리는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축복이나 유산이 먹통이 된 상황도 아니야.”
“팔찌를 써도 통하지 않았는데?”
아리가 가볍게 웃으며 내 팔을 잡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 넌 아까도 힘 엄청 강했지. 유산 쓰고 있었구나?”
“꿈을 꾸는 동안에는 ‘자기중심적인’ 상태로 변해.”
“자기중심적?”
“원하는 주제에만 반응하고 나머진 무시하지.”
“으음….”
“대화로 치면, 관심 없는 주제에 대해서 떠들면 무시하거나 무조건 자기 주제로 끌고 와.”
가인 오빠가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멋대로 ‘뛰어내리자’로 바꾸던 것이 떠올랐다.
“유산이나 축복도 비슷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작동하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건, 지금 상황이 꿈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서야.”
“좋아, 좋아, 상황은 알겠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깨워? 너처럼 초자연적인 꿈에서 깨어나는 훈련이 된 상태가 아니잖아.”
“일단, 미로는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 알겠어.”
미로를 깨우기 위해 이동하던 중, 아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꿈에서 깨면 꿈속의 일은 없던 일이야. 가인이와 상현이의 탈출도 없던 일로 변하겠지. 그러니까….”
아리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벌써 다 잊었어.”
“… 고마워.”
꿈에서의 일은 꿈으로 남겨둬야 한다.
아까 본 일은 전부 잊었다.
잊기로 했다.
*
“미로.”
“…”
“미로, 혹시 가인이 보고 싶어?”
아리가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반응하지 않았던 미로는, ‘가인’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가인이? 오디 갔어?”
“어디 갔을까?”
“나, 가인이 좋아하는 것 같아! 사귀자고 할래!”
“… 피곤한 일이네.”
“근데, 근데!”
“그런데?”
“고백했는데 싫다고 하면 어떡해? 아까도 이상한 이야기만 하면서 사라졌어!”
“…”
잠깐의 대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하는 경험이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하는 건 무섭다.
적어도 지금은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드는 정도는 가능한데, 고백했다가 차이면 그것조차 불가능해질 테니까.
당연히 미로에게도 그 정도 생각은 있었고, 그래서 평소엔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 빠지자 자제심이 사라져서 아까처럼 행동한 것.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다.
간절히 원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참아왔던 행동들.
꿈에선 참지 않는다.
“미로, 그러면 한번 확인해봐.”
“응?”
“미로에겐 시간대여기가 있잖아?”
“어? 어?”
“시간대여기로 가인이를 소환해서 물어봐.”
“또, 또 이상한 소리만 할 텐데 -”
“아니야. 이번엔 아닐 거야.”
그렇겠지.
아까 전의 ‘진짜’ 가인 오빠는 자신만의 꿈에 빠졌으니 미로의 고백을 무시했지만.
시간대여기로 불러낼 가인 오빠는 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니까.
미로가 어딘가 떨리는 표정을 지으며 시계를 꺼냈다.
가인 오빠가 나타나는 순간, 나는 재빨리 오빠 손을 잡고 뒤로 끌었다.
아리도 재빨리 협조했다.
“어? 어? 왜 가인이를 -”
“미로, 중요한 일은 바로 하면 안 돼.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봤어?”
“그, 그건!”
“내가 도와줄게.”
아리가 시간을 끄는 사이, 나는 재빨리 가인 오빠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호텔이 또 웃기지도 않은 장난을 벌였구나.”
“오빠, 제 말 이해했죠?”
“대충. 그보다 난데없이 고백이라니….”
오빠의 표정은 기쁘다기보단 당황스러워 보였다.
“아리랑 이야기해봤는데요, 소망을 이루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대요.”
“그래?”
“그니까 오빠가 고백받아주면, 아마 기쁨에 차서 깨어나겠죠. 뒤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가 꿈에서 깨면 이 이벤트 자체가 끝날 테고 -”
“모두가 오늘의 기억을 잊는다?”
“그거죠!”
오빠가 어딘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네?”
“이 이벤트, 목적은 뭐고 왜 열렸지?”
“호텔 특유의 짜증 나는 장난?”
“호텔이 열받게 하는 장소긴 한데, 이런 이벤트가 장난일 리는 없어.”
“…”
“언제나 그랬듯이…. 위험과 보상이 있겠지.”
위험과 보상.
“위험은 짐작이 가. 누군가가 파티 타임이 끝날 때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야. 그러면 우린 몽유병 환자를 데리고 저주의 방에 가야 하지.”
“보상은요?”
“정보.”
“정보?”
“꿈에서 벌어진 일은 꿈이 깨면 사라진다. 즉, 지금 우리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일 수 있지. 예컨대, 엘리베이터나 정문으로 탈출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
“바깥에는 정말 우리가 기대한 현실이 있을까? 가족은 계셔? 현실은 멀쩡하고?”
“…”
“정보가 보상이라면,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 꿈처럼 흐릿하게 남을 거야.”
“그, 그런가요….”
그때, 미로가 덜덜 떨면서 다가왔다.
아까 들이받듯이 고백할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한 상태였다.
어쩌면 직감적으로 깨달았을지 모른다.
가인 오빠가 제정신이 아닐 때 고백하는 것과 제정신일 때 고백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가, 가인아.”
“…”
“나는 -”
사랑에 빠진 소녀가 평생의 용기를 담아 입을 여는 순간.
나와 승엽이,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뒤쪽의 아리조차 극도로 긴장한 그 순간.
오빠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