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429)
EP.429 429화 – 뼈대 있는 가문 (5)
429화 – 뼈대 있는 가문 (5)
– 한가인
그날, 커피숍에서의 일과를 끝마치고 아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엄마가 울고 계셨다.
“가인아…. 아리야…. 흐윽!”
곧 엄마 입에서 아빠가 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나왔다.
너무 큰 충격에 빠지자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쯤 하자.”
“…”
“이쪽 결말은 확실히 맛이 갔네. 아마 끝없는 불행이 계속 덮쳐올 모양이야.”
아리가 말없이 부엌에서 식칼을 챙겼다.
“… 빨리 끝내줘.”
“물론이지. 내가 죽여본 사람이 몇 명인데 너 하나 죽이다가 실수하겠어?”
참 믿음직한 대답이었다.
— 푹!
*
…
…
…
— 솨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자 근처의 대나무 숲에서 잎새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를 간지럽히는 –
— 짝!
난데없이 들려온 손뼉 치는 소리에 놀라 돌아섰다.
그곳엔 내 동생, 엘레나가 있었다.
… 여동생이 금발에 초록 눈을 가진 백인인데?
헛웃음 나올 정도의 강렬한 위화감이 덮치는 순간,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가 떠올랐다.
이 애는 어릴 때 부모님이 입양한 내 동생이야.
입양했으니까 외모가 이렇게 다른 일도 있을 수 있어.
…
아니, 이건 너무 개지랄인데?
너무 성의 없는 설정 아니야?
“가인 씨.”
여동생이 나보고 갑자기 가인 씨 하는데 무척 자연스러웠다.
“아, 이 상황에선 저도 오빵이라고 해야!”
“그냥 가인 씨 하시죠.”
“에헴.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오빠라고 하죠. 가인 씨도 말 편하게 하고. 혼란스럽겠지만, 내 말 잘 들으세요.”
“…”
“밖에서 아리가 하는 것 보니까 지금 오빠는 약간 비몽사몽 상태에요. 절반 정도는 제정신이고, 절반 정도는 꿈에 빠진 상태라는 말이죠.”
“…”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깨어나고 있어.”
이상한 표현이지만, 점점 더 ‘깨어나는’ 느낌이다.
슬슬 반복 중인 이전 꿈들의 기억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리는 흑발의 동양인 풍이기라도 했지, 대놓고 백인인 엘레나의 외모가 주는 위화감이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인가?
“깨어나고 있다고요? 그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닌데….”
“무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화가의 하얀 도화지를 일종의 스크린 삼아서 오빠 꿈을 빨리 감기로 보고 있어요.”
“…”
“보면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죠.”
“뭔데?”
“왜 자꾸 실패하는 걸까요?”
내가 순간 말문이 막힌 사이, 엘레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친척 아이들은 나와 엘레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이 꿈은 오빠가 어린 시절 겪은 일을 각색한 거죠. 당시, 당신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알아서 잘 이겨낸 끝에 호텔에 도착했어요.”
“…”
“과거의 오빠는 이겨낸 일인데 지금의 오빠가 실패하는 이유가 뭘까요? 설마 시간이 흘러서 멍청해져서는 아닐 텐데.”
“…”
“우리는 이렇게 분석했어요.”
“어떻게?”
“지금 오빠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실제 역사와 다른 결말에 도착하는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 중이다. 어째서?
엘레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몽사몽 상태니까.
절반 정도는 중학생 가인이면서도 절반 정도는 어렴풋이 이 모든 일이 꿈임을 알고 있는 성인이니까.
“오빠. 화가가 조금 전에 정했어요. 남은 기회는 두 번, 실패한다고 죽거나 하는 건 아닌데, 화가가 주는 보상은 받을 수 없게 되죠.”
“…”
“이번 회차, 난 함부로 나서기보다는 오빠가 중학생답지 않게 행동할 때 지적하는 역할만 할게요.”
“…”
“명심하세요. 지금부터 가인 씨는, 에헴, 오빠는 중학교 1학년입니다. 여기에 맞게 행동하세요.”
나는 중학생이다.
“나는 중학생이다.”
“그렇지요.”
“중학교 1학년은 사실상 초등학생이다.”
“그렇…. 지요?”
“나는 사실상 초등학생이고, 개념이 없다.”
“가인 씨?”
“나는 개념 없는 미친 중딩이다!”
“예?”
깨닫고 말았다.
나는 질풍노도의 미친 중학생, 고삐 풀린 한가인이다.
*
시골집에 돌아오자마자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호 너! 평소엔 할아버지 댁에 발걸음 한번 하지 않더니 -”
“작은아버지는 뭐 다릅니까? 누가 보면 대단한 효자 나신 줄 알겠네!”
“이 자식 말버릇이 왜 이래? 민승이가 자식 농사를 개판으로 지었구나!”
“하이고~! 거 형님 아새끼 관리나 잘하소!”
“이 후레자식이 -”
“아니, 나랑 형님이 한배에서 나왔는데, 내가 후레자식이면 형님은 뭐 -”
— 우당탕!
“…”
엘레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상황, 과거의 나는 어떻게 행동했더라?
돌처럼 굳은 친척 동생들을 달래며 뒷산에서 놀면서 어른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렸다.
“이야~ 다시 생각해보니까 말도 안 되네.”
“… 오빠?”
“세상 무슨 중학생이 그렇게 착해? 도덕책에 나올 일 있어?”
“가인 씨?”
어른들에게 ‘진짜 중학생’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엘레나. 준비하면 바로 울 수 있지?”
“네? 갑자기요?”
“준비해.”
곧바로 뒤쪽의 친척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혀엉?”
“오빠야아?”
“형이랑 물놀이하자!”
“무노리?”
“그래. 물놀이!”
주변을 살피자 정원 관리를 위한 스프링클러와 여기저기 설치된 물 호스가 여럿 보였는데, 아이들에게 죄다 하나씩 쥐여줬다.
“발사!”
곧, 아이들은 어른들이 싸우거나 말거나 활짝 웃으며 물을 정원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호스를 한옥 쪽으로 겨눴다.
“에엑! 오빠! 이게 무슨 -”
“이게 중학생이지.”
“예?”
“이거거든.”
“예?”
“발사!”
— 콰아아아!
사방에 무지개를 그리며 뻗어간 물줄기가 시골집을 강타하는 순간, 한옥 특유의 연약한 창호지가 가차 없이 찢어지며 방 내부가 난리가 났다.
“으악!”
“뭐, 뭐야! 이게 뭐야!”
“누구냐아아!”
“나, 나가서 확인을 -”
어른들이 고함지르자 나는 재빨리 호스를 내려놓고 ‘착한 중학생’으로 변신해 동생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물장난 적당히 해야 할 것 같아~”
물론, 동생들은 이미 흥분한 채 사방에 물줄기를 뿌리느라 바빴다.
그 광경을 보던 엘레나가 입을 반쯤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나도 몰라.”
나도 모르지.
근데 생각해보면, 원래 애들이 저지르는 온갖 뻘짓은 대체로 별 의미가 없어.
“이놈들!”
마침내 어른들이 한옥에서 뛰쳐나왔을 때, 나는 엘레나에게 재빨리 신호했다.
“울어!”
“…”
“빨리!”
“… 으아앙!”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사고를 친다.
혼날 것 같으면 일단 먼저 운다.
이게 바로 올바른 아이들의 행동 아닐까?
*
난장판이 된 한옥 상태를 본 증조할아버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어른들이 아이들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전부 차밭으로 내쫓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자기 자식을 잘 돌봤으면 이 난리는 나지 않았을 테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어른들이 하루 더 빨리 쫓겨났네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르겠는데.”
“…”
과거 진행보다 하루 더 빨리 쫓겨난 어른들,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된 아이들.
이건 무슨 의미인가?
…
내게 여유시간이 생겼다는 의미다.
이 빌어먹을 한옥과 항아리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낼 시간이!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어. 얘들아~!”
동생들을 데리고 무작정 창고로 움직이자 엘레나가 심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호, 혹시나 해서 말인데, 항아리를 깨트리면 -”
“엘레나,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잘 들어봐.”
“…”
내 계획을 들은 엘레나는 어설프게 웃으면서도 이게 될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정말 중학생의 행동이 맞을까요?”
솔직히 아닌 것 같긴 해.
그런데, 엘레나가 들어온 시점에서 정신이 확 들어버려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중학생 행동이 맞냐 아니냐에 집착하지 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 꿈을 해피엔딩 비슷하게 끝내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창고로 달려가는 나와 아이들을 본 한옥의 고용인들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도둑이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말렸겠지만, 죄다 집주인의 증손자 증손녀다 보니 당황해하는 모습이 볼만했다.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단호히 외쳤다.
“자! 이제부터 마음껏 만지고 놀아!”
곧,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아이들이 사방의 비싼 물건을 마음껏 만지기 시작했다.
나와 엘레나는 항아리를 찾기 시작했는데, 이전 꿈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나와 달리 명료한 기억이 있던 엘레나가 금방 찾아냈다.
“… 깨트리면 안 되는 것 아시죠?”
“잘 안다니까?”
그 사이, 아이들은 점점 더 파멸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비행기!”
민석이가 ‘비행기’라고 부르며 던지는 건 꽤 비싼 그림이었는데, 조금 전에 둘로 찢어졌으니 이젠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거 모야아! 왜 동그래?”
민아가 금빛 두꺼비같이 생긴 물건을 바닥에 마구 던지며 동그란 두꺼비를 네모로 만들었다.
잠깐 사이에 최소 수천만 원에 달하는 수집품이 그대로 쓰레기로 변했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와 그를 부축하는 고용인이 함께 들어왔다.
“아, 아이고야! 이게 대체 뭐시여?”
“할아버지이~!”
빙글빙글 웃는 귀여운 증손자, 증손녀들과 뒤에서 난장판이 된 창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본 증조할아버지가 당황하는 순간, 나와 엘레나가 항아리를 들고 나타났다.
“할아부지~!”
“어헉!”
다르다.
조금 전까진 1,000억 갑부답게 애들이 난장판을 쳐 놨어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면, 지금은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당황한 표정이다.
이 항아리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가, 가인아! 엘레나! 그거 내려놓거라!”
“네에엥?”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최대한 개념 없는 미친 중학생을 연기하며 항아리를 위로 번쩍 든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가인아! 조, 조심해야 한다! 항, 항아리에 아주 위험한 게 들었다니까!”
“위험해요? 저 그런 거 좋아하는데.”
던질 듯 말듯 살짝 흔들어보기도 하고.
“으아악!”
— 팅!
손가락으로 딱밤도 한대 쳐봤다.
“아이고야! 대체 어떤 새끼가 아를 저리 키웠나! 니, 누구 자식이가!”
“할아버지 증손자요.”
“아이고! 내가 죽을 때가 됐나부다!”
잠깐 사이에 증조할아버지의 표정이 사색이 된 상황.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항아리를 이리저리 마구 건드렸다.
실제로는 절대 열리지 않게끔 각도도 조절했고, 딱밤 소리도 내 손에서 난 소리일 뿐이다.
구경하는 사람이 보기엔 어떨까?
항아리가 열렸거나 금이 갔다고 의심할만한 상황.
증조할아버지는 항아리에 문제가 생기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으며, 이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증조할아버지가 품고 있는 비밀을 알아낼 시간이다.
엘레나를 쿡 찔렀다.
“…”
“빨리!”
쓴웃음을 짓던 엘레나는 곧 ‘연기’를 시작했다.
“우오오오!”
갑자기 금발 소녀가 눈을 헤까닥 뒤집은 채 귀신 들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가 크게 당황하며 엘레나를 바라보는 순간, 엘레나는 이번엔 쇠를 긁는듯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아아…! 진성이 형. 오랜만이야…. 그렇지?”
“흐어억!”
“이게…. 얼마 만이래? 잘 지냈어?”
충격에 빠진 한진성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알고 싶다.
대체 항아리 속에 갇힌 한민상과 한진성 사이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항아리는 부귀영화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며, 그 대가는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는가.
이 답을 알만한 존재는 단 한 사람, 한진성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