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475)
EP.475 475화 – 선택의 시간
475화 – 선택의 시간
– 김아리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악몽.
안개처럼 일렁이던 정신.
눈동자에 화인(火印)처럼 박혔던 마왕의 환영.
…
청량한 기운이 보드라운 깃털 이불처럼 나를 감싼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객기의 쾌적한 1등석에서 깨어났다.
– 호텔행 비행기가 곧 출발합니다.
“… 정말 별의별 희한한 건 다 보여주네.”
*
기내엔 가인이를 제외한 모든 동료가 있었는데, 그래서 살짝 당황했다.
가인이야 죽어서 빠졌겠지만, 미로도 빠져야 하는 것 아닌가?
곧, 미로의 ‘승무원 복장’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낙원 심층부 연구소 소장의 기억을 얻었으니 유산 설명 역할인 모양이다.
호텔 나름의 위로인지 도시락 형태의 기내식이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으라는 것 같지? 먹자!”
진철이가 밝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신호로 모두가 식사부터 했다.
“…”
내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내용물이 너무 단출해서 당황했다.
절반은 밥이고 절반은 케첩이 발라진 비엔나소시지다.
“뭐야 이건?”
“아악! 쿠쿠! 호텔 센스봐!”
옆에서 송이가 낄낄거리니까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졌어.
날 놀리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네.
“우리 아리가 좋아하는 소시지 엄청 많네! 잘 먹엉!”
“…”
“배고팡은 안 해?”
좋아하긴 해.
그래도 밥하고 비엔나소시지만 있는 건 좀 별로지만.
도시락을 비운 후, 모두가 머리를 싸맨 미로 옆에 모였다.
“그래, 전직 소장님. 유산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지? 설명해줘!”
밝은 표정의 은솔이와 달리 미로는 여전히 당황한 듯했다.
“미로, 왜 그러니? 혼란스러워서 그래?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충분해. 우선 시간의 지배자부터.”
그제야 미로는 입을 열었는데, 첫 대답부터 우리를 당황케 했다.
“… 시간의 지배자가 아니야.”
“뭐?”
“시간의 지배자가 아니라 ‘원 모어 찬스’라고 하는뎅?”
“…”
살짝 실망한 분위기가 주변을 스쳤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원 모어 찬스는 시간의 지배자를 모사한 물건이다.
결사가 재현 불가능한 과정을 통해 시간의 지배자를 얻은 후, 그 원리를 연구해 흉내 낸 모사품이 아닐지.
개인적으로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애초에 원본 시간의 지배자는 절대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물건 같았으니까.
시간 지연, 가속, 회귀 등 시간 전반의 조작이 가능한 것으로도 모자라 인신 공양 같은 가혹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성능 그대로 나올 리는 절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열화품인 원 모어 찬스를 주는 것으로 대체한 모양이네.
“그러면 원 모어 찬스에 대해 말해봐.”
“응.”
모두가 집중해서 미로의 말을 경청했다.
“동전 모양이고, 사용하면 시간을 돌릴 수 있어. 시간 지연이나 가속 같은 응용은 불가능한 것 같아.”
“시간의 지배자는 그것도 가능했는데, 원 모어 찬스는 회귀만 가능한가?”
“그런가 봐.”
회귀를 제외한 시간 조작 능력은 없다.
이건 괜찮아.
어차피 회귀가 가장 강한 능력이니까.
“회귀 시점을 미리 지정해야 하고, 시간적 범위는 한 달, 정확히는 30일.”
예컨대 31일 차에 회귀한다면, 1일 차부터 30일 차 사이의 지정 시점으로 돌아간다.
지정 시점에서 한 달을 초과하면 지정이 무효가 되며 회귀 시점을 지정하지 않은 상태에선 회귀할 수 없다.
“어…. 공간적 범위는 아예 없어.”
“그게 무슨 이야기야?”
“없어. 무한인 것 같아. 별 전체가 돌아가는 것 아닐까!”
원 모어 찬스의 회귀 범위가 낙원 내부 한정이었던걸 고려하면, 이 부분은 유산이 되며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대가 말인데….”
“대가? 재사용 대기시간 같은 거야? 한 달에 한 번만 회귀할 수 있다거나?”
“…”
이 지점에서 미로는 입을 여는 대신 다시 입을 꾹 닫았다.
“…”
“…”
결국 묵성이가 참지 못하고 미로를 툭 툭 쳤다.
“아니, 대가가 뭔데 그러냐? 쓸 때마다 손모가지 하나 날리냐?”
“… 역천.”
“뭐? 역 뭐시기?”
미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사용자는 ‘역천의 대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
잠시 주변이 조용해지자 미로가 덧붙였다.
“이 문장만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 자세한 내용은 몰라.”
“… 역천의 대가.”
머리를 긁적이던 진철이가 입을 열었다.
“다음 것도 들어봅시다. 거, 불굴의 이성? 그건 어때?”
“불굴의 이성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랑 비슷해. 음, 형태가 휴대할 수 있게 작아졌다 정도?”
낙원 지하에 있던 원본은 도구라기보다 시설에 가까웠는데, 그런 크기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쓸 수 없다.
사이즈 축소화 정도는 호텔 나름의 배려가 아닐까?
배려는 그게 끝이었고, 미로의 다음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일정 범위 내의 초자연적인 힘을 억제해. 범위 강도 등은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치냐에 달려있어.”
결국 제물을 바쳐야 쓸 수 있는 가혹한 특성은 그대로라는 의미.
두 유산의 특징을 이해했으니, 이제 ‘누가’, ‘무엇을’ 챙길지 결정할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살짝 껄끄러운 부분이 있어서 반 발자국 물러서 모두의 눈치를 살폈다.
“…”
204호 호텔 시네마에서 가인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206호의 유산은 모래시계와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도구’라고 한다.
나와 묵성이가 호텔에 들어온 근본 목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유산은 관리국 사람들이 얻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었지.
그렇긴 한데, 나랑 묵성이가 206호에서 얼마나 활약했는가? 하면 애매하네.
“…”
다행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제일 기여도가 높은 가인이는 이미 탈락하긴 했어.
남은 사람끼리 비교하면?
“…”
남은 사람끼리 비교하면 송이가 탁 튈 정도로 앞서는 느낌.
애초에 1회차 이후로 계속 시조, 시장의 폭주를 억제하며 도시를 통제해왔으니까.
가인이도 마지막 회차를 제외하면 송이랑 비교가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는지, 자연스레 시선이 송이에게 모였다.
그리고, 살짝 졸린 눈의 여고생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이쪽 물건은 용도가 정해져 있잖아? 할아버지랑 아리 둘 중에 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하, 이것 참 미묘하게 부끄러운데.”
머리를 긁는 묵성이를 보며 송이가 픽 웃었다.
“언제는 고생한 순으로 유산 가져갔나요.”
“근데, 뭘 챙겨야 하는 거냐?”
여기서 잠시 막혔다.
206호 해결을 통해 ‘티켓’을 얻어내긴 했지만, 이건 가인이까지 껴서 다시 회의할 문제야.
언제나 그렇듯, 은솔이가 조리 있게 상황을 정리했다.
“목적이 명확한 물건이잖아요? ‘세상을 구한다.’ 더 적절한 유산이 뭐 같은 가요?”
“…”
원 모어 찬스와 불굴의 이성 중 무엇이 더 세상을 구하기에 적절한 도구인가.
이걸 논하기 위해선 애초에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 아리야. 전에 했던 이야기 더 자세히 해줘. 어차피 조만간 우리가 접할 문제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정확히 어떤 문제가 생긴 거야?”
은솔이의 질문과 함께 모든 동료의 시선이 내게 모인 –
“… 묵성이 넌 왜 날 보는 거야?”
“어이쿠! 선배, 아니, 아리야.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이 부분은 괜한 오해를 피하고 싶었기에 엘레나에게 거짓말 탐지하라고 손짓했다.
“잘 들어. 나는 너희에게 꽤 많은 정보를 숨겼고, 지금도 숨기고 있지. 하지만, 현실의 위기에 대해선 숨기지 않았어.”
“뭐? 저번에 그 모호한 설명이 숨긴 게 아니었어?”
아무래도 은솔이는 당시 내가 정보를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문제에 대해선 아니야.
“다시 설명해줄게. 특정 시점, 하늘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빛이 내려와.”
“그리고?”
“이게 다라니까?”
“…”
“정말이야. 그냥 이것 하나로 세상이 끝장나. 빛의 정체는 뭔지, 빛 이후엔 무슨 일이 생기는지, 대체 무슨 악마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등 아는 게 전혀 없어.”
“…”
모두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와중에 나는 미묘한 감흥을 느꼈는데, 엘레나가 내 손짓을 보고도 거짓말 탐지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때, 차진철이 그답지 않게 예리한 지적을 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냐?”
아이코, 실수!
“세상이 끝장났으면 너희도 다 죽었을 것 아닌가? 아, 뭐시기 평행세계 그런 건가?”
“…”
모른 체 입 다물고 있으니 다들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가는 분위기다.
이럴 때는 대중문화에서 ‘평행세계’라는 개념을 널리 퍼트려줘서 참 고마워.
… 혹시 이 부분도 관리국이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내 직장이지만 가끔은 무서워.
고맙게도 엘레나가 간만에 회의에서 의견을 내며 주제를 넘겼다.
“으음, 그러면 정체불명의 빛을 한 차례 버텨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마 그걸 위한 도구가 모래시계라고 봐.”
모든 것을 끝장내는 빛이 내려올 때 모래시계 써서 한번 버텨라.
이게 모래시계가 ‘세상을 구하는 첫 번째 도구’인 이유가 아닐지.
“원 모어 찬스는?”
“… 파멸의 빛이 내려온 이후 시점을 경험한 후, 과거로 돌아가서 근본 문제를 해결한다?”
“미묘하게 호텔식이네. 원인을 알고 다시 시작해서 해결한다는 게.”
“그렇지.”
“불굴의 이성은?”
“… 파멸의 빛을 억제해서 버틴다?”
“그러면 모래시계랑 역할이 겹치는 것 아니야? 둘 다 버티기인데.”
똑같은 역할의 도구를 두 개 줬다?
그건 아닐 것 같다.
별도의 역할이 있지만, 현실의 위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 역할을 아직 모를 뿐이다.
— 짝!
묵성이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나도 종종 이 주제를 고민했었는데, 아리 생각이랑 비슷하거든? 모래시계는 그 빛이 내려올 때 한 차례 버티기 위한 도구고, 원 모어 찬스는 원인을 알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도구다.”
논리적으로 이게 맞아 보였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불굴의 이성에도 뭔가 용도는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선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파멸의 빛을 버티기? 그건 모래시계의 역할 같고.”
원 모어 찬스의 용도는 짐작이 가는데, 불굴의 이성은 모르겠다.
“그러니까 원 모어 찬스를 고르자. 잘 모르겠다는 것과 애매하게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우선 후자 고르고 생각해야지.”
미로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역천의 대가는 어떡해?”
“하, 역천이고 자시고! 이거 없으면 세상이 끝인데 대가가 뭐든 무슨 상관이겠냐?”
이렇게 의견이 원 모어 찬스로 자연스레 모일 때쯤, 상현이가 마침표를 찍었다.
“내 생각도 요원님이 원 모어 찬스를 챙기는 게 좋아 보입니다. 불굴의 이성은, 으흠.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유용해 보이는군요.”
이 자리에 없는 단 한 사람, 한가인.
“… 가인이에게 불굴의 이성이 좋다?”
그다음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포인트였다.
“불굴의 이성은 사용을 위해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미로 양, 불굴의 이성이 신성한 태양처럼 충전형입니까?”
“어? 그, 그런 정보는 없는뎅….”
“충전형이 아니면, 쓸 때마다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군요.”
“아마도?”
206호 내의 불굴의 이성도 그런 유산이었다.
“이걸 우리가 필요할 때 재깍재깍 쓰려면, ‘제물 후보’를 옆에 데리고 다녀야겠군요.”
“아.”
“어머?”
“이런!”
어머나, 진짜네.
쓸 때마다 제물을 바쳐야 하는 도구를 필요할 때 바로 쓰려면, 제물을 상시 휴대해야 한다.
그런데 제물이 사람임.
“애초에 신성한 태양 내부에 제물을 ‘충전’해둘 수 있는 가인 군이 아니면 제대로 쓰기 힘든 유산 아닙니까.”
“…”
“물론, 호텔의 차가운 눈으로 보기엔 그깟 제물 몇 명 세뇌해서 데리고 다니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냐 하겠군요. 송이 양이나 아리 양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으악, 선생님. 저는 좀….”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챙깁시다. 물론, 티켓을 꼭 불굴의 이성에 쓸지는 나가서 한 번 더 이야기해볼 문제입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 호텔행 비행기가 곧 착륙합니다! 선택받은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경쾌한 안내음에 오랜 세월 인류를 위해 봉사해온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하, 얻을 때 되니까 조금 무서운데? 역천의 대가라…. 에잇! 새삼스럽긴! 내놔라, 원 모어 찬스!”
묵성의 손에 황금빛 동전이 떨어짐과 동시에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이제 진짜 2층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관문의 방, 그것 하나만 남았다.
물론, 그 전에 몇 가지 이벤트가 있을 것 같아.
‘축복의 성소’에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