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08)
EP.508 508화 – 207호, 관문의 방 – 세 번째 시련 ‘미스카토닉 대학’ (10)
508화 – 207호, 관문의 방 – 세 번째 시련 ‘미스카토닉 대학’ (10)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다.
100년이나 200년 전 정도가 아니라 최소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더 이상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더 소중할지도 모르는 기억.
…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아리’인지 ‘유미’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기억 속으로 파고들었다.
*
상쾌한 바람이 부는 깊은 숲,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볕.
평온 속에서 침묵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얍! 얍!”
예리한 금속 칼이 번쩍! 하더니 단숨에 나무가 쪼개졌다.
“앗싸! 성공! 와, 성공! 유미야, 나 성공했어!”
“… 수고했어.”
승엽은 쪼개진 나무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쁘지 않은 발전이긴 한데….
승엽이 매일매일 갈고 닦는 ‘무공’이라는 힘은 마법의 대가로서 판단컨대 약점이 많다.
호텔 수준의 싸움에서 유의미한 위력을 내려면 5년에서 10년은 익혀야 하는데, 수련 기간이 긴 것 치고 고점이 낮은 느낌?
결국 죽어라 익혀봐야 힘 좀 세지고 민첩해진다는 정도 아니야?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곧, 싱글벙글 웃던 소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알잖아? 우리에겐 아주 긴 시간이 주어졌어. 다음 동료가 나타날 때까지 최소 3000년 혹은 그 이상이지.”
“엄청나네. 203호에서 음, 선생님하고 가인 형이 보낸 시간도 몇백 년이라고 들었는데. 유미 너는 마녀니까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
“착각. 내 기준으로도 3000년은 말도 안 돼. 그 시간을 별 타격 없이 견딜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초월자야.”
“그, 그렇구나.”
“오랜 시간을 버티기 위한 동면을 계획 중이야. 그러니 그 부분은 네가 걱정할 필요 없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원래 이야기라는 말에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긴 시간을 주먹질로 허비할 셈이야?”
“주먹질이 아니라 무공이야. 절대 고수, 이자성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
“그래봐야 원시적이지. 그걸 익힐 시간에 내게 마법을 배워.”
“…”
“마법을 익혀서 신체를 조작하면 폭발적인 근력이나 민첩성도 얻을 수 있어. 그러니까 -”
“하늘을 쪼갤 수도 있어?”
“…”
“하늘을 쪼개고, 장막의 저편에 숨은 죄수를 드러낼 수 있어?”
205호, 어떤 의미에선 호텔 파티보다도 더 ‘주인공’ 같았던 천하제일검 이자성.
그가 죽기 직전 보여준 최후의 일검(一劍)이 승엽의 마음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모양이네.
“그리고, 마법은, 마법은!”
“마법은?”
갑자기 더듬거리던 소년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유미 네가 날 위해 써주면 되잖아! 앞으로도, 음, 계속….”
“…”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설득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승엽의 말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승엽이는 마법은 익히지 않고 무공만 익혔다는 이야기네.
*
시간은 바람처럼 흘렀다.
나는 머나먼 미래를 위해 호루스 신전을 건설하고, 파라오를 잃고 혼란에 빠진 이집트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권력욕이 있는 사람이었다.
신전을 건설하고, 양민들에게 신의 딸이라 칭송받고, 적당히 똑똑하면서도 겁많은 인간을 파라오로 세워 이집트를 통치하는 일이 의외로 너무 재밌었다.
내 이런 면은 누구의 영향일까?
지금의 나는 107호, 첫 번째 관문의 방에 있던 마녀(아리마)와 104호에 있던 성녀(아우렐리아)가 합쳐진 존재다.
아리마는 음울한 저택을 짓고 혼자 살았다고 하니, 내 권력욕은 아마도 사교 집단의 수장이었던 성녀의 영향인 것 같네.
처음에는 승엽과 내가 일종의 권력다툼을 벌일까 두려웠다.
둘만 남아있을 때야 내가 그를 농락할 수 있겠지만, 그에겐 신의 영역에 다가가는 동료들이 있으니, 후환이 걱정스러웠지.
…
세월이 흐르며 위의 고민이 참으로 쓸모없었음을 알았다.
그는 무슨 권력욕 따위와 100만 광년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단 운영이나 이집트 통치 같은 ‘귀찮은’ 일을 내게 전부 맡겼다며 미안해하곤 했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나와 승엽의 조합이 의외로 괜찮다는 사실을.
*
이걸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어?
유미 얘는 은근히 둔하네.
*
승엽과 관련한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처음 몇 년은 무공 수련에 재미 붙인 채 살아가던 그가 언젠가부터 극도의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미래를 향해 떠나버린 관문 열차, 머나먼 과거에 남겨진 자신.
다음 동료가 도착할 때까지 최소 3000년.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를 뒤늦게 체감한 승엽은 점차 버티기 힘들어했다.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한 달씩 무공만 익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멤피스 사람들의 요청을 받고 야수를 처치하는 일 ‘따위에’ 목숨을 걸기도 했다.
죽어도 상관없다.
혹은, 그냥 적당히 싸우다 죽고 싶다.
이런 느낌이 들어 불안했던 시기다.
여기서 더 나가면 승엽이 내게 ‘유미야, 죽여줘’ 따위의 소리를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뭐, 죽여달라면 못 죽일 것도 없지.
어차피 207호 내에서 내 존속은 영혼의 함과 상관없이 가능하니까.
다만, 내가 승엽을 죽이는 행위를 미래에 도착할 반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 지경이 되기 전에 ‘동면 둥지’가 완성됐다.
*
유미가 승엽을 죽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일종의 안락사잖아?
우리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얘는 생각보다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
초기 동면 둥지의 모티브는 ‘겨울잠’이다.
이 기억을 들여다보는 당신은 인간 또한 겨울잠을 잘 수 있음을 아는가?
물론, 겨울잠에 특화한 몇몇 동물들처럼 체온이 5도까지 떨어진다거나, 분당 호흡량이 5% 이하로 감소한 채 생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곰처럼 이동을 거의 멈춘 채 신진대사를 극도로 늦추는 정도는 인간에게도 가능하며, 이 현상을 이용한 것이 초기 동면 둥지였다.
처음에는 한 번에 수 백년씩 잠들 수는 없었고, 길어야 1~2년 내외였다.
이 정도로도 승엽에겐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우와! 유미, 벌써 82년이 흘렀다는 게 믿어져?”
“…”
“대충, 음, 반올림해서 100년 지났다고 하면 되겠다. 이런 느낌으로 30번만 버티면 은솔 누나랑 엘레나 누나가 도착할 거야!”
“다행이네.”
“고마워!”
“…”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도…. 자살했을지도 몰라.”
승엽은 언젠가부터 내게 다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관문의 방 내에서는 영혼의 함 없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가려면 영혼의 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의 함 소유자인 승엽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내 생존을 위해 필수다.
“괜찮아. 앞으로 3개월 정도는 깨어있어야 하는 것 알지? 이 기간에 네가 할만한 일을 마련했어.”
“하하! 좋아, 천하제일 고수의 제자가 나서야 할 일이 있단 말이지?”
“… 그래.”
“너, 너무 무표정하잖아. 농담이었는데.”
“그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내 권력욕에도 끝이 있었다.
허무하고 피곤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질 왕국에 대한 애정은 물론, 권력에 대한 탐욕마저 식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멤피스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에 그리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호루스 교단의 운용도 후계자들에게 맡겼다.
언젠가부터, 이집트는 내 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
시련 시작 시점에서 400년 정도 지난 어느 날의 기억.
하늘에서 눈이 내려 멤피스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먼 미래의 한국인들은 겨울마다 오는 눈이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이집트에서 눈은 100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다.
덕분에 멤피스의 귀족들이 불길한 변고가 틀림없다며 호루스 신전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사제들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느라 정신없었다.
고작해야 기상 현상 따위에 신을 찾는 어리석음에 한숨 쉬는 것도 잠시, 그 틈을 타 첩보가 들어왔다.
“…”
“대신관님! 제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콰네이트가 -”
“알겠다. 본분을 모르는 자에게 현실을 알려줘야겠구나.”
“위대한 호루스시여!”
파라오가 날 숙청하기 위해 준비 중이란다.
주제 파악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우스웠다.
이제라도 손을 쓰면 파라오 따위는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 인간 주제에 뭘 얼마나 준비했는데?
근위병 한 1,000명 준비했어?
아니야, 아니지.
불로불사를 자랑하는 호루스의 대신관을 숙청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인간이 겨우 저 정도일 리는 없잖아?
어쩌면, 어디선가 괴이한 혼돈체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네.
아주 오랜만에 기대가 됐다.
저녁 무렵, 32년 만에 승엽이 깨어났다.
*
“이얍! 얍!”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눈덩이가 날아와서 내 어깨에 꽂혔다.
“…”
“이얍!”
이번엔 허벅지네.
“아니, 유미야. 너무 재미 없는 거 아니야?”
“… 네가 이제 몇 살이지?”
“으윽! 거, 거울 보면 아직 17세 정도로 보이던데.”
“그건 동면 둥지의 힘이고. 네 실제 나이.”
“…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유치한 마음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암실에서 파라오의 숙청과 그 혈족의 몰살에 대해 논하고 있었잖아?
이쪽에 오니까 아무리 동면한 시간이 길다고 해도 그렇지, 400살 넘게 먹었으면서 눈싸움에 푹 빠진 소년이 있네.
뭐랄까, 분위기가 다른 정도를 넘어서 장르가 달랐다.
대체 역사, 정치 스릴러에서 갑자기 코미디로 넘어온 느낌.
나는 이렇게 머리 아픈데, 이 사람은 아직도 이렇게 속 편하게 살아가는구나.
짜증과 질투가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제, 사제들에게 보고 받았어.”
“어? 이집트 이야기라면 -”
“들어. 너도 가끔은 들어야지.”
“응.”
파라오가 날 숙청하려 하고 있다.
첩보 등을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파라오에게 별도의 혼돈체 등은 없으며 1,800명에 달하는 근위병과 함께 일을 도모 중인 것 같다.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으며, 파라오는 물론 그 혈족까지 전부 죽여서 본보기를 –
“그만, 그만.”
“중요한 부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유미야, 평소엔 내가 항상 들었으니까, 오늘은 내가 말해볼게.”
“… 말해봐.”
눈덩이를 든 소년은 멤피스가 내려다보이는 위치로 이동하더니, 손을 뻗어 수도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의 템포에 너무 휘말리지 마.”
“뭐?”
“동면에서 깨어날 때마다 느꼈어. 유미,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매번 바뀌는구나. 어제는 어린 여자애였는데, 동면 한번 하고 나오니까 환갑 노파로 변해있더라.”
“…”
“너무 빠르더라. 나한테는 잠 한 번인데, 저 사람들에겐 인생이더라고. 그니까, 내 말은….”
“…”
“이집트, 멤피스, 교단, 이런 건 좀 허무하잖아. 어차피 한숨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들인데….”
“… 너무 몰입할 필요 없다?”
“영원히 멤피스 정치에 섞여서 살 거야? 3000년 동안 네 말 안 듣는 파라오는 전부 숙청하면서? 견딜 수 있어?”
“…”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할 만큼 했으니까….”
처음으로 깨달았다.
400년의 세월 속에서 내가 바뀌었듯, 이 소년도 많이 바뀌었구나.
산 위에서 대-이집트의 수도를 손가락질하며 ‘허무한 것’이라 말하는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소년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어. 이집트,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가짜 같아.”
“…”
“한숨 자고 나면 사라지는 모래성 같은 것. 전부 가짜고, 허망해. 의미가 없어.”
“…”
“딱 한 가지만 의미 있어.”
“그게 뭔데?”
이런 미묘한 감흥을 느끼며 평소보다 조금 무방비해졌기 때문일까?
그의 다음 말은 치명타였다.
“유미 너야.”
“아?”
“세상에 진실한 존재가 너 하나 뿐인 것 같아. 그냥, 나머지는 전부 모래고 거품인데, 너만 진짜 사람이야.”
놀랐다.
지난 세월 그가 장난스럽게 고백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 순간의 말은 뭔가 조금 달랐다.
어쩌면,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 어, 어 -”
“네 생각은 어때?”
대답하기도 전에 내 영혼이 울렸다.
진실이다.
이 무대, 이 세상 전체가 허무하기 그지없는 모형 정원에 불과하며, 진실한 존재는 오직 둘 뿐이다.
영원 속에서 변함없는 우리 둘만이 진실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선,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일지 모른다.
— 퍼억!
“…”
다시금, 방심한 틈을 타서 승엽이 눈을 던졌다.
이번엔 나도 참고 싶지 않았다.
“에잇!”
“어? 으앗! 파, 팔이 갑자기 커졌잖아! 유미야 -”
“받아라! 스노우 어퍼컷!”
“야, 이건 반칙이잖아!”
“천하제일 고수 제자가 이것도 못 피해?”
필살! 스노우 어퍼컷을 날리며 생각했다.
슬슬 대신관 자리에서 은퇴하자.
이집트는 원래 파라오의 것이었으니, 파라오에게 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적당히 파수꾼을 만든 후 승엽이랑 같이 동면하는 것도 괜찮겠네.
…
다시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호루스가 뿌린 씨앗이 이집트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호루스의 따님, 우리 구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