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22)
EP.522 522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8)
522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8)
– 김민아
— 따각!
고풍스러운 만년필로 원목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
간단한 동작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중년 남성, 이단심문국 한국지부장 김학연이 말했다.
“으음…. 요란한 활동을 벌인 것 치고는 보고서가 빈약한데?”
“죄송합니다. 성물 보관소 쪽에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일을 벌였는데, 단순한 미술관에 가까웠네요.”
“그 부분은 이미 이전에 침입했던 요원이 밝혀냈잖나. 진정 가치 있는 물건은 미국 총 교구에 보관 중이라는 결론까지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국지부장이 날 질책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의 말대로 호루스 교단 한국지부 성물 보관소에는 이미 다른 요원이 잠입한 적 있고, 해당 장소가 단순 미술관에 가깝다는 사실도 밝혀진 상태다.
그러므로 나와 은호가 성물 보관소에 잠입한 것은 이단심문국이 보기엔 불필요한 소란이다.
별수 없이 고개를 바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의욕만 너무 넘쳤나 봐요. 제가 가면 다를 줄 알았어요.”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떼었으니 의욕이 넘칠만한 상황 아니야?
이런 느낌으로 우겨보자.
“흐음…. 뭐, 질책하는 건 아닐세. 자네 말대로 뭔가 있었을 수도 있지. 결과적으로 찾지 못했다고 하나하나 타박하면 일을 어떻게 하겠나.”
“그렇죠.”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는 분위기다.
‘열 명의 무고한 자를 죽여서라도 단 한 명의 범인도 놓치지 않는’ 교황청 기조를 생각하면 이럴 것 같긴 했어.
요원이 하는 일은 원래 헛발질이 많거든.
“듣기로는 일반인 학생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던데.”
“제법 수완이 좋아서 적당히 구슬렸습니다. 보조 역할로 쓰고 있으니, 괜찮다 싶으면 나중에 신입으로 채용하시고 -”
“아니다 싶으면 2급 이상 기억소거제 투여하고?”
은호는 우리가 함께하는 상황을 교황청이 의심할까 봐 걱정하던데, 잘 몰라서 하는 걱정이다.
한 줌도 안되는 요원들이 나라 전체에서 온갖 일을 벌이는데, 어떻게 혼자 다 하겠어?
이런저런 이유로 일반인을 구슬려서 부리는 일은 너무나 흔해.
통상적인 정보기관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을 일에 끌어들이는 걸 자제하는 편이지만, 우린 그럴 필요가 없지.
자질 있는 사람은 신입으로 채용해서 끌어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기억 소거제 투여하면 그만이니까.
뭐?
2급 이상 기억소거제는 유의미한 확률로 정신 질환을 일으킨다고?
이단심문국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쓰는 집단이 아니다.
“그렇죠. 제 생각엔 요원으로서의 자질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알겠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알겠네’ 한 번으로 끝내는 건 기묘하다.
내가 아닌 다른 요원이었다면, ‘다른 유능한 일반인도 많은데 굳이 일개 고등학생 차은호를 부릴 필요가 있는가?’ 정도의 질문은 받았겠지.
…
수습 요원이던 시절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교황청은 나를 다른 요원과 다소 다르게 대우한다.
“보고는 이만하면 됐네. 수고하고 -”
“부장님, 요청사항이 있습니다.”
“음?”
“혹시 ‘거짓말 탐지’가 가능한 도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호루스 교단의 교도로 위장한 상태인데, 신도들과 접촉하다 보면 -”
“있긴 한데, 흐음.”
“어렵나요?”
“아니야. 허가하지. 다만, 탐지기는 믿을만한 도구가 아니니 주의하게. 심계가 깊은 사기꾼이라면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지.”
“주의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김학연 지부장이 툭 던지듯 질문했다.
“요원 김민아. 최근에 이상한 경험을 한 적 없나?”
“네?”
“예컨대, 꿈속에서 누군가 접촉한다거나 하는 경험 없었나?”
“…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됐네. 나가보게.”
*
의식을 잃은 차은호를 눕혀뒀던 안가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의식을 되찾은 상태였다.
“깼네?”
“덕분에.”
“그림은 확인했어?”
“응. 찾느라 고생했겠네. 고마워.”
간단한 공치사를 나누며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숨겨둔 거짓말 탐지기를 작동시켰다.
과학과 신비학 연구의 성과가 모두 모여 만들어진 도구라는데, 크기가 작아서 좋았다.
‘동료’라고 부르면서 거짓말 탐지기를 챙겨오는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환멸감도 들었지만, 별수 없어.
은호가 내 과거에 대해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아직은 이 남자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러면…. 그림, 써봤지?”
“응. 일단, 통성명부터 다시 하자. 내 이름은 한가인이야. 차은호는 음, 일시적인 가명 같은 거고.”
“… 풋!”
“왜 그래?”
“미안. 살짝 여자 이름 같아서.”
“그런 말 많이 듣지.”
한가인.
거짓말 탐지기가 반응 없기도 했지만, 그걸 떠나서 이 이름은 진짜라는 생각이 들어.
이름을 듣자마자 뭔가 탁 울림이 왔거든.
가인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꿈의 왕국으로 확인해봤어. 현재, 동료 중 살아있는 사람은 총 3명이야.”
“세 명?”
“아리, 묵성, 미로.”
‘아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아까 전처럼 찡한 울림이 느껴졌다.
덕분에 세 이름중 무엇이 내 것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리’가 내 이름 맞지? 묵성과 미로는 동료?”
가인이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리, 묵성, 미로. 셋 다 내 동료야.”
그 말을 듣는 순간 – 오랜 세월 내 정신을 갉아 먹어온 혼탁함이 단박에 가시기 시작했다.
기억할 수 없는 과거.
어디에도 없는 가족.
내게 많은 것을 숨기는 직장.
이 세상은 본디 ?로 가득한 장소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알 수 없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과거’였다.
내 마음이 평온함을 찾기 직전, 한국지부장이 했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거짓말 탐지기는 그리 믿을만한 도구가 아니다.’
‘심계가 깊은 사기꾼이라면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지.’
흐읍! 아직 아니야.
가인이의 말과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탐지기의 판정만으로는 부족해.
뭔가, 확실한 물증 비슷한 것이 있다면 –
“이리 와서 만져봐.”
“응?”
마치 혼란스러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가인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가 찾은 그림인데, 한번 확인해보긴 해야지. 보니까 손 한번 대지 않은 것 같던데.”
“위험한 마도구일것 같아서.”
“내가 옆에 있잖아.”
미묘하게 싸구려 작업 멘트 같은 가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다가갔다.
그의 지시대로 ‘꿈의 왕국’을 건드리자, 그림의 표면이 기묘하게 일렁이며 날 끌어당기기 –
“읏차!”
꿈의 왕국에 끌려가기 전에 가인이가 날 현실로 잡아당겼다.
“봤지?”
“뭐, 뭘 봤다는 거야?”
“그림이 네게 반응했어.”
“…”
“말했지? 이 그림은 나와 내 동료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호루스 교단도 이걸 벽에 걸어두기만 했고, 성물 보관소에 잠입했던 이단심문국 요원도 특이성을 찾지 못한 거야.”
“… 그렇지.”
“꿈의 왕국이 네게 반응하고 있어.”
오직 한가인의 동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신비한 그림이 내게 반응한다는 것.
정말이지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다.
“아….”
긴장감이 탁 풀리며 쓰러지듯 벽에 기댔다.
곧, 가인이에게서 과거라면 하지 않았을 ‘다른 동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꿈의 왕국을 사용하면 동료의 꿈에 들어가서 함께 깨어나는 방식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어.”
“이해했어.”
“다만, 이걸 위해선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지. 꿈을 꾸고 있어야 해.”
아무래도 다른 동료들이 현재 꿈을 꾸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동료들을 만나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해?”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해.”
그는 다소 아쉬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정황상 미로는 일반적인 수면에 빠진 상태가 아니야. 아주, 아주 깊은 수면에 빠진 상황. 꿈을 발생시킬 최소한의 무의식마저도 잠들었어.”
“무슨 냉동 수면에라도 빠진 분위기네.”
“실제로 그 비슷할 거야.”
“… 묵성은?”
“미로 정도로 깊이 잠든 상황은 아니야. 이쪽은 뭔가….”
“뭔가?”
“… 기다리다 보면 잠깐씩 꿈을 꿀 것 같기도 한데, 타이밍의 문제네.”
다른 동료들과 어떻게 합류할지 고민 중인 가인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다른 동료를 만나기까진 시간 있겠구나.”
“그렇지.”
“말해줘. 내 과거에 대해.”
“흐음….”
고요한 적막.
“…”
“…”
참지 못하고 다시 질문했다.
“왜 그래?”
“이제부터 뭐라고 불러줄까? 민아? 아리?”
“… 아리라고 불러줘. 내 이름에 익숙해져야지.”
“좋아. 아리야, 조금 불쾌하겠지만 잘 들어봐. 나는 네 존재 자체가 ‘날 낚기 위한’ 교황청의 함정이라고 생각해.”
“…”
“넌 너 자신도 모를 만큼 긴 시간 교황청 요원으로 일했어. 네가 보여준 80년대 사진을 떠올려봐. 이단심문국은 아마도 -”
“최소 3차례 이상. 내 기억을 초기화했지.”
“그래. 네겐 너도 모르는 여러 조치가 취해져 있어. 예컨대, 기억을 되찾는 순간 이단심문국이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을까?”
이단심문국을 의심하는 가인의 견해를 듣는 순간, 아까 한국지부장에게 들었던 괴이한 질문이 떠올랐다.
‘최근에 이상한 경험을 한 적 없나?’
‘꿈속에서 누군가 접촉한다거나 하는 경험 없었나?’
“이럴 수가!”
“왜 그래?”
“이단심문국은 네가 꿈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알아!”
“…”
“아까 지부장이 했던 경고,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꿈의 왕국을 되찾은 네가 나에게 접촉했는지 확인했던 거야.”
“흐음…. 희한한 상황이네. 성물 보관소에 걸려있던 꿈의 왕국은 알아보지 못했으면서, 내가 꿈에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 그렇네?”
듣고 보니 이상하다.
꿈의 왕국이 특별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알아보지 못했으면서, 가인이가 동료들의 꿈에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만 안다?
뭔가, 아서왕의 힘은 알아보면서 정작 엑스칼리버는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느낌인데.
정보가 있긴 한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어쨌든, 지부장과 나눈 대화까지 떠올리니 가인이의 말에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로, 묵성과 같은 다른 동료는 현재 꿈조차 제대로 꿀 수 없는 상황.
그러므로 ‘과거의 나’를 알아보고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존재는 ‘한가인’ 뿐이다.
그의 말대로 난 가인을 낚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기다려.”
“무슨 의미지?”
“호루스 교단. 여기에 내 강력한 힘이 숨겨져 있어. 아마 ‘신성한 태양’일 거야. 교세 확장에 유용한 힘이니까.”
“그걸 찾으면 뭐가 달라져? 내가 과거를 떠올리면, 이단심문국이 추적하는 건 똑같은데 -”
“큰 차이가 있지.”
“뭐?”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청년을 보았다.
“신성한 태양을 찾은 후엔 이단심문국의 추적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 시점부턴 전면전이니까.”
다음 목표는 신성한 태양이다.
…
헤어지기 직전, 가인의 바지 하단에 흙먼지가 묻은 것을 보았다.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을 텐데 어디서 묻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