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31)
EP.531 531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17)
531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17)
– 한가인
호텔에서 기상천외한 시련을 겪으며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계획은 망가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래시계를 회수한 후 ‘꿈의 왕국’으로 합류한 동료들은 나와 함께 비행기에 타고 있다.
텍사스에 갈 때처럼 나와 소피아만 스페인으로 날아간 후, 다른 사람은 꿈의 왕국으로 합류하자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야기다.
허약한 소피아가 견디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피아를 포기하기엔, 거울 조각의 힘을 빌려 기어이 포르투나까지 쓰러트렸다는 대마법사의 전력이 너무 아까웠다.
시간상 큰 손해는 아니다.
어차피 내가 소피아를 안은 채 비행해도 속도를 제한해야 하니 비행기와 큰 차이는 없으니까.
*
스페인을 향하는 비행기에서 짤막한 회의가 열렸다.
소피아가 반쯤 기절해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법왕 말이다. 저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냐?”
“몸이 문제지 마력은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남은 생명을 아낌없이 불태우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 생명을 불태워?”
움찔하는 할아버지에게 아리가 담담히 답했다.
“어차피 207호도 마무리 단계야. 종료 후에 소피아의 잔여 수명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냉혹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몇 시간 전, 소피아와 나눈 대화를 꺼냈다.
“아까, 소피아가 내게 부탁하던데.”
“뭐라고 했는데?”
“… 천국에 보내달래.”
아리는 물론, 할아버지와 미로까지 살짝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잠시 후, 평정을 찾은 할아버지가 되물었다.
“도, 동료로 받아달라 그런 건가?”
“비슷하죠.”
“하지만 가인아, 영혼의 함이 없잖으냐.”
“그러게요.”
“설령 승엽이가 어딘가 살아있다 해도, 영혼의 함에는 유미가 – 아, 이젠 없지.”
가뜩이나 우중충한 대화 주제였는데, 할아버지 입에서 유미 이야기까지 나오니 급속도로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미로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업어가도 모를 깊은 잠에 빠진 소피아를 쓰다듬었다.
“소피아…. 아리야! 소피아를 음, 구해줄 방법 같은 건 없어?”
갑자기 질문받은 아리는 살짝 당황하더니,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으음, NPC의 구원이라면 두 가지 방법이 있지. 부활 티켓을 쓰거나 -”
“그거, 실패한 참가자 말고 NPC에게도 가능해?”
“모르지. 두 번째는 부처님께 빌어보는 것.”
부처님께 빌어본다라.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 당시엔 NPC였던 상현 형에게 들은 이야기다.
놀랍게도 우린 지금까지 저 말의 의미를 모른다.
애초에 ‘부처’라는 존재와 제대로 만난 적도 없고.
“부처님은 3층에 있는 건가?”
2층이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 나오지 않았으니, 남은 장소는 3층뿐.
아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너희는 몰라? 호텔에서 탈출한 사람 중 소수가 관리국에 있다고 한 것 같은데.”
“…”
현시점 우리의 스펙을 생각해보자.
호텔 참가자 대부분은 1층 초입에서 죽겠지만, 시련을 견뎌낸 자들은 반신이라 불릴 정도의 격을 쌓는다.
이런 존재가 관리국에서 말단 노릇하진 않을 것 같다.
분명 고위 직급 아닐까?
예전에 아리가 말한 침묵하는 자(The Silent) 중 호텔 탈출자가 있다?
관리국 이야기가 나오니 다소 껄끄러웠는지, 아리가 헛기침했다.
“으흠! 주제가 시련에서 벗어난 것 같네. 얘들아, 에이디아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봤어?”
할아버지가 즉답했다.
“세계의 구원 아니냐?”
정답이지만 아리가 원하는 답은 이게 아니겠지.
“그건 너무 궁극적인 목표고. 질문을 바꿀게. 세상을 구하기 위한 에이디아의 계획은 뭘까?”
주변이 조용해진 사이, 아리가 말을 이었다.
“여기에 답하기 위해선 세상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에이디아가 어떤 고민에 빠졌는지 이해해야 해.”
쓴웃음을 짓는 할아버지를 보아하니, 관리국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어느 시점부터는 어렴풋이 깨달았고.
“이젠 알겠지만, ‘혼돈체’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사실 엄청나게 다른 존재들이야. 태양계 밖에서 온 외계인과 지구에서 태어난 유령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지 생각해봐.”
혼돈체란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휘두르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뭉뚱그린 개념이다.
인간이 보기엔 전부 ‘괴물’이지만, 예티가 보기엔 외계인보다는 차라리 인간이 더 친근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소 90% 이상의 혼돈체가 공유하는 특징이 있어. 대체로 인간에게 유해하고,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아리의 말을 전 우주의 혼돈체가 인간에게 관심이 많다는 식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태양계의 존재조차 모르고 알아서 잘 사는 외계인이나 신도 많겠지.
그런 혼돈체는 지구에 올 일이 없다.
그러므로 ‘지구에 나타나는 혼돈체’는 인간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
“우주를 세균으로 가득한 배양접시라 치자. 이때, 인간은 설탕에 해당해. 몸, 영혼, 발전한 문명 등 많은 것이 혼돈체를 유혹하고, 때로는 괴물을 만들어내지.”
이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교황청이, 관리국이 악마와 괴물을 날이면 날마다 잡아 죽여도 끝이 없는 이유다.
세균으로 가득한 배양접시에 80억 이상의 설탕 덩어리가 모여있으니까.
설령 문명이 극도로 발전하더라도 쉽게 해결할 수 없다.
기술의 발전은 인구를 증가시키기 마련이며, 이는 곧 더 많아진 설탕을 노리는 침략자의 증가를 뜻한다.
이 구조를 깨달았기에, 에이디아는 끝없이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듣던 미로가 한숨 쉬었다.
“그니까 인간이 곧 재앙의 원인이라는 거지?”
“비슷하지. 우리의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유야.”
“되게 상투적인 말이네. 사람이 문제다아~!”
“원래 세상 문제는 상투적이야.”
“그래서, 에이디아 걔는 뭘 어쩌겠다는 건데?”
“…”
미로는 아직도 에이디아, 렙틸리언 공주를 친구처럼 칭하곤 한다.
에이디아에겐 수천 년 전의 일이 미로에겐 얼마 전이기 때문이겠지만.
“사람이 문제다~! 난 이런 말 싫어. 답이 없으니 포기하자는 것 같잖아.”
“… 아니야.”
“응?”
“에이디아는 포기하지 않았지.”
“참, 그렇네? 근데 아리 말에 따르면, 괴물이 끝없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 그 자체 아니야?”
“맞아.”
“그걸 어떻게 해? 세상에 사람이 어, 80억 명인가? 이 많은 숫자 전부를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와 할아버지, 아리가 동시에 침묵에 빠지니, 미로가 당황했다.
“어? 어? 왜 그래?”
“… 미로.”
“응?”
“종종 드는 생각인데, 너는….”
“나는?”
“멍청하면서 똑똑해.”
“으엑?”
이렇듯, 우리가 에이디아의 계획의 핵심에 다가가는 시점.
“으, 으아아악!”
비행기 조종석 쪽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뭐야?”
재빨리 조종석 쪽으로 움직이니, 소피아의 심복 중 하나라는 조종사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호, 호루스 님! 저걸 보십시오!”
빛이다.
‘종말을 부르는 빛’이다!
혹시 내가 착각했나 싶었지만, 아리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아니었다.
관리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온 두 요원이 흔치 않게도 공포에 압도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207호의 대미를 장식하는 궁극의 시련이다.
또한, 현실에서 맞이하게 될 파멸의 해결을 위한 모의고사다!
“가인아! 모, 모래시계!”
모래시계와 206호의 유산, 원 모어 찬스.
호텔이 약속한 ‘종말’을 막기 위한 도구들.
둘 중, 모래시계의 용도는 종말을 부르는 빛이 내려올 때 한 턴 버티고 ‘그다음’을 보는 것!
“돌립니다.”
소피아는 모래시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겠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다.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며 모래시계를 움켜쥐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던 빛이 잠시 멈췄다.
“그건 호루스 님의 필살기 같은 건가요?”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아리, 여기에 미로까지 알아들은 목소리.
성모 에이디아의 환영이다!
“비행기? 설마 스페인에 가시는 중인가요?”
“… 그래.”
“아하하! 제가 스페인에 있는 줄 착각하셨구나. 의미 없어요. 제 본체는 물론, 거울도 더 이상 스페인에 있지 않으니까.”
“…”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에이디아와 거울의 위치가 옮겨졌을 가능성!
어제 아리가 지적했던 문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위치도 알려드릴 겸 해서 왔으니까.”
“무슨 의미지?”
에이디아의 태도를 보아하니 약간의 여유시간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아…. 결국 이런 순간이 오는군요. 정말이지 오랜 기다림이었는데.”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동료들의 침묵.
분명 우리와 에이디아는 적대적인 관계일 텐데,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모는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만일 제가 성공한다면,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찾아오지 못했던 평화가 찾아오겠지요. 그렇다면 모두 선량한 시민이 되어주세요.”
아리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지? 승리 선언?”
“성공한다면, 그건 저만의 승리가 아니라 모두의 승리입니다.”
계속 덧붙이는 전제, ‘성공한다면’.
이런 말투는 역설적으로 에이디아 역시 확신이 없음을 뜻한다.
그랬기에 물었다.
“실패한다면?”
“실패, 실패라…. 그러고 보면, 당신은 제 계획에서 파멸을 보았다고 했죠.”
“…”
“고민해봤지만, 계획을 바꿀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다만?”
“실패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한 것 같네요.”
“보험?”
“제 보험은 여러분이랍니다. 배려도 있어요.”
실패를 대비한 보험이 우리라고?
나름의 배려도 했어?
— 짝!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빛이 내려온다.
이를 꽉 깨물며 모래시계를 뒤집는 순간, 아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성모! 네 말대로면, 우린 빛이 내려온 후에도 살아있는 거지?”
“그럼요.”
“넌! 넌 어디 있는데?”
“제 위치는요~!”
이 와중에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에이디아를 보니 헛웃음이 터졌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저는 달에 있답니다.”
“뭐? 달?”
불가해한 광선이 비행기 내부까지 침투하기 시작했기에 별수 없이 모래시계를 돌렸다.
— 번쩍!
사그라드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렸다.
멍청하면서도 똑똑한 소녀, 미로는 마지막에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인류 전체라면, 정답 역시 인류 전체에 있지 않겠는가.
비행기 밖 하늘을 보았을 때, 나는 거대한 손을 보았다.
보는 순간 ‘저것’이 인류사가 1,000만 년을 나아가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궁극의 존재는 아니었다.
— 우르릉!
이윽고 우주의 그 어떤 힘도 침범할 수 없는 7일의 휴식이 시작되었다.
***
– ???
“…”
— 꿈틀!
심연 속에서 의식이 돌아온다.
마녀에 의해 영혼과 육체가 모조리 일그러진 기나긴 세월, 이대로 영원히 끝이라 생각했것만.
다시금, 나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위대한 자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조물주가 자신의 가련한 피조물에 또 한 번의 기회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
몽롱한 의식 속에서 생각한다.
만일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유미야….”
나는 포르투나다.
아니다.
나는 박승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