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36)
EP.536 536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22)
536화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22)
– 한가인
— 파아앗!
월면기지에 진입하는 순간, 오색으로 반짝이는 빛이 잠시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시야를 회복했을 때, 아리와 미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
이 정도는 예상한 범주 내다.
재빨리 꿈의 왕국을 펼쳐서 두 사람의 생존을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마음 같아선 합류하고 싶지만, 꿈의 왕국은 사용자와 대상이 모두 잠들어있어야 정상 작동한다.
나는 몰라도 아리나 미로가 이런 괴이한 곳에서 넋 놓고 잠들 수 있을 리 없지.
어차피 목적지는 모두 에이디아니까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으리라 믿자.
*
고요한 적막 속에서 회색 격벽으로 가득한 공간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주변엔 이해할 수 없는 전자장비가 많았는데, 모두 전원이 꺼졌는지 부숴도 반응이 없었다.
“…”
에이디아가 배치한 전술 병기나 드론과의 격렬한 전투를 예상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지하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을 걷다가, 어느새 뛰고 있을 뿐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자연스레 고민에 빠졌다.
207호의 해결 조건은 무엇일까?
미로가 합류한 후 첫 번째 시련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아리와 할아버지가 합류한 후 세 번째 시련에 관한 정보도 얻었다.
애매한 부분은 생존자가 없는 두 번째 시련인데, 소피아를 통해 간접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떠올린 생각이 있다.
매 시련의 최종 난관, 보스를 정말 ‘호텔’이 지정했을까?
어쩌면, 보스를 선택한 건 ‘우리’가 아닐지.
생각이 여기에 닿았을 때, 시야 한 편이 살짝 흐릿해졌다.
「사용자 : 한가인(지혜)」
“하!”
세 번째 힘, 축복이 숨겨진 장소가 ‘한가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거였어?
내심, 207호 어딘가 숨겨진 내 진짜 몸을 찾아라 따위인 줄 알았는데!
완전 헛다리였네.
축복은 말 그대로 내 안에 있었다.
생각보다 되게 고전적인 문제였다!
헛웃음이 나와서 분명 지금도 날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물었다.
“혼자 생각해서 답에 가까워지라는 이야기야?”
그러자 호텔이 내게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지금껏 그대 스스로 지혜롭지 못했거늘, 누구를 탓하는가? 지혜를 얻을 자격을 스스로 입증하라.’
조금 더 지혜롭게 생각해보자.
첫 번째 시련의 동료들은 ‘메네스’를 보스라 여기고 토벌했다.
그렇다면 말카브는 뭐였을까?
단순한 미니 보스?
그렇다기엔 너무 강했는데?
말카브 토벌에 메네스가 함께한 것부터가 ‘게임처럼’ 생각하면 되게 이상한 전개지.
게다가, 메네스와 꼭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메네스가 너희끼리 나가서 문명을 세우든지 하라고 퇴로를 열어주었다 하지 않는가.
메네스를 보스로 ‘선택’한 것은 우리다.
이 선택은 보스 선택인 동시에 시나리오의 선택이기도 하다.
렙틸리언이 인류를 지배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인류사의 과도한 비틀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동료들은 메네스의 처단을 택했다.
호텔은 그 선택을 받아주었을 따름이다.
…
두 번째 시련의 동료들은 ‘포르투나’를 보스라 여기고 싸운 끝에 패배했다.
돌이켜보면, 포르투나가 보스라는 사실 자체가 괴상하다.
포르투나는 승엽이가 뒤틀린 존재이니, 207호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보스는 처음부터 누구라고 딱 정해져 있던 게 아니었다.
은솔 누나와 엘레나가 시나리오를 ‘선택’하니, 거기에 상응하는 누군가가 나섰을 뿐.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정확한 전개는 밖에 나가 둘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그들은 교황청이 사실상 ‘관리국’ 유사 조직임을 알았으면서도 반대편에 섰다.
교황청의 정의를 폭력이라 여겼고, 명백한 위험 요소였던 소피아를 색출해 내어주는 대신 교화하는 쪽을 택했다.
만약 두 사람의 자리에 아리와 할아버지가 들어갔다면?
소피아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린애의 연기 따위는 단박에 간파한 두 요원이 소피아의 목덜미를 잡고 화형대에 묶었을지도 모른다.
교황청의 반대편에 서니, 에이디아의 가장 강력한 검인 포르투나가 보스로 선택되었다.
…
세 번째 시련의 동료들은 학장 ‘루카스’를 보스라 여기고 처단했다.
돌이켜보면, 루카스 입장에선 되게 황당한 전개였겠지.
루카스는 아리와 할아버지를 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공격한 적도 없고, 죽는 순간까지도 아리가 자신을 공격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끼던 학생들을 교황청이 죄다 학살하니 폭주했을 따름인데, 그걸 본 아리가 학장을 보스라 여겨 시간을 돌린 후 단죄한 상황.
이러니저러니 해도 관리국 친화적인 아리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아리의 선택이다.
교황청의 박해를 피해 모여든 혼돈체들이 세운 집단, 미스카토닉 대학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만일 철저히 미스카토닉 대학 편에 서서 교황청을 적대하는 선택을 했다면?
호텔은 이 또한 받아주었으리라.
세 번째 시련의 보스 역할은 교황청 측 강자 중 포르투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주어졌겠지.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008,924일 차」
이야, 고대 이집트부터 계산한 거야?
날짜 한번 거창하네.
나가는 대로 올빼미에게 다시 한번 리셋해달라고 해야겠다.
“…”
기나긴 복도의 끝에 문이 있었다.
문 너머엔 필시 에이디아가 있을 터.
— 끼익!
*
문이 열리는 순간, 시퍼런 섬광이 날아왔다.
진즉 태양을 소환한 상태였기에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이건 무슨 의미지?”
“그냥, 가벼운 인사지요.”
에이디아는 천장이 뚫려있는 거대한 홀의 중앙에서 날 등지고 선 채 바깥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그럼요.”
“우리를 흩어놓길래 각개격파라도 할 줄 알았더니, 아니네. 이럴 거면 왜 흩어놓은 거야?”
“당신과 달리 다른 두 사람은 제법 고생 중이랍니다.”
“… 왜?”
“둘이서 대화하고 싶었거든요. 특히, 그 검은 머리 여자애 쪽은 질색이라.”
“아리 이야기야? 아리는 널 선배라고 생각한다던데.”
“하!”
에이디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시퍼런 섬광으로 답했다.
— 팅!
모든 것이 멈춰선 듯한 우주공간, 공허의 세계.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두 개체가 끝없이 교묘한 공방을 나눈다.
누군가에겐 천사들의 혈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파아앗! 번쩍! 탕! 하는 느낌의 무의미한 소모전에 불과했다.
장난이라기엔 과하고, 진심이라기엔 하찮다.
정말 대화하고 싶은 건가?
“하나 더 묻고 싶은데, 장소가 왜 달이야?”
“… 죄송하네요.”
“말하기 싫다면 -”
“싫은 게 아니고 몰라서요.”
“뭐?”
“아시나요? 달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깃들어있답니다.”
“그게 뭔데?”
“저도 몰라요. 연구 중이었거든요.”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대화.
예전이라면 혼란스러웠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득한 저편에서 초상적인 직감이 번뜩였기 때문이다.
달의 신비는 207호의 문제가 아니다.
호텔은 아직 네게 달의 신비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밖에 나가서, 현실에서 알아내라.
현실엔 달이 없을 텐데, 이 직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통찰’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됐다. 이 주제는 더 논할 필요 없다.”
“…”
그 순간, 에이디아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뭔가 보셨군요.”
“…”
“나는, 우리는 달에서 수십 년을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당신은 그냥 한 번 보면 아는 건가요?”
“…”
“그 눈빛. 수천 년이 지나도 똑같군요. 그게 정말 싫었어요.”
“뭐?”
“너는, 네가 정말 전지한 신이라도 되는 줄 아냐고!”
— 우르릉!
이후의 공격은 아까보다는 훨씬 더 진심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상대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문득, 에이디아가 내 시선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다.
…
오래전, 205호 ‘절대고수’를 진행하던 당시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무인들끼리는 한번 붙어보면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상현 형이 황당해했었지.
「“강호의 무인들은 원래 한번 붙어보면 서로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안다니까?”
“살다 살다 그런 개똥 같은 심리학 이론은 처음 듣는 -”
“이게 심리학이 아니라니까! 강호인이 보기엔 사람의 인생이 칼끝에 담겨있다고!”
“하하! 묵성아, 어지간하면 관리국 경력을 보고 참겠는데, 내가 하버드에서 의사 면허 딴 사람이야!”」
지금 보니 할아버지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에이디아의 감정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절망과 고통이 느껴진다.”
“이젠 독심술이라도 익히셨나요?”
“독심술보다는 합리적 추론이지.”
“추론?”
“이런 달동네 외진 방에 틀어박혀서 히키코모리처럼 사는데 우울증이 없으면 이상한 것 아니야?”
“하!”
곧 에이디아는 사악한 저주를 뿜어낼 것만 같던 꿈틀거리는 살덩이를 내려놓았다.
“구원을 시작하기 전에 말했잖아요? 내가 실패하면, 그때 여러분이 보험이 되어달라고.”
“그랬지.”
“난 인류를 구했어요. 90%의 인류는 공포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요! 그런데, 왜 모든 판을 엎으려 들죠?”
“관점의 차이지.”
“관점?”
에이디아의 선택이 틀린 이유.
그러므로 내가 다시 선택해야 하는 이유!
“너는 90%의 인류를 해방한 게 아니야. 90%의 인류를 죽여서 괴물로 만들었고, 10%의 인류를 지옥에 떨어트렸을 뿐.”
“거울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근거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이야기.
정신이 뒤틀린 끝에 원인 모를 사랑과 증오에 농락당하는 존재가 어찌 인간일까?
조금 심하게 말하면, 9할의 인류가 지능이 낮아진 짐승이 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거울 너머의 외계신이 신인류에 부여한 힘은 ‘친화’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원본 친화에도 한계가 많았는데 그 모조품이 어찌 인류의 구원일 수 있을지.
또, 이런 생각도 든다.
분쟁을 억누르기 위해 이기심을 거세당한 사람들이 문명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을까?
…
이 생각들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상당 부분 내 추측에 불과하다.
‘통찰’이 있는 내 추측은 평범한 인간의 추측보다 훨씬 정확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타인을 설득할만한 논리는 아니다.
반면, 세상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으나 오직 에이디아만큼은 설득할 수 있는 근거도 있었다.
“내가 떠올린 생각 대부분은 너도 이 골방에서 해봤겠지. 그러니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진 않겠다.”
“할 말이 없다면 -”
“할 말이 없지. 왜냐하면, 나는 이제부터 네게 물어볼 셈이니까.”
“뭐라고?”
빙그레 웃으며 양팔을 아래로 내려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에이디아는 혼탁한 눈을 치켜뜰 뿐,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
지혜가 숨겨진 장소가 내 마음속이었듯, 에이디아의 질문의 답은 그녀 자신에게 있었으므로.
아리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이야기.
‘에이디아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수호자였어.’
‘때로는 신기할 정도였어. 그녀는 어떤 의미에선 정말 성모(聖母)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나와 달리, 불가해할 정도의 인류애(人類愛)를 품은 존재였지.’
사람이 아닌 도마뱀 외계인이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고도 인류를 무한히 사랑해왔다는 것.
심지어 이집트 군중이 봉기해 자신의 동족을 학살했음에도 이 모든 원한을 내려놓았다는 것.
본인도 혼돈체면서 이 악물고 혼돈체를 박멸하는 조직을 설립한 것.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곧 기적이다.
사람이었던 동료들이 거울 너머를 보고 돌아와 인류에 대한 증오와 뒤틀린 자에 대한 사랑을 얻었듯이….
날 때부터 사람이 아니었던 자가 그 반대항을 얻었을 따름이다.
“그러면, 에이디아. 말해봐라. 네가 정말 세상을 구했다고 믿는다면,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해보아라. 네 손으로 구원한 9할의 인류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느냐?”
“내 감정은…. 본능이 만들어낸 무가치한 것에 불과 -”
“하지만, 너는 그 본능에 따라 교황청을 만들고 세상을 구하려 했잖아? 본능을 긍정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나만 택하거라.”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008,924일 차
현재 위치 : 207호, 관문의 방 – 네 번째 시련 ‘몰락한 왕’」
207호에서 시련의 마지막 순간은 언제나 동료들의 선택으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선택의 순간이 내게도 왔다.
…
섬뜩하게 번쩍이는 거울이 나를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