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65)
EP.565 565화 – 기억할 수 없는 세상 (4)
565화 – 기억할 수 없는 세상 (4)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38일 차
현재 위치 : 레이놀드 연구소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아서와의 이후 대화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다.
그놈의 커피 때문에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졌기 때문이려나?
아니지, 커피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처음부터 신뢰가 없는 사이였을 따름이다.
“가인 씨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호텔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쉽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
“아서 씨, 관리국은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던데, 어찌 된 일인지?”
“아마 아버지가 이곳에 관한 정보를 지웠을 겁니다.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는 답변.
이런 식의 무의미한 질문과 답변만 반복될 뿐, 중요한 질문에는 서로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서로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으니까.
나는 다른 참가자에 대한 정보와 이 연구소의 목적이 궁금했다.
상대는 ‘종말을 부르는 빛’을 막기 위해 우리가 얻은 보물의 정체와 우리 파티에 대한 정보를 궁금해했다.
“휴우…. 두 분. 아무래도 잠시 쉬면서 머리나 정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럽시다.”
*
화려한, 하지만 여기저기 살벌한 보안 시스템이 숨겨진 저택을 거닐며 생각한다.
어느 시점부터는 대화의 생산성도 떨어졌고, 무엇보다 상대를 점점 믿기 힘들었다.
약점이라 할만한 가족을 쉽게 드러낸 점.
본인이 2층 초입에서 탈출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순순히 밝힌 점.
일견 어리석기 그지없었지만,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
“…”
약점을 손쉽게 드러냈다는 건, 사실 그 부분이 약점이 아닌 게 아닐까?
내가 자신을 무시해서 방심하게 하려고 가짜 약점을 드러냈다?
알고 보면 가족 따위엔 관심도 없다거나?
“할아버지.”
“음?”
“이쯤 하고 나갈까요?”
“슬슬 시간 낭비 느낌이긴 하지? 그런데 참, 나가는 방법을 모르니 원….”
“으음.”
그냥 마도서로 놈의 몸을 강탈해서 정보를 얻어낼까?
나가는 법도 그놈 머릿속에 있을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바짝 붙은 할아버지가 속삭였다.
“내 생각엔, 너무 참을 필요 없을 것 같다.”
“…”
“아서를 제압하고 정보를 얻어내자. 너라면 할 수 있지 않으냐?”
“…”
“왜 그래? 무작정 조심스러운 게 능사가 아니다.”
타당하다.
아서는 마도서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싸움을 무조건 피하는 성격도 아니라고?
할아버지의 원 모어 찬스나 아리의 구조 등 보험도 여럿 들어놨다.
그러니까 이쯤 하면 보통 손을 쓸 타이밍이다.
“…”
내키지 않았다.
또한, 이 ‘내키지 않는 마음’이 통찰의 결과물임을 어렴풋이 알았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참가자가 ‘지혜’를 나눠 가지며 통찰 또한 약해졌지만….
지금처럼, 통찰은 논리를 넘어서는 직감을 통해 내게 경고하는 것이다.
“욘석! 저리 가지 못해! 우리 무서운 사람이다?”
난데없는 할아버지의 호통.
이게 뭔가 하며 할아버지가 보는 쪽을 바라보니, 아까 잠깐 나타난 아서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조슈아?
승엽이보다도 훨씬 어린 소년이었는데, 벌써 잘생긴 티가 났다.
아서가 대단한 미남은 아님을 고려하면 상당한 미녀였던 올리비아의 유전자가 노력한 모양이다.
“아빠 괴롭히지 마세요.”
“…”
“…”
너무 아이 다운 말에 나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침묵했다.
솔직히 내가 인류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리 선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꼬마 앞에서 대놓고 악당처럼 행동하긴 좀 그래.
그나저나 외국인인데 한국말 참 잘하네.
“어흠, 음. 너, 한국말 참 잘하는구나?”
어색하게 칭찬으로 얼버무렸다.
“조용히 해! 이 바보야!”
“…”
너무 유치해서 대응하기도 뭣하다.
여하튼, 백인 소년인데 한국말을 참 잘하는 –
“어?”
그러고 보니, 아서와 그 가족들은 모두 전형적인 백인이다.
보통은 한국어를 하는 것 자체가 흔치 않고, 설령 배워서 할 줄 안다 해도 발음 등의 어색함이 있는 게 보통이다.
“왜 그러냐?”
발음은 물론, 어법상 오류 따위도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왜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냐고 한번 물어보기라도 해야 정상이었는데.
왜 이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
역설적으로 호텔에서 쌓인 경험 때문이다.
한국어가 들릴 턱이 없는 장소는 물론, 외계 혼돈체를 상대로도 언어가 통하게 해줬던 호텔의 배려 때문이다.
그 배려에 너무 익숙해져서, 현실로 돌아오고도 착각한 것!
“할아버지, 이곳, 기억할 수 없는 세상은….”
“뭔가 깨달은 게냐?”
호텔처럼 서로 익힌 언어가 달라도 문제 없이 대화할 수 있다.
나는 아서와 그의 가족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반대로 그쪽에선 내가 영어 등 외국어를 하고 있다고 느끼겠지.
“호텔과 비슷하군요.”
기억할 수 없는 세상과 호텔의 공통점을 자각하는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뭐?”
손을 뻗는 순간, 조슈아가 스스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넌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보고 바보라고 한 거야?”
“케엑!”
“어, 어! 가인아, 갑자기 왜 -”
아까부터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서의 행동들!
약점이 될 수 있는 가족을 우리 앞에 드러낸 이유가 뭐지?
본인이 2층 초반에서 탈출했다는 약점을 숨기지 않은 이유는?
약한 체하며 날 방심시킬 의도?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친 것 아닌가?
이 모든 의문에 대한 간단한 답.
본인의 약점을 드러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 장소, 기억할 수 없는 세상의 정체는 거울과 관리국의 기술로 재현한 ‘유사 호텔’이니까!
여기에 과거, 기억할 수 없는 세상에 잠입했던 요원 및 직원들이 기억을 잃었던 현상을 더하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아서는 이 영역 내의 시간을 돌릴 수 있다!
“말해보렴.”
“이, 이미 늦었어! 이 멍청이가 -”
기다렸다는 듯, 저택 전체에서 들려오는 소리
— 우르릉!
익숙하다.
나는 이와 비슷한 소리를 호텔에서 몇 번이고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벌써 아서의 수작에 몇 번이나 당한 걸까?
3번? 4번?
더 많을지도 모르지.
과거의 난 마지막 순간까지 아서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루프가 시작한 후에야 이변을 깨닫고 몇 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 기억은 조작, 의심할 것’따위의 허술한 문구를 끄적였을 뿐.
이번에는 다르다.
깨달은 시점부터 지금까지 내 오른손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펜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조슈아, 인정할게. 내가 좀 바보같이 당하긴 했구나. 그런데, 이제부턴 좀 다를 거란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38일 차
현재 위치 : 레이놀드 연구소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부드러운 침대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상태창 하단에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빼곡히 적힌 글씨들을 보았다.
“…”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남긴 기록이다.
상황을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다만, 마지막 기록이 다소 의아했다.
「추가적인 대화 불필요. 즉시 탈출할 것.
+ 아서에게 빙의하지 말 것(통찰)」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상대와 신경전을 계속해봐야 나만 손해다.
그러니 대화를 그만두고 탈출하라는 말은 이해했는데.
“빙의하지 말라고? 통찰로 얻은 결론이다?”
이 부분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
방 밖으로 나오니, 고풍스러운 저택 풍경과 함께 차를 마시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보다 먼저 깬 모양이다.
“오, 나왔냐?”
“혹시 기억하시나요?”
“저택 주인이라는 놈과 만났다.”
“예?”
“뭐? 아, 기억? 뭔 기억을 말하는 거냐?”
할아버지의 기억은 완전히 날아갔구나.
나처럼 상태창이 없으니 별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아서라는 놈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
곧, 난간 위에서 불청객이 나타났다.
“두 분 다 깨어나셨군요.”
외견상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다.
키는 나와 비슷하니 170 중후반 정도고 골격과 옷 틈새로 드러난 근육을 보아하니, 잘 단련한 것 같았다.
그 외 신체적 특징은 –
“너무 대놓고 살펴보시는데?”
진실을 깨닫고 다시 보니, 참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내 마도서에 저항할 재주가 없으면서도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다니?
우리의 목적을 짐작하기 때문이야.
정보를 얻는 게 목적이니, 자신을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줄 알았겠지.
대답 대신, 할아버지 쪽을 보았다.
“왜 그러냐?”
기록에 따르면, 사방에 감시 장치가 있을 확률이 높고 대화창도 염탐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덕분에 할아버지에게 내 계획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척하면 척하는 사이잖아?
“제압합시다.”
— 펄럭!
즉시 마도서를 소환해 화신의 힘으로 아서의 전신을 제압했다.
할아버지 또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벼락같이 권총을 뽑아 들고 놈의 머리에 겨누었다.
“뭐냐?”
일단 총부터 뽑고 이유를 묻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새삼 믿음직스러웠다.
“이놈, 저택의 시간을 돌릴 수 있어요.”
“뭐이야?”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거, 그냥 나가야겠는데? 아, 그 전에 정보 뽑아내야지. 가인아, 이놈에게 빙의해서 -”
“빙의하지 말라네요.”
“뭐?”
“특이한 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
할아버지가 잠시 고민하더니, 잔혹한 말을 꺼냈다.
“그럼, 나가는 법은 이놈에게 직접 들어야겠구나.”
“… 고문 같은 것 해본 적 있으시죠?”
“못할 것 같냐?”
그 후의 일은 굳이 세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피와 살이 튀고, 상황을 살피던 올리비아가 혼절했다는 정도로만 정리하자.
아서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
비웃고 싶진 않았다.
내가 비슷한 일을 당하더라도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탈출 직전, 헐떡이는 남자에게 물었다.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거울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 혹시, 호텔의 재현입니까?”
“…”
대답은 격동하는 눈빛으로 충분했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38일 차
현재 위치 : 강원 특별자치도 태백시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이야…. 진짜 딱 하루 지났네요.”
“그런 것 치고는 무지하게 피곤하구나.”
“그럴 만하죠.”
성과는 나쁘지 않다.
현실에 존재하는 참가자에 대한 정보도 약간 얻어냈고, 관리국이 과거에 호텔을 재현하려 했다는 기묘한 정보도 알아냈으니까.
3층에 대한 약간의 정보까지 고려하면,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봐야겠지.
다만, 미묘하게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유가 뭐였을까요?”
“뭐?”
“최초의 기억 조작. 올빼미가 한 번은 그냥 당해주라고 했거든요.”
“흐음…. 그 한번을 당해주지 않으면 저놈이 우리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 한 번을 당해주지 않으면, 아서가 우릴 무작정 쫓아냈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갈 셈이냐?”
“호텔 딜라이트.”
“그래?”
혹시 모르니 누나의 피리 한번 듣고, 이번 일을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아직도 모르겠네요.”
“뭐가 말이냐?”
“왜 아서의 몸에 빙의하면 안되는 거였을까요?”
“그야 뭐, 곧 죽어도 호텔 탈출자니 정신 보호 수단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으음.”
조언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