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75)
EP.575 575화 – 관리국은 코끼리다 (5) Fin
575화 – 관리국은 코끼리다 (5) Fin
– 한가인
은회색 안개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걸었다.
꿈의 왕국은 동료들의 꿈과 무의식을 오갈 수 있는 도구.
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아리의 꿈’으로 안내하고 있다.
할 말이 있는 걸까?
내 꿈이 아니라 아리의 꿈에서 말해야 하는 이유는?
…
경계를 넘어서 아리의 꿈에 도착했다.
꿈속 풍경은 딱 번화가의 커피숍이었는데, 주변을 살피니 다소 어색한 것들이 보였다.
한쪽 구석엔 포토 부스, 즉석 사진관 같은 게 있다.
벽면엔 거대한 액자가 걸려있는데, 검은 천이 액자를 덮고 있어서 액자 속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리가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데?
“가인아~! 보고 싶었어!”
으악!
얘 뭐야? 너 김아리 아니지!
머리 검은색으로 염색한 미로 아니야?
아리가 정말이지 처음 듣는 ‘귀여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숨이 멎었다.
심지어 찰싹 붙어서 파, 파, 팔짱까지 끼다니!
– 뭉클!
정체 모를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니까 아예 생각 자체가 반쯤 멈췄어!
뭐임? 뭐임? 뭐임? 뭐임? 뭐임?
아니이거설마했는데미친인기남한가인의매력이마침내의문의비밀호소인아리를무너트려서-
“지금 어디까지 생각 중이야?”
“…”
“연애? 결혼? 설마…. 그다음까지?”
날 무시하지 마.
아직 내 상상이 결혼까지 뻗진 않았어.
“풋! 바보야? 아직도 이 정도로 놀라? 처음도 아닌데 너도 참!”
빙그레 웃으며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왜 놀라냐는 아리의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차가운 마음이 깨어났다.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리는 거짓말 중이다.
누군가, 혹은 알 수 없는 힘이 아리를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따라서 지금부터 아리가 하는 말은 있는 그대로 이해해선 안 된다.
…
나도 모르게 살짝 아쉬웠다.
“꿈은 참 아쉬워. 신비한 일을 겪어도 깨어나면 다 잊으니까. 잊지 않으려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
해석.
지금부터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들어라.
“…”
“…”
바로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아무 말 없이 약 1분의 시간이 흘렀다.
— 틱!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
“아, 우리 너무 침묵했다. 그렇지?”
“… 그러게.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침묵이라….
아리야, 승진했구나.
“우리 커피 나왔다. 가져올게.”
“어, 음.”
곧, 아리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컵을 가져왔다.
“네 거야.”
“아, 고마워.”
— 틱!
다시, 살짝 손가락으로 탁자를 건드린다.
일종의 신호인가?
탁자를 건드린 다음 말은 중요한 말이다?
“다 가져오려고 했는데, 여러 잔을 담으면 무겁더라고. 다른 사람 커피는 네가 가져와.”
“… 알았어.”
해석.
아리가 직접 여러 사람에게 정보를 전하는 건 부담이 심하다.
본인은 나에게만 전할 테니, 내가 정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라.
“요즘 어떻게 지내?”
“… 회사 다녀. 그, 전에 말한 그곳.”
“조심히 다녀.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리던데.”
선라이즈에서 내가 신앙을 모으는 행위.
언제까지고 관리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인가?
진철 형의 도움을 받아 한번 묻긴 했지만, 위기는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신속히 ‘자동 신앙 농장’을 완성한 후 발을 빼야겠네.
“아, 전에 말한 여자친구는 만났어?”
갑자기 대화 주제가 휙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여자친구라니….
대충 말을 맞추자.
“아직 만나지 못했어. 마,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아서….”
“바보야? 가영이도 답답하겠다!”
“…”
나, 얘한테 언제 가영이 이야기까지 했냐?
“너는? 연애 같은 거 한 적 있어?”
“연애? 많~이 해봤지!”
듣자마자 거짓말 같았다.
“…”
“…”
“으음, 솔직히 말하면 거의 없어. 아무래도 외모가 문제였지.”
“외모?”
“워낙, 음, 동안이니까 신분 위장 차원에서 학교에 다닐 때가 많았는데, 생각해봐. 다 애들이잖아.”
“너랑 비교하면 그렇겠네.”
‘요원 김아리’로서의 이야기는 거리낌 없이 하네.
이 정도는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고, ‘침묵하는 자’로서 얻은 정보만 조심해야 하는 건가?
아리가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나도 이해해야 대화하기 편하니, 한번 찔러보자.
“학생이라는 위장 신분 말고, 요원으로서 연애한 적은 없어?”
“그다지. 참고로 요원끼린 거의 연애 안 해.”
“왜? 오랫동안 함께 하는 사이니까 -”
“그니까 안 하지. 너무 오래 보니까 환상도 다 깨지고, 사귀었다가 헤어진 후의 상황도 감당하기 힘들잖아.”
“헤어진 후로도 계속 얼굴 봐야 하니까? 약간 사내 연애같네.”
“퇴사가 없는 사내 연애지. 연애는 환상이 있어야 해. 그리고 너무 길면 곤란해.”
어째 이 부분은 정보 전달을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
탁자를 툭 하고 치지도 않았고 –
— 툭!
“예전에 네 꿈을 뒤지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았어.”
“…”
대체 언제 뒤짐?
심지어 나 모르게 몰래 뒤졌어?
아니, 나도 미로의 꿈을 뒤진 적은 있지만 –
“…”
아리랑 송이 꿈을 뒤지다가 들킨 적도 있지만 –
“…”
생각해보니까 동료 사이에 꿈 정도는 뒤져도 되는 것 같다.
“가영이 말이야. 네 전 여친, 아, 사귀는 단계까지 가진 않았으니 전 여친 후보인가?”
“… 내가 찼었지.”
“그래? 하여튼 뭔가 이상했어.”
“어디가 이상했는데?”
“가인이 네 기억이….”
“기억이?”
“어딘가 제멋대로 꾸며진 느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사람의 기억은 본래 믿기 힘들어. 어쩌면, 네가 기억하는 풋풋한 기억은 망각과 왜곡이 뒤섞인 무언가일지도 몰라.”
아리야, 이거 중요한 이야기 맞지?
탁자 치면서 시작했잖아.
“한번 예전 일을 잘 생각해봐. 그러다 보면, 의외의 일이 떠오를지도.”
“…”
무슨 의미일까?
“다 마셨지?”
“아, 응.”
“우리,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커피잔이 비자 아리가 날 데리고 커피숍 한구석으로 움직였다.
“가인아, 이거 알지?”
“스티커 사진기 아니야?”
“나, 이런 거 한번 찍어보고 싶었어. 찍자!”
다시, 부드러운 팔이 내 팔을 감싸며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 찰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이잉! 소리가 나더니, 나와 아리가 찍힌 자그마한 사진이 튀어나왔다.
— 툭!
집중하라는 신호.
아리는 곧,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자를 적었다.
「Ahri ♥ Cain」
“어때! 귀엽지?”
“그러게.”
내 영문 이름은 Han Gain이지, Han Cain이 아니다.
아리가 이걸 헷갈렸을까?
“그러고 보니, 네 남동생은 잘 지내?”
“… 잘 있더라.”
내 동생은 남동생이 아니라 여동생이고, 이 정도는 동료들은 물론 아리도 잘 안다.
Cain도 남동생도 실수가 아니라는 것.
“…”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신화를 연상시킨 건가?
다음으로 아리는 나와 함께 커피숍을 거닐기 시작했다.
“너랑 같이 걷다 보면 예전 생각이 좀 나네.”
“예전 생각?”
“호텔에서의 기억 말이야.”
“어떤 부분?”
“음, 206호?”
206호, 100일 후에 부활하는 마왕.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무서운 방이었어! 모든 죄수를 통틀어 마왕이 가장 강한 존재 아니었을까?”
“글쎄, 우리 수준에서 파악하긴 힘들지. 토끼의 눈으로 보면 늑대나 호랑이나 비슷할 테니까.”
“206호에서 이성의 결사가 마왕을 봉인한 방법도 끔찍했어. 그렇지 않아?”
206호에서 이성의 결사가 마왕을 봉인한 수단, 크게 세 가지였지?
마왕 조각 위에 도시를 건설하며 만들어진 생존한 인류 전체의 영적 질량.
불굴의 이성이 인신 공양을 통해 뿜어내는 초자연성을 억제하는 힘.
시간 지배자의 시간 왜곡.
— 탁!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라는 신호다.
“상상만 해도 무섭지 않아? 마왕이 현실에 있다면 -”
그 순간.
— 우르릉!
커피숍 밖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아리를 보니 순식간에 핏기 없이 창백해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지금의 현상은 아리의 의도가 아니다.
곧, 아리가 입술을 깨물며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마왕이 현실에 있다면, 정말 무서울 거야.”
“… 그러게.”
해석.
마왕에 대응하는 존재가 현실에 있다.
다른 방의 다른 죄수도 많은데 굳이 ‘마왕’을 언급한 이유는?
봉인 방법이 206호와 유사하니까?
“어쩌면, 마왕의 정체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아는 것일지도. 넌 실제로 본 적 있으니까.”
마왕은 아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실제로 본 적 있다.
뒤집으면, 아리는 실제로 본 적 없다?
— 파앗!
아리의 입술이 찢어지고 팔목이 푹 패였다.
마치, 선을 넘지 말라는 누군가의 경고 같다.
“…”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가인아, 너도 영화나 소설 좋아하지?”
“좋아하지. 무척 좋아해.”
“나도 그래. 예전에, 심해의 호텔에서 나온 후에 정말 많이 봤지.”
“재밌었겠네.”
“그중에서도 루프물, 무한 회귀물 같은 게 참 좋았어.”
“…”
“내 경험과 대조하면서 보니까 정말 미친 듯이 재밌었지.”
“그래?”
“근데, 이거 알아?”
“뭐?”
“꽤 많은 회귀물, 루프물은 개연성에 오류가 있다는 거? 나는 이걸 최근에 알았어.”
“… 잘 모르겠어.”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일본식 이세계물에 비유해볼게. 주인공이 판타지 세상에 떨어졌다면, 상식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어…. 내가 그쪽은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보통은 언어가 달라야지. 지구 내에서도 언어가 천차만별인데, 이세계에서 일본어를 쓸 리 없잖아.”
“그렇네.”
“하지만, 언어를 익히느라 고생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경우는 없어. 이런저런 이유로 이세계 언어가 일본어일 때가 많지. 왜일까?”
그야 뻔하다.
2~3년 언어만 익히는 장면 따위는 재미도 없으니, 작가가 넘겼겠지.
독자들도 짐작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3년 동안 글공부하는 주인공을 볼 생각은 없으니 따지지 않는 거고.
“편의적인 장치…. 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호텔도 언어는 통일해줬으니까.”
“맞아. 편의적인 장치지. 그리고, 그런 게 회귀물에도 있어.”
— 우르릉!
다시금, 천둥소리가 들렸다.
“현실에서 실제 회귀가 일어난다면, 발생할 수 있는 일.”
“…”
“어쩌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인데, 편의적으로 넘어가는 – 흐으….”
이 시점에서 아리의 상의가 피로 물들었다.
이쯤 되자 아리도 고통을 참기 힘들었는지, 헐떡이기 시작했다.
“…”
창작물이 아닌 현실에서 회귀나 루프가 존재한다면, 높은 확률로 일어나야 하는 일.
하지만 대부분의 창작물에선 묘사하지 않는 것.
뭔가,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모르겠다.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는 건 무리겠지?
“마…. 마지막이야. 저기…. 저기로 가자.”
이미 아리의 표정이 숨넘어갈 것 같았기에 재빨리 아리 옆에 붙어서 부축했다.
아리와 함께 도착한 장소는 도착하자마자 봤던 거대한 액자 앞이었다.
여전히 검은 천이 액자를 가리고 있었다.
“… 걷어.”
다가가서 천을 잡는 순간.
— 우르릉! 쿠궁!
“…”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멈추었다.
액자라면 분명 사진 혹은 그림이 있겠지.
그걸 내가 본 후에도 아리가 멀쩡할 수 있을까?
“걷어.”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아리를 보았을 때, 그녀의 눈빛에서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았다.
여기서 더 주저하는 건 아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 펄럭!
신비로운 –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마치 그리스·로마 신전과 같은 배경.
중앙의 액자 속 액자에는 태양을 등지고 나아가는 배가 보인다.
신전 바닥과 액자 속 물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투명하게 주변을 반사했는데, 흡사 거울과 같았다.
여기까지 인지한 순간.
— 우르릉!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천둥소리와 함께 공간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악!”
거침없이 뻗어온 파괴적인 기세가 삽시간에 커피숍을 무너트리고, 하늘에는 불가해한 눈동자가 나타난다.
저 눈동자!
오래전, 꿈의 왕국을 처음 얻었을 때 조우했던 존재?
“어이쿠!”
눈이 피를 흘리고 있다.
‘바깥’에서 침략해온 광포한 사슬이 눈을 옭아매고 있다!
설마 외부의 침략을 저 눈이 상당 부분 막아줬나?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리가 흐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선을 꽤 여러 번 넘은 것 치고는 아직 버틸 만하다 했더니…. 당신 덕분이었네요.”
피 흘리는 눈이 나를 본다.
그 어떤 말도, 글귀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꿈의 왕국’이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를 이해했다.
‘이 여자의 꿈에서 나가라.’
‘나가서, 네 꿈으로 돌아가라. 그곳은 안전하다.’
— 우르릉!
내게 체중을 기대던 소녀가 나를 가볍게 밀어낸다.
“으읏!”
“가인아, 시키는 대로 해. 네 꿈으로 돌아가.”
“나랑, 나랑 같이 -”
“안되는 것 알지?”
숨이 멎었다.
“… 아리야.”
“괜찮을 거야. 아마, 괜찮을 거야.”
“괜찮지 않으면? 네가, 선을 너무 많이 넘었다면 -”
아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만약 그렇다면, 가인아.”
부드러운 촉감이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우리, 다음 세상에서 만나!”
— 우르릉!
이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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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호텔 탈출기-5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