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81)
EP.581 581화 – 누군가의 시작, 누군가의 끝
581화 – 누군가의 시작, 누군가의 끝
– 한가인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 영상 – 혹은,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통찰을 얻은 이래 이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한 적 있었나?
축복이 멀쩡할 때도 불가능했던 일인데….
후원자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대가를 치러서라도 알아야 하는 정보다.
*
서늘한 바람, 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봄기운.
제주도의 2월 날씨에 대한 내 소감이다.
오전부터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 이대로 계속 여행이나 다녔으면 좋겠네.
입시에 성공한 것까진 진짜 좋은데, 막상 개학 시기가 다가오니 마음이 무거워.
“후우….”
“왜 한숨 쉬어?”
“으앗!”
누, 누구야?
놀라서 뒤를 보니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남자애가 있었다.
“그, 근처 사니?”
“왜 한숨 쉬냐니까?”
여기 사는 애인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대뜸 반말하니 어이없었지만, 기묘하게도 화나진 않았다.
“여행이 끝나는 대로 대학에 가야 하니까.”
“대학?”
“넌 모르겠지만, 요즘은 대학 간다고 놀면 안 돼. 1학년부터 학점을 잘 따놔야 -”
“킥!”
“…”
“아하하! 에헤헷!”
소년은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한 말 어디가 이렇게 웃기지?
“아, 미안. 네 말이 너무 웃겨서 참지 못했네.”
“… 웃음 포인트가 있었어?”
“있지.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미리부터 김칫국 마시고 걱정 중인데, 웃지 않고 배겨?”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한다? 무슨 말일까?
“그보다 가인아, 잠깐 멈춰봐.”
멈췄다.
갑자기 내 이름을 말하니 놀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
“냄새.”
“뭐?”
“주변 냄새에 정신을 집중해 봐.”
“…”
그 말을 듣고 보니, 살짝 시큼하면서도 탄 듯한 냄새가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다.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소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
이해할 수 없는 청량한 기운이 주변을 감싼다.
“고마운 줄 알아. 내가 한번 널 살려준 거야.”
이게 무슨 말일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무언가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불교에는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개념이 있어. 중생이 죽고 나면, 생전의 삶에 따라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에서 환생한다는 거야.”
“…”
“힌두교에도 윤회, 환생과 관련한 개념이 있지. 넌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니, 내게 질문한다.
기묘하게도 소년이 주도하는 분위기를 거스르기 힘들었다.
“환생 같은 건 믿지 않는데? 그냥, 현실의 고달픈 삶에 지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
“스탑, 스탑! 환생이 실제로 있다고 치고 말해봐.”
환생이 실제로 있다?
“글쎄, 재미있는 개념이긴 한데 불합리하지.”
“왜?”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의 대가를 다음 생에서 받는 거잖아.”
“그 말은 죄를 지은 중생과 지옥도에서 환생한 중생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지? 왜?”
환생 전후의 존재는 같은 사람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다른 사람이지. 인격과 기억이 다르잖아.”
“인격과 기억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다?”
“그래.”
반박할 것 같던 소년이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봐. 하지만, 악인이 환생해서 또 악인이 된다면 어떨까? 미리부터 지옥에 떨어트려서 피해자를 지켜야 하지 않아?”
“마치, 어린 시절의 히틀러가 눈앞에 있으면 죽여야 하냐는 말 같네.”
“비슷하지.”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은 명확하다.
“나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봐.”
“전제가 틀렸다?”
“악인이 환생하면 다시 악인이 되고, 어린 시절의 히틀러는 무조건 학살자가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잖아?”
“…”
“타고난 성품의 차이는 있겠지만, 악인의 씨앗 같은 건 없어. 예를 들어 볼까?”
“…”
“한국에서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면 강도가 나쁜 놈이지. 하지만 30년째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에서 강도에게 털렸다면? 목숨은 살려줬으니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은, 선진국의 선량한 시민들도 소말리아에서 태어나서 컸으면 사고방식이 달랐을 거라는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학살자의 운명이 예비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어린 히틀러를 미리 죽이는 건 무의미한 살인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넌 어느 쪽이지?”
“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올레길에 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임을 알았다.
*
나는 어느 쪽일까?
고민하는 사이, 기억은 바람처럼 흘러갔다.
슬슬 머리가 아프다.
*
평온한 오후 3시.
한라봉 농장을 거닐며 향긋한 향을 즐겼다.
여기저기엔 관광객을 위한 한라봉 바구니가 걸려있었는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 역시 여행이나 계속 다니는 게 –
“…?”
착각인가?
외진 곳의 농장이라 나 같은 관광객도 드물다고 들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많아졌다.
이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안녕!”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애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인상,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인다.
나처럼 서울에서 관광하러 온 사람인가?
아니면 농장 주인 딸?
“어…. 안녕?”
“오늘로 벌써 두 번째.”
“뭐?”
“아니야. 귤 맛있어?”
역시 농장 주인 딸인가?
“아, 맛있어! 껍질 까기가 좀 어렵긴 한데,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게 진짜 좋네.”
— 짝!
소녀는 내 말에 답하는 대신,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손뼉을 쳤다.
“…”
— 짝!
“뭐해?”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서 낮추는 중.”
“뭐?”
“넌 정말 내게 고마워해야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비슷한 말을 아까 들은 것 같은데, 기묘하게도 오전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한라봉, 이리 줘봐.”
“어?”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 손에서 한라봉을 가져가더니, 꼭지를 툭 떼어내며 순식간에 껍질을 벗겼다.
“보이지? 꼭지부터 떼어내는 거야. 밑에 부분을 건드리지 말고.”
“고마워.”
“어느 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어?”
“온 세상이 전부 물에 잠길 정도로 많은 비야. 이대로라면 세상에 물고기만 살아남을 대 위기지.”
“…”
한라봉 껍질 벗기기에서 갑자기 대홍수?
뜬금없는 화제 전환이다.
“세상의 명맥을 잇기 위해 방주를 만들었어. 방주에 세상 각지의 생존자를 담았지.”
“노아의 방주 이야기야?”
“비슷한데, 후반 전개가 좀 틀려.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거든.”
방주가 다 찬 후에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
벌써 분위기가 싸하다.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미 탑승한 자들을 전부 죽이고, 빈 자리에 자기들이 대신 탔어.”
“…”
비극적인 이야기다.
“어떻게 생각해?”
“끔찍한 이야기네.”
“방주를 빼앗은 사람들은 악인일까?”
“…”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 선인이 되기 위해선 얌전히 홍수에 휩쓸려 죽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네. 굳이 답하자면, 관점의 차이다 정도.”
“관점?”
“방주에 앞서 탄 사람들이 보기엔 뒤에 온 사람들은 악마나 다름 없지. 뒤에 온 사람들이 보기엔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만약에….”
“만약에?”
“이런 일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 같다면 어떨까?”
“무서운 이야기네.”
“또 있어. 앞서 탑승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생존자가 있다고 치자.”
“더 끔찍한데?”
“그 생존자는 어린 시절의 일을 전혀 모른 채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야 과거의 일을 알았어.”
“…”
“어떻게 행동할까?”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굳이 비유하자면, 평생 길러준 부모님이 알고 보니 어린 시절 내 진짜 부모를 잔인하게 죽인 납치범인 상황 같다.
“… 어렵다. 모르겠어.”
흥미롭게도 소녀가 같이 한숨 쉬었다.
“맞아. 나도 모르겠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문득, 인기척이 없다 싶어 고개를 드니 나 혼자 남아있었다.
*
알 듯 모를 듯 한 이야기들.
‘방주’라는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젠 진짜 두통을 견디기 힘들다.
*
저녁.
오후 내내 이어진 관광을 끝내고 호텔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건너편에 누군가 앉았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제법 쾌활한 인상이었다.
“이야~ 하루 종일 알차게 보내는구나?”
“예?”
“너, 커피 다 마시는 대로 호텔에 갈 생각이지?”
“… 그런데요?”
“그렇게 해.”
“네?”
“개수작이 더 남아있긴 한데, 신경쓸 것 없다. 호텔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두의 손에서 벗어나니까.”
개수작이 더 남아있다?
호텔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두의 손에서 벗어난다?
대관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북한 느낌이 들어서 즉시 일어서는 순간 –
단단한 손이 내 팔을 잡았다.
“…”
“야, 야 다시 앉아.”
“놓지 않으면 소리 질러서 -”
“아오~! 인마, 꼬마애랑 여자애는 괜찮은데 성인 남자는 안되냐? 차별이 심하네!”
“무슨 말입니까?”
“앉으라니까? 내가 케이크랑 커피 더 사줄테니까 좀 앉아.”
“…”
“형이 해줄 말이 있어서 그래. 너, 나중 가면 내게 엄청 고마워할걸?”
결국 앉았다.
느낌이긴 한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으니까.
“오늘은 너한테도 중요한 날이지만, 사실 나한테 진짜 중요한 날이거든.”
“왜죠?”
“야, 가인아. 네 생각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뭐 같냐?”
“…”
뜬금없는 화제 전환이 뭔가 익숙했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것 같다.
“… 세계 평화?”
“오~! 어렵긴 하네. 또 말해봐.”
“우주 여행?”
“그것도 인정! 더 어려운 걸 말해봐.”
“은하 정복?”
“거창한데? 그런데 네가 말한 것들보다 더 어려운 게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네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천국’을 만드는 일이라고 봐.”
천국?
“너, 천국이 어떤 장소인지 상상해볼 수 있냐?”
“… 음, 젖과 꿀이 가득하고 -”
“우유 1L에 3000원도 안 한다. 꿀도 비슷하지. 그거 잔뜩 사면 천국이냐?”
“모,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장소 아닐까요?”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장소? 야, 지금도 선진국 시민은 대부분 잘 먹고 잘 사는데?”
말문이 탁 막혔다.
“재밌는 사실 알려줄게. 세상 사람들은 지옥을 떠올리라고 하면 온갖 해괴망측한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천국을 떠올리라고 하면 다 너처럼 탁 막힌다.”
“…”
“심지어 창작물에서조차 지옥 묘사는 기가막힌데 천국은 표현하기 어려워해. 어째서인지 아냐?”
“모두가 행복한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네요.”
“그거야. 물질적인 풍요까진 상상 가능한데, 그 이상을 떠올리기가 너무 힘들거든.”
“…”
“사람은 본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타인의 실패를 필요로 하거든. 예컨대, 지금 너처럼 수능을 잘 봐서 얻는 행복이 좋은 예시야.”
경쟁을 통해 얻는 성취감은 본질적으로 ‘모두’가 공유할 수 없다.
승자가 있다면, 패자가 있음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행복은 대체로 타인의 불행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천국이라는 건, 사람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지.”
여기까지 들으니 왜 천국을 만드는 일이 제일 어렵다는 지 이해했다.
“이런 말을 하시려고 절 붙잡고 계신 건가요?”
“더 들어봐. 만약 네가 신이라고 치자.”
“예?”
“전지전능까진 아닌데, 우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존재야. 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없다시피 해.”
“…”
“어떻게 해야 천국을 만들 수 있겠냐?”
“모르겠네요. 제가 상상도 못할 방법일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남자는 슬쩍 웃더니, 갑자기 시선을 살짝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내가 오늘 밤 묵을 호텔이었다.
“세상에는 바로 그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있다.”
“네?”
“그런데, 그 분은 천국을 만들기 위해 100만개의 지옥을 만들어냈지.”
천국을 만들려고 100만개의 지옥을 만들어?
이게 뭔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유가 뭐일 것 같냐?”
“…”
“천국을 만든답시고 100만 지옥을 만드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지?”
이상한 질문이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적절한 답이 갑자기 떠올랐다.
“마지막에.”
“마지막에?”
“마지막에 결국 천국을 만들기만 하면, 그 전의 모든 실패를 없앨 수 있다고 믿어서?”
“…”
“100만, 아니 1000만의 지옥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천국을 만들어내면…. 과거의 1000만 지옥조차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닐까요?”
조용한 침묵.
나는, ‘이번에도’ 이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 너.”
이번에는 아니었다.
“네?”
“예리한 구석이 있구나. 네가 무슨 조각을 얻을지 알 것 같다.”
“예?”
“호텔로 가자꾸나.”
“저랑 같은 호텔 예약하셨나요?”
“장소는 비슷한데, 목적지가 다르지.”
“무슨 말이죠?”
어느새 몸을 일으킨 남자가 고요한 눈으로 호텔을 바라본다.
“너는 이제 시작이지만, 나는 이제 끝이거든.”
*
이것이 통찰이 보여준 마지막 기억이었다.
“으으…. 으아악!”
“오, 오빠! 괜찮아요?”
“가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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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호텔 탈출기-58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