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83)
EP.583 583화 – 폭풍전야 – 이상한 세상의 소녀 (2)
583화 – 폭풍전야 – 이상한 세상의 소녀 (2)
– 한가인
현실과 비현실, 각성과 꿈의 경계에서 부유하며 생각한다.
지금 날짜가 얼마나 되었을까?
내가 보는 동료들의 모습은 현재 진행인가?
아니면 과거의 일을 올빼미가 각색해서 보여주는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눈앞의 은솔 누나가 어떻게든 입을 여는 모습은 제법 흥미로웠다.
*
“소, 소피아! 오랜만이야. 소식은 들었어. 그, 관리국에서 새로운 몸을 만들어줬다고?”
소피아는 1970년대 미국 영화에 나올법한 20대 초반의 고전미인을 닮아 있었다.
외양도 외양인데, 옷차림과 머리 및 화장 스타일 자체가 그런 느낌이다.
물론, 그녀가 중세 시대에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소피아 기준으론 ‘최신 유행’일지도 모르지.
“네. 보여드려요?”
소피아가 가볍게 웃더니, 마치 패션쇼 하듯이 빙그르르 돌았다.
“우와~! 소피아, 정말 예쁘네!”
이 말 만큼은 은솔 누나의 진심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그다음은 그렇지 않았다.
“우, 우리 식사나 할까? 전에 내가 해줬던 비프스튜인데, 기억하니?”
“… 죄송해요.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은솔 누나가 어린 시절의 소피아에게 해주었다는 비프스튜.
누나에겐 고작해야 반년 정도 전이지만, 소피아에겐 한 500년 전 이야기다.
애초에 은솔 누나도 저 스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긴 할까?
그냥, 소피아가 온다고 하니 급하게 떠올린 정도라고 본다.
“어린 시절의 널 보면서 네가 크면 어떻게 자랄까 궁금하곤 했는데….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어.”
“다시 보니까 저도 비슷한 생각이 드네요.”
“비슷한 생각?”
“이런 모습이셨구나? 어머니 모습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소피아의 기억 속 은솔 누나와 실제 모습이 달랐던 모양이다.
수백 년의 간극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7호에선 낙후한 중세의 미망인 역할이었고, 현실에선 성공한 사업가니까 완전히 다른 위치기도 하고.
“음, 많이 달라? 으음…. 그때가 더 예뻤나? 아무래도 반년은 젊었으니까!”
농담으로 받는 은솔 누나와 달리 소피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얼굴보다도 체격. 생각보다 작은 분이셨네요. 어릴 때는 되게 크게 느꼈는데.”
“… 그래?”
어린 소녀가 생각하는 어머니는 실제 체격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겠지.
지금은 소피아의 키가 은솔 누나보다 크다.
“얼굴도 다르긴 해요.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실제 당신의 모습과 거울에 비춘 내 모습을 섞어서 기억했었네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기 마련.
소피아는 그 공백을 거울에 비춘 본인 얼굴로 채웠던 모양이다.
“그, 그러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무래도 소피아가 워낙 고우니까 -”
“그런 의미는 아니랍니다.”
그 후로는 다소 겉도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관리국이 몸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연구원으로 일해달라 부탁했어요.”
“수락했구나?”
“돌아가는 정황을 보니, 관리국과 여러분이 딱히 적대적인 것 같진 않아서….”
“맞아. 실제 임무를 받은 적은 없지만, 나도 명목상 요원인걸?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요원이 아니라 연구원이야?”
“관리국은 제가 루프를 견딜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누가 루프를 견딜 수 있는지 100% 확실하게 알아낼 방법은 없다고 들었다.
호텔 탈출자들이 루프를 견딜 수 있다는 정보는 과거의 탈출자들이 그러했기에 귀납적으로 얻은 결론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독립했으니까 승엽이의 함은 비었겠네.”
“지금은 본인 영혼을 담았다고 하더군요.”
“아~ 그러면 그 녀석, 207호에서처럼 죽어도 부활하려나?”
“으음…. 그 소년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어머니보다도 포르투나 때문에 놀랐지요.”
“그, 그래?”
“어마어마한 충격 요법이었답니다. 내가 아는 포르투나는 지옥에서 올라온 대악마가 따로 없었는데, 현실로 와보니까….”
“어땠는데?”
“무슨, 본인이 방배 중학교 일인자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는 꼬마가 있었어요.”
“…”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순수한 모습’을 되찾은 승엽이.
분명 이자성의 가르침을 되뇌며 칼 한 자루로 반신을 쪼개고 하늘을 갈랐던 순간도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방배중학교 서열 1위만 남았다.
무공까지 익혔으면서 아직도 롤 점수는 애매하다는 말도 들었다.
특출난 신체 능력으로 게임에 집중하는 대신, 스킬 사이사이에 욕설을 쓰면서 애들하고 싸우느라 바쁘다던가?
아니, 내 동료긴 하지만 이게 말이 됨?
“덕분이에요.”
“더, 덕분? 무슨 덕분?”
“그 애가 엄청난 충격 요법을 가해준 덕에 현실에 빠르게 적응했거든요. 아~ 내가 알던 여러분과 실제 여러분은 완전히! 180도 다른 사람이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승엽이는 좀 심해!”
“어머니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실제가 다를 수 있겠구나.”
“스, 승엽이만큼은 아니라니까?”
“풋! 그래도 동료인데, 너무 공격하시는 것 아니에요?”
즐겁게 웃는 두 사람.
점점 친해지고 자연스러워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건 확실히 승엽이 덕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행운의 소년은 모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게 아닐까?
악역 연기 맞지?
“처음엔 솔직히 충격이었어요. 요즘 말로 치면, 정체성의 혼돈?”
“소피아….”
“내가 살아온 삶이 허상이다? 진실한 세상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다름없다?”
“…”
은솔 누나는 물론이고 듣고 있던 나까지 말문이 탁 막혔다.
과거, 환마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정신이 무너졌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 팅!
소피아가 갑자기 스튜 그릇 속에 찻잔을 넣었다.
“그릇 속의 찻잔. 이게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이죠?”
“그릇이 현실이고 찻잔이 207호?”
“네.”
그릇 속의 찻잔.
현실 속의 호텔.
“그릇에서 살아가는 이가 보기엔, 207호는 허상이겠죠.”
“…”
“하지만, 그릇 밖을 보세요.”
“그릇 밖?”
“테이블이 보이시나요?”
찻잔 밖에는 그릇이 있다.
그릇 밖에는 테이블이 있다.
심지어, 테이블조차 끝이 아니다.
“마치 저주의 방처럼, 현실 또한 루프를 거듭하죠. 심지어 호텔에선 ‘꿈’이라는 힘을 통해 현실을 마음대로 덧칠하기까지 해요.”
은솔 누나도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호텔이 테이블일까?”
“글쎄요? 다만,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죠. 진실로 드높은 자의 시선에서 보면, 저주의 방이나 현실이나 별 차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
호텔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존재 – 부처가 보기엔, 현실이나 저주의 방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둘 다 붓질 한 번이면 무엇이든 뒤바꿀 수 있는 그림에 불과하다.
… 이런 위대한 존재조차 천국을 빚어내지 못했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어쩌면, 불변하는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상이 아닐까.”
만상이 허상이라면, 허상 속에서 태어난 소피아가 현실의 사람들보다 부족한 것도 없는 셈이다.
“네 마음이 편해졌다니 다행이네.”
대화가 끝날 무렵, 소피아가 누나의 손을 잡고 물었다.
“이것만큼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래.”
“제가 딸처럼 느껴지시나요?”
누나는 1분 가까이 침묵한 후,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아닌 것 같아.”
“이해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관계가 꼭 어머니와 딸일 필요는 없지. 나는 너를 동료라고 생각하고 싶어.”
“…”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소피아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서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은솔 누나도 체념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을 때, 소피아가 빙그레 웃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떻게 잘 풀린 것 같다.
두 사람의 문제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문제는 아니니까.
서서히 의식이 흐릿해진다.
동료들의 상황을 한 번씩 보았으니, 기묘한 꿈도 끝나려는 모양 –
어?
갑자기 단단한 압력이 내 의식을 거칠게 끌어당긴다!
이전이 편안하게 부유하는 느낌이었다면, 조금 전부터는 완전히 다르다.
명백히 ‘다른 존재’의 손길이 날 거칠게 붙잡고 이끄는 것 같은데?
의식이 멀리, 아주 멀리 – 끝없이 먼 장소로 날아간다.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또한 확 빨라진 듯한 기묘한 감각.
불현듯, 신비로운 깨달음이 뇌리에 스며들었다.
조금 전까지 내 정신을 이끌었던 존재가 ‘올빼미’라면 지금은 아예 다른 존재!
비밀 당신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양복 입은 남자의 환영이 스쳤다.
어떤 대화도 없었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이심전심이라는 표현이 딱 맞겠지.
그는 내게 ‘아리를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 파아앗!
순식간에 시야가 맑아지며 주변 풍경이 느껴졌다.
굳이 묘사하자면, 핵전쟁 후 멸망한 도시 같은 장소였다.
*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폐허 속을 거니는 아름다운 소녀.
아, 안녕?
반사적으로 인사했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다.
애초에 지금 보는 장면이 현재 진행형인지 과거인지부터가 불확실하다.
— 끄르륵!
기괴한 울음을 토하며 나타난 벌레 같은 괴생물들이 톱날 같은 이빨을 들이대며 달려들었다.
아리는 윙 부츠의 힘으로 떠오르며 자리를 피했다.
다음은 폐허 속 더 깊은 장소.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가득했는데, 아리는 그 전선들을 엮어서 기계 같은 것을 작동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고 아리는 뭘 하는 거야?
상태창은 왜 이 장소를 찾지 못하고 ‘검색 중’만 뜨는 거지?
— 우르릉!
세상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진동!
폐허 전체에서 흙먼지가 쏟아지는 순간, 아리는 유유히 허공에 떠오른 채 미리 준비한 은신처 같은 장소로 숨어들었다.
이미 이 장소, 이 현상에 적응한 모습이다.
— 쉬이잇!
진동이 끝날 때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타나는 희끄무레한 존재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난적이다 싶어 긴장하는 순간 –
아리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 찰칵!
손가락 딸깍 한 번에 정체불명의 혼돈체가 단박에 사라진다.
감탄이 나오는 성능을 보니, 아리가 카메라를 천고의 보물이라 칭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후유….”
기나긴 한숨.
하루하루 생존하느라 전심전력을 쓰며 지쳐버린 모습이다.
당장은 본인의 무력과 유용한 도구들 덕에 버티고 있지만, 결국 시간 문제겠지.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살아남을 도리가 없어 보였다.
“하아…. 부처님. 이왕 살려주신 김에 제대로 살려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맨입도 아니고, 꿈을 썼잖아요.”
요전에 꿈을 써서 탈출했구나?
“관리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보내준 것까진 좋은데, 여긴 좀 아니잖아요.”
관리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
“이대로는 길어야 두 달이면 – 어?”
바로 그 순간, 허공에 나풀거리는 깃털이 생겨났다.
이 장소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깃털이 느릿하게 부유하며 아리의 얼굴로 다가가더니, 오뚝한 코 위에 내려앉았다.
“…”
어딘가 깊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
곧, 그녀는 정체 모를 희망을 느낀 듯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이곳은 영락한 신의 영역.”
…
“종말을 피하려고 모두의 손으로 빚어냈지만, 우리 손으로 버린 위대한 자.”
…
“본질적으로 은솔이가 이계에서 본 존재와 유사한 개체.”
— 파아앗!
이것을 끝으로 내 의식이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리가 손톱만큼 작아지고, 은신처는 손바닥보다 작아졌다!
시선이 아리가 숨어지내는 폐허,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높은 장소로 이동했을 때 –
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한없이 아득한 자.
버림받고 영락한 끝에 지성조차 잃은 저능한 신.
아아…!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생각했다.
아리는 지금 거대한 생물의 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