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87)
EP.587 587화 – 도둑맞은 세계 (2)
587화 – 도둑맞은 세계 (2)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181일 차
현재 위치 : 서울시 영등포구 딜라이트 호텔
현자의 조언 : 2」
– 한가인
관리국은 종말을 피하기 위한 방주를 제작 중인데, 우리는 물론이고 동료의 가족들이 자리를 얻지 못한 상황.
따라서 좌석을 강제로라도 얻어내자는 라이언 레이놀드의 제안을 들은 몇몇 동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가족을 살리지 않은 사람이나 송이처럼 현실을 가볍게 여기는 이에겐 대수롭지 않은 유혹이지.
하지만, 상현 형이나 묵성 할아버지라면 어떨까?
두 사람이 일반인 가족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답은 나와 있다.
두 사람이 꿈으로 빚어낸 가족을 무가치한 환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면, 가족을 미국으로 피난시키겠다며 요란을 떨었을 리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
장담하는데, 이 괴악한 노인네는 필멸자 가족 ‘따위’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라고 본다.
방주를 공략하려는 데에는 필시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
상현 형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리국과 협상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우리가 호텔 탈출자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배려해 주지 않은 -”
라이언이 피식 웃으며 형의 말을 끊었다.
“협상하면? 자네 가족이 사실상 관리국에 인질로 잡힌다는 생각은 안 하나? 혹시 관리국은 철저히 믿는 편이야? 그럴 거면 왜 여태 참가자임을 숨겼지?”
참가자임을 숨겼다는 말은 곧, 관리국을 불신한다는 의미.
그런 주제에 관리국의 자비에 가족의 생사를 맡길 생각이냐는 지적에 형의 눈동자가 떨렸다.
미묘하게 상대가 주도권을 잡은 상황이라 흐름을 끊을 필요성을 느꼈다.
“할아버지, 형. 둘 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 화르르!
빙그레 웃으며 태양을 소환하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신성한 태양의 본질 역시 방주의 일종이며, 동료들 역시 여기까진 알고 있다.
“영혼을 여기에 담으면 됩니다.”
“하~! 가인이 네 유산이 무엇인지 잊었구나! 그렇지! 영혼만 지켜내면, 몸은 뭐, 다음 루프의 관리국이 만들어 주면 그만이지!”
할아버지가 다시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라이언은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대신,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
“…”
“그러니까, 그 불덩이가 영혼을 담는 도구라는 말이지?”
“…”
“나와 싸울 때는 영혼을 태워서 힘을 얻은 건가?”
두 동료를 안심시키기 위해 신성한 태양을 강조한 결과, 라이언 역시 태양의 원리를 일부 이해한 셈이다.
이런 때는 상대 역시 소통의 주인이라는 점이 껄끄러웠다.
할아버지의 대화창을 염탐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단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협력해야 할 필요는 있지. 친구, 자네 동료 중 몇몇이 방주에 잡혀갔지?”
“그래.”
“왜 잡혀갔나 생각해 본 적 있나? 호텔 참가자는 방주 없이도 루프를 견딜 수 있는데, 방주에 왜 태웠냔 말이지!”
“…”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은솔 누나, 승엽이, 미로, 진철 형 넷 다 호텔 참가자이므로 방주에 의존하지 않고도 루프를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왜 귀하디귀한 방주의 자리를 내줬지?
“같은 시기에 깨어나기 위해서다.”
“아?”
“루프 후 요원의 각성 시기는 네 상상 이상으로 넓게 떨어져 있지. 가장 이른 자와 늦은 자 사이엔 1,000년 이상의 격차가 있다는 설도 있다고? 여기 까진 나도 겪은 적은 없다만.”
“…”
“전투력은 물론, 혼돈체에 대한 대응능력이 부족한 일반인만 태웠다 치자. 걔네가 단체로 서기 800년에 깨어났는데,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각성한 요원, 즉 보호자가 없다?”
이해했다.
일반인만 방주에 태워서 다음 루프에 보냈는데, 깨어나고 보니 주변에 악마만 있고 요원이 없다?
이런 참사를 피하려고 강력한 힘을 가진 회귀자도 몇 명 태운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또한, 회귀자라 해도 모두 강자가 아니다.
진철 형의 사수라는 일반 요원의 전투력은 진철 형이 보기엔 ‘한 대 세게 치면 죽는 약골’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므로 보호자 역할에는 호텔 참가자가 적절하다.
“…”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컨대 은솔 누나의 전투력은 미묘하긴 한데, 관리국이 보기엔 호텔 참가자니까 숨겨둔 무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젊은 친구, 충분히 이해한 것 같으니 이제 내가 물으마. 다음 루프에서 네가 각성하는 시점이 네 동료들과 비슷하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니까, 나는 뭐 중세에 깨어나고 상현 형과 묵성 할아버지가 현대에 깨어난다면, 가족을 만나기 힘들지 않겠냐 그 말이네.
상현 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인 군, 나는 설령 내가 없더라도 가인 군이 진솔이와 바람 양을 잘 돌봐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저놈의 말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진솔이랑 바람 양을 지켜줄 거라고?
“마찬가지다. 저놈의 구질구질한 소리 듣지 말고 -”
둘 다 날 너무 과하게 믿는 것 아니야?
— 짝!
가볍게 손뼉 치며 모두를 조용히 시킨 후, 라이언에게 답했다.
“협력하자.”
“말이 짧 – 어? 협력한다고?”
“싫습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도리어 당황하는 라이언.
동료들의 분위기를 보고 내가 거절할 줄 알았나 보다.
“조건은 뭐, 함께 방주를 공략한다? 공략이 끝날 때까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 정도 맞습니까?”
“… 맞네.”
“말로만 하면 서로 믿기 힘들지?”
“그거야 -”
“내일쯤 패트릭이 와서 뭐, 맹약의 서 그런 거 내밀고?”
“… 자네, 혹시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세상 뻔한데 무슨 독심술? 그렇게 합시다. 서로 바쁘니 최대한 빨리 맹약의 서 가져오시죠.”
“…”
조금 전까지는 어떻게든 우릴 유혹하려 했던 라이언이 되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는데, 이 역시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맥을 잘못 잡고 있는 이상, 의심은 그를 점점 더 느리고 둔하게 만들 뿐이므로.
“알겠네. 내일 아침에 -”
의심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던 라이언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기묘한 침묵.
우리는 물론, 라이언조차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새.
“뭡니까?”
라이언은 여전히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며 답했다.
“… 실례했네. 협상은 타결되었고, 내일 아침에 패트릭이 맹약의 서를 가지고 올걸세. 그리고 음, 할 말이 생겼네.”
할 말이 갑자기 생겼다?
흥미롭다는 듯, 묵성 할아버지가 물었다.
“이봐, 혹시 ‘그쪽 지혜’가 계시라도 내렸나?”
“…”
“오? 진짜야? 이거 궁금한데? 뭐라고 했지?”
라이언은 ‘불쾌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물어보라는군. 자네들 중 ‘정의’가 있느냐고.”
갑자기 정의?
“‘정의를 보호하라. 정의가 죽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변수가 생길 것.’”
“이게 무슨 말입니까?”
라이언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해하면 내게도 알려주게. 나도 궁금하니까.”
*
라이언이 떠난 후, 할아버지가 즉시 날 보았다.
“너…. 왜 저놈 손을 잡은 거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는 분위기.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는 우선, 오답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갈 길이 헷갈릴 때는 틀린 길을 치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방주를 만드는 관리국 계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임시방편이니까요.”
“임시방편?”
나는, 동료들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결국 파멸은 일어납니다. 관리국은 종말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잔여 병력을 챙겨서 도주하는 것에 불과하죠.”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국 달의 악마 혹은 종말을 부르는 빛이다.
관리국은 종말의 원인을 막아낼 수 없기에 피난을 택했을 뿐이다.
“저주의 방처럼 생각해 보세요. 해결할 수 없으니까 탈출만 반복하는 거 아닙니까?”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질문! 탈출 기회가 무한할까요?”
“…”
“라이언이 말했잖습니까? 방주 제작에 실패해서 문명이 여러 차례 쇠퇴했다고. 그게 일종의 ‘횟수 차감’이라고 봅니다.”
송이가 끔찍하다는 듯 속삭였다.
“방주 제작에 몇 번 더 실패하면, 언젠가는 21세기 시점이 되어도 막 석기시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달의 악마나 종말을 부르는 빛을 막을 수 없게 될 거야. 막긴커녕, 무슨 일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몰살당하는 일을 반복하겠지.”
그 끝에 남는 건 영원한 원시시대일지도 모른다.
이게 현실의 배드엔딩 중 하나 아닐까?
더 심한 엔딩도 있으리라 본다.
지금으로선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지옥 같은 배드엔딩이 더 있겠지.
나는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담아 동료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목적을 확실히 합시다. 방주 타고 도망가기? 그건 관리국이나 라이언 관련 세력의 목표죠.”
“우리의 목표는….”
“탈출이 아니라 해결입니다. 달의 악마, 종말을 부르는 빛. 얘네 막아야죠.”
관리국은 탈출만 반복하는 오답에 빠졌다.
그들을 수렁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선 방주를 공략해야 한다.
이 일에 라이언 세력이 쌓아온 저력은 유의미한 도움이 될 것.
따라서, 나는 라이언 세력과의 일시적인 협력이 유효하다고 봤다.
설득이 끝난 후, 엘레나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라이언이 마지막에 한 말 말이죠….”
“정체 모를 지혜가 라이언을 통해 전달한 말?”
‘정의를 보호하라. 정의가 죽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변수가 생길 것.’
그 말이 나오자마자 송이가 살짝 웃었다.
“조금 웃겼어요.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위에서 시킨다고 해? 라이언 그 인간이 잘난 척만 했지, 별것 아니라는 증거잖아요?”
반면, 상현 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웃기다기보다는 기시감이 들지 않았습니까?”
“기시감?”
“우리도 종종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곧, 모두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엘레나, 라이언이 한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게 있나요?”
“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엘레나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은 힘을 제대로 쓸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까 -”
“아까?”
“동료들이 휴거 당할 때 그, 정당방위를 쓰려고 했거든요.”
정당방위.
엘레나가 얻은 정의의 세 번째 힘으로, 적이 선공하면 축복 발동의 조건을 크게 완화하는 힘을 말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휴거 상황처럼 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쓰려고 했다니?
“너무 애매해서 그런지 발동은 실패했어요. 억지로 써볼까? 했는데 미로가 제지하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이번이 그, 두 번째라 확신한 건데…. 에스퍼 호에서는 워낙 잠깐이라 확신하지 못했거든요.”
말끝을 흐리는 태도.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 축복이 크게 약해진 것 같다?”
“아?”
정의의 축복이 약해졌다.
이전엔 거짓말 탐지나 명경지수처럼 보조적인 힘 위주로 썼고, 에스퍼 호에서는 전투가 일격에 끝나서 확신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번에 정당방위를 통해 제대로 한번 더 쓰려고 하니 뒤늦게 인지한 것.
“그 말은….”
“저 말고 다른 정의가 있는 것 같아요.”
상현 형이 탄식했다.
“필시 관리국에 소속되어 있겠군요. 그래서 엘레나가 죽으면 안 된다고 한 겁니다. 그랬다간 온전한 정의랑 힘겨루기를 해야 하니까!”
“이런!”
모두가 ‘관리국에 소속된 또 다른 정의의 참가자’에 대해 경계하는 시점.
나는 조금 다른 의문을 품었다.
대체 선대 지혜는 우리 중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선대 정의가 약해진 걸 보고 간접적으로 알았다?
*
회의가 끝난 늦은 시각.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던 차, 인기척을 느꼈다.
— 끼익!
“엘레나?”
“…”
그녀는 말없이 방에 들어오더니 문을 꽉 닫았다.
“… 엘레나?”
그러고는 내게 조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가인 씨.”
“네.”
“아까, 라이언이랑 이야기하는 동안 거짓말 탐지를 썼어요.”
“거짓말이 있었습니까?”
“처음에 뭐, 가족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한 부분이요.”
라이언 본인도 가족을 살리기 위해 방주 자리가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거짓말이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런 놈이 무슨 가족 사랑이 있겠어요? 필시 방주를 노리는 다른 목적이 있겠지.”
이 정도는 예상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엘레나 역시 겨우 이 말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하려는 말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가인 씨도 거짓말을 했죠.”
“…”
“중간에, 할아버님과 의사 선생님을 설득하면서 했던 말이요. 신성한 태양으로 두 사람 가족을 보호할 수 있으니, 라이언의 말에 흔들리지 말라는 거.”
“…”
“거짓말이죠?”
“네.”
“… 살릴 수 없나요?”
“…”
신성한 태양처럼 온갖 능력을 겸비한 유산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주인이 아닌 사람은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심지어 사용자의 숙련도에 영향을 받는 유산의 특성상 과거엔 할 수 없던 일이 지금은 가능한 경우도 있으니, 때로는 주인조차 헷갈리곤 한다.
신성한 태양에 타인의 영혼을 담은 후, 루프 후에 영혼만 해방해서 다시 살릴 수 있는가?
206호 후반, 마왕을 피해 우주공간을 비행하며 영혼을 무수히 토해 봤기에 나는 그 답을 안다.
불가능하다.
삼킬 때의 상태와 뱉을 때의 상태가 전혀 다르고, 후자는 정상적이지 않다.
신성한 태양이 토한 영혼을 육신에 담는 건, 심하게 말하면 괴물 양산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유?
나도 모른다.
그냥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안다.
…
그래서 궁금하다.
분명 ‘주’는 신성한 태양 역시 방주라고 했는데.
정황상 104호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방주와 유사한 존재가 주의 정체가 아닌가 싶었는데….
왜 같은 방주라면서 신성한 태양은 할 수 없는 일을 관리국 방주는 할 수 있지?
“엘레나,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 동료들이 흔들리지 말라고 한 말이잖아요? 선한, 어, 하얀색 거짓말이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성한 태양에게 불가능한 일을 관리국 방주가 할 수 있는 건 맞나?
방주라는 것 자체가 거대한 사기가 아닐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가설 또한 내가 관리국의 선택이 오답이라 확신하는 암묵적 근거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