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88)
EP.588 588화 – 도둑맞은 세계 (3)
588화 – 도둑맞은 세계 (3)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185일 차
현재 위치 : 서울시 영등포구 딜라이트 호텔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우리의 목적은 종말의 저지이다.
또한, 나는 방주 자체가 함정 내지는 사기거나 적어도 오답이라고 확신한다.
라이언의 목적은 방주의 강탈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다르지만, 중간 과정에서 관리국의 방주 완성을 저지하자는 최소한의 이해관계는 일치한 상황.
덕분에 며칠 사이에 상황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소소한 갈등은 있었다.
예컨대 합의를 위해 ‘맹약의 서’를 가지고 나타난 패트릭은 ‘이은솔’이 어디 있냐며 분개했다.
들어보니 은솔 누나가 탐욕의 손을 사용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패트릭이 ‘다소’ 다친 것 같았다.
“으드득! 그 여자는 어디 있지? 덕분에 다리 둘을 모두 잃었으니, 네 동료도 다리 하나는 내주어야 계산이 맞다!”
“조금 다치시긴 했군요.”
“조금? 이 자식이!”
“아이고~! 복수한다고 사라진 다리가 돋아나기라도 합니까? 과거는 잊고 미래의 일을 생각합시다.”
“이 새끼가!”
그 후, 라이언은 마치 친구비를 내는 느낌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완성 후의 방주는 일종의 인공 신과 유사하지만, 제작 중인 지금은 건축물과 유사해. 정확한 완공 시기는 모르지만 -”
나는 알 것 같았다.
호텔에서 6개월, 1년이라는 시간적 힌트를 줬기 때문이다.
6개월 시점에서 방주가 승객을 모으기 시작하고, 거기서 또 6개월이 흐르면 완성되는 구조가 아닐까?
“방주의 위치는 젊은 친구, 자네가 찾을 수 있지?”
상태창으로 미로 등의 위치를 추적하면 그곳에 방주가 있다.
지금은 중국 상공에 있었는데, ‘2차 선별’은 중국에서 시작할 모양이다.
“방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내 동료가 이계에서 탈출하다가 이상한 존재를 불러냈는데 -”
“패트릭의 다리를 자른 존재 말이지?”
“패트릭은 그 존재 역시 방주라고 부르더군요.”
“…”
“동료 말로는 방주와 대면하니 거의 죄수처럼 느껴졌다는데, 이런 신적인 존재를 관리국이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나 역시 궁금하군. 관리국이 죄수급 존재를 창조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단순하게 생각하면?”
“핵심 기술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오래전, 인류가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을 때 생겼을지도 모르지.”
203호처럼 우주를 개척하는 수준의 문명이었다면?
103호에서 드러났듯이 우주 개척 레벨의 문명은 죄수조차 굴복시켜 가축처럼 부릴 수 있으니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재사용 중이다?”
“내 가설이네.”
그럴듯하다.
다만, 이 가설을 받아들이니 슬쩍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조가 그토록 위대했다면, 지금 우리는 대체 얼마나 쇠퇴한 걸까?
물론 이는 라이언의 가설에 불과하다.
“… 당신 상사는 정확한 답을 압니까?”
“상사라고 하니 미묘하게 불쾌한 표현인데, 틀린 말은 아니라 슬프군. 지혜 노인네라면 알 수도 있겠지.”
‘안다’도 아니고 ‘알 수도 있겠지’라니?
“동료면서 너무 정보 공유가 부족한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한 답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우리에 대해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와 지혜 노인네는 같은 파티 출신이 아니야.”
“아?”
“나와 함께 탈출한 내 진짜 동료들은 따로 있었네. 여섯이었고, 셋은 죽었지.”
“…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됩니까?”
“아직 루프를 겪은 적 없어서 와닿지 않는 모양이지? 우리는 종말 이후로도 계속 볼 사이인데, 겨우 이 정도 정보를 숨기는 게 의미가 있다고 보냐?”
“…”
절반 정도는 내 경계심을 낮추려는 말이겠지만, 절반 정도는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설령 죽이더라도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게 라이언이니까.
“그러면 선대 지혜는 당신보다 오래된 사람입니까?”
“훨씬! 단언컨대 너랑 내 간격보다 그놈과 나 사이의 간격이 길다.”
라이언 세력이 떠난 후, 우리끼리 아리의 구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방주에 들이받기 전에 아리 양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가인 오빠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아리를 봤다면서요?”
큰일을 벌이기 전에 아리를 구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는데,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엘레나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애초에 아리에게 꿈의 왕국이 있지 않아요?”
“있죠.”
“그러면, 아리 쪽에서 우리에게 합류할 수도….”
“요전에 말했지만, 아리는 승진하고 얻은 정보를 비유로 제게 알렸습니다.”
아리가 준 정보는 내가 제주도에서 통찰로 더 많은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통찰은 무에서 유를 얻는 게 아니라 작은 정보에서 큰 정보를 유추하는 힘이니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후원자의 개입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아리는 징계를 받았죠.”
할아버지가 다음 말을 이었다.
“침묵하는 자에겐 비밀 유지의 의무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의무 자체야 모든 관리국 요원에게 다 있지만….”
“침묵하는 자의 경우, 의무를 위반하면 ‘석판의 응징’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죠.”
침묵의 석판.
이에 대한 정보는 라이언에게 얻었는데, 정작 라이언도 석판을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위치 또한 모른다고 한다.
“아리의 위치 자체는 계속 검색 중이라고 뜹니다.”
“아리의 위치? 솔직히 그게 뭐가 중요하냐? 애초에 아리에게 꿈의 왕국이 있는데. 평소라면 본인이 직접 우리에게 오면 그만이다.”
할아버지 말대로 아리에게 꿈의 왕국이 있는 이상, 아리의 위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아리가 왜 우리에게 합류할 수 없는지다.
올빼미가 보여준 환상에 따르면, 아리는 지금 정체 모를 이상한 신의 몸 위에 있으며 정황상 그 장소는 석판 역시 개입할 수 없는 모양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리가 섣불리 우리에게 합류하면 그 즉시 석판이 아리는 물론이고 우리까지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 석판이 문제군요.”
“그 돌덩이가 문제야.”
“발견 즉시 최후의 섬광이라도 쏴야 하나 싶습니다.”
“어, 무, 무조건 섬광부터 쏠 생각은 관둬라. 내 생각에는 -”
“요원님, 농담입니다.”
고심 끝에 위와 같은 내용을 적절히 축약해서 – ‘꿈의 왕국’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 라이언에게 전달했다.
“침묵하는 자가 된 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선 석판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는 의외로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그냥 동료 1인이 아니라 ‘침묵하는 자’라는 점이 어필한 것 같았다.
“침묵하는 자가 이쪽에 합류한다면, 방주 공략은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없지.”
“물론입니다.”
그니까 아리 구출에 너도 협력해라.
“석판을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찾는 게 우선 아니냐?”
“그렇지.”
“또 말이 짧 – 됐다. 너, 석판을 본 적 있다고 했지?”
“석판을 본 게 아니고, 석판이 동료를 응징하려는 모습을 봤어.”
거대한 쇠사슬이 꿈의 왕국 내부의 관리자를 공격하고, 나아가서 아리를 죽이려는 광경을 봤다.
“그 정도면 가능할지도….”
“뭐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라이언의 다음 말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뭔가를 찾는 것 하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동료가 있다.”
“아?”
“축복, ‘천리안’의 소유자지.”
*
– 미로
침대에서 깨어났다.
“… 으!”
어디선가 이상한 음악이 들린다.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데, 스피커가 멀리 있나 봐.
“일어나거라.”
보드라운 깃털 이불로 가득한 새하얀 침대.
주변을 보니 침대뿐만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공간 자체가 하얗기 그지없었다.
“미로, 일어나거라.”
“…”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
목소리는 나이 든 남자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누구야?”
“허…! 과거의 기억을 거의 잃었다더니, 정말이로군?”
남자가 섭섭하다는 듯 아쉬워하더니 갑자기 후드를 걷었다.
후드 아래의 모습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의 동양인이었다.
“보고는 받았지만 날 아예 알아보지 못할 줄이야…. 난 자네는 물론이고, 자네 딸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네.”
“딸? 아리?”
“아리를 안내한 사람이 바로 나일세.”
“안내? 어디로?”
“거기까진 말해주기 어렵구나. 그대는 침묵하는 자가 아니니.”
“…”
“기뻐할 일 아닌가? 그대의 딸, 그대의 작품이 그대보다도 더 위대한 영역에 도달한 셈인데.”
느낌상 호텔에 오기 전의 나를 아는 사람 같고, 침묵하는 자인 것 같아.
심지어 아리와도 만나봤다고 한다.
“긴장 풀게. 이미 방주가 아닌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적어도 겉으로는 날 아주 친절히 대한다.
하지만 긴장 풀면 안 돼!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관리국 수뇌부를 다 쓸어버려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이리 오게.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니.”
*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이곳이 방주 내부라는 말을 들었다.
복도 역시 온통 새하얘서 눈이 부실 지경인데, 방주는 다 이런가?
1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상대가 멈췄다.
“미로, 호텔에서 정말 대단한 힘을 얻었구나!”
“응?”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냐?”
“느끼다니? 혹시 간지럽게 하는 음악을 말하는 거야?”
“하하! 간지럽다고? 미로 주변을 보거라.”
“모두 무릎을 꿇고 있네.”
“모두들 기도 중이지.”
“기도?”
“의식을 한 점으로 모으기 위함이다.”
“의식을 모아? 왜?”
“여기까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정말 다 잊었구나?”
“…”
“타박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호텔처럼 험한 장소가 없는데, 탈출한 것만 해도 천운이지. 네가 나왔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해.
이 태도가 연기가 아니라면, 이 사람은 호텔에 들어오기 전의 미로를 동료 혹은 충실한 부하로 여긴 게 아닐까?
“저들은 모두 방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방주의 목소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신. 곧 태어날 신. 모두의 희망이자 구원.”
“…”
“하지만, 방주의 목소리가 네게는 닿지 않는구나. 필시 네 유산이나 축복 때문이겠지.”
불변 때문이네!
괴담 미로의 기억에 따르면, 불변에 대한 정보는 관리국에도 없다.
이 말은 불변을 얻고 탈출한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는 말이지!
그니깐 이 세계에 불변의 주인은 나 혼자야.
난 약해지지 않은 온전한 축복을 유지한 상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미로, 요원이 루프를 견딜 수 있는 이유를 아느냐?”
“몰라.”
“복합적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영적 질량이 크기 때문이다. 호텔 탈출자가 회귀자가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호텔을 오르는 과정에서 영혼이 비대해지기 때문이지.”
“그렇구나!”
“필멸자가 루프 속에서 사그라드는 이유도 그와 같다. 종말이라는 파도를 견디기에 그들의 영혼은 너무나 나약하다.”
“이해했어.”
“그렇다면, 그 나약한 영혼을 한데 모아서 강하게 만들면 어떻겠느냐?”
“뭐?”
“이것이 방주의 근본 원리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비밀을 내게 말해주었다.
“첫 번째 방주는 회귀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뭐?”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받은 이들을 연구한 결과물이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과 선택받은 사람들.
불길한 생각이 여럿 떠올라서 속이 답답해졌다.
유사한 이야기를 과거에 들어본 것 같았다.
그 때, 기묘한 사실을 알았다.
본래 이 장소는 ‘방주의 목소리’ 때문에 다들 정신을 놓고 기도해야 정상이라는 말이잖아?
근데 왜 이 사람은 멀쩡하지?
“당신은? 당신은 괜찮아?”
“괜찮지.”
“당신도 축복이 있구나? 아, 아니면 유산?”
“축복.”
“무슨 축복인지 물어도 돼?”
민감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이번에도 친절히 답했다.
“지배.”
“…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미쳐버린 예지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