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594)
EP.594 594화 – 도둑맞은 세계 (9)
594화 – 도둑맞은 세계 (9)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25일 차
현재 위치 : 호주 노던 준주
현자의 조언 : 0」
– 한가인
관리국은 인류 전체를 주시하며 타락을 벌하고 악마를 멸하는 집단이다.
침묵하는 자는, 그 관리국을 내부에서 통제하는 수뇌부다.
따라서 침묵하는 자는 인류 전체의 감시자라 해도 좋겠지.
바로 이 지점에서 현명한 이는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고대 로마 시절부터 내려온 격언이 있기 때문이다.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인류는 관리국이 감시하고, 관리국은 침묵하는 자가 감시한다고 치자.
그러면 침묵하는 자는 누가 감시하냐는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이 바로 ‘석판’이다.
침묵하는 자의 직위에서 얻은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는 행위.
다수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을 부정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행위.
위와 같은 침묵하는 자의 일탈 행위를 철저히 감시하고, 위반할 경우 영혼째로 으스러트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석판의 존재 이유이리라.
이를 이해했기에 묵성 할아버지는 석판의 파괴를 극구 반대했다.
…
아리를 구하기 위해선 석판을 무력화해야 하는데, 정작 부수면 곤란한 상황.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에 대한 그럴듯한 답은 준비되어 있었다.
과거 한 차례 경험했듯, ‘선대 지혜’에게는 모든 초자연성을 억누르는 정체불명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선생님」
「마법사」
「연구원」
「배신자」
「독선적인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끊임없이 들려오는 불협화음을 느끼며 석판으로 걸어가던 중, 뒤에서 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지금, 지금이란다.”
상현 형이 고개를 까딱하며 답했다.
“당신 보스가 힘을 쓰겠답니까?”
“그래. 그리고 나와 그 노인네는 상하관계가 아니라니까?”
“알겠습니다. 동료라고 해두죠.”
라이언은 본인이 선대 지혜와 대등한 위치라고 믿는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대 지혜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와 힘에 복종하고 따르는 관계.
이게 무슨 동료야?
애초에 선대 지혜 이 인간은 어디 있는거지? 현실에 있긴 한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어쨌든, 내게도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로고.’
“오랜만입니다. 약속대로 석판을 억눌러주시길.”
‘서두르지 말게.’
“…”
‘라이언에게 들었겠지만, 석판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따라서 자네 동료를 구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지.’
“압니다.”
선대 지혜가 석판을 억제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시간이 지나면 석판은 다시 아리를 추격하겠지.
따라서 짧은 시간 동안 아리와 접촉해서 그녀를 별도의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한다.
“시작 -”
‘할 말이 있네.’
“하필 이 타이밍에 말입니까?”
‘지금 말해야 자네가 내 말을 고분고분 들을 것 아닌가?’
맞는 말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첫째, 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게. 그대와 나처럼 위대한 지혜와 접촉하는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는 속삭임을 멀리해야 하는 법.’
“…”
‘둘째, 이제 피차 진솔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네.’
“진솔한 이야기라니….”
‘우리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지.’
라이언과 재회했을 때, 그는 가족을 들먹이며 방주의 자리를 빼앗자고 우리를 유혹했다.
그 말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다.
우리 중 송이 정도만 되어도 꿈으로 만든 가족을 진실한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아.
송이보다 훨씬 더 많은 루프를 겪은 작자들이 아직도 필멸자 가족에 얽매인다?
이런 허술한 거짓말에 속는 게 더 이상하다.
최초로 밝힌 목적이 뻔한 거짓말이라면,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는 의미.
선대 지혜 세력이 우리를 포섭해 방주를 공략하려는 이유는 뭘까?
‘너는 라이언을 통해 나를 파악하려 애썼을 터. 나 역시 너를 관찰해 왔다.’
“관찰하니 어땠습니까?”
‘네 판단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아?”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애초에 그대들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터.’
나와 선대 지혜의 판단이 유사하다?
‘그대는 방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이 과정에서 방주에 모종의 함정이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지.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는가?’
“… 없습니다.”
사실이다.
나는 방주를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집중해서 들으라.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생소할 터….’
방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방주의 근간은 태고에 설계한 영혼 결집 회로에 이베리아반도 지하에서 발굴한 거울을 합친 것이다. 전자는 사람의 혼을 한 점에 모아 유사 신격을 만들 수 있다. 이 이치는 그대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선대 지혜가 신성한 태양을 보자마자 꿰뚫어 보았던 이유를 이제 알았다.
태양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영혼 결집 회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종말을 견디고, 거울의 힘으로 다시금 모두가 인간으로 돌아감이 방주의 이치. 여기까지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여기까진 이미 아는 정보였지만,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으니 나쁘진 않다.
‘논리적으로 방주의 이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방주를 최초로 설계한 선각자들도 그리 여겼겠지.’
“실제로는 문제가 있었습니까?”
‘있었다. 이제는 기록조차 남지 않은 인류의 머나먼 선조는, 다음 세상에서 깨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문제를 알았다.’
다가오는 종말을 피해 방주를 빚어 다음 세계에서 깨어났다.
방주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아아…. 거울, 거울이 문제였다. 애초에 거울은 무엇인고? 하늘에 대고 무수히 질문했지만, 그 누구도 답을 들려주지 않았음이야…. 젊은 지혜여, 그대는 거울에 대해 아는가?’
“…”
‘그대, 명심하라. 거울은 처음 상태 그대로 되돌리는 물건이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여기까지 듣다가 생각했다.
어쩌면, 거울에 대해선 관리국은 물론 선대 지혜보다도 우리가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고.
207호는 현실의 머나먼 과거였으며 거울이 핵심 키워드였다.
하지만, 207호의 특성상 진행 방식은 파티마다 어마어마하게 달랐으리라.
거울은 처음 상태 그대로 되돌리는 물건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거울에 비춘 자신을 보았다면 좌우가 반전되어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은가?
조금 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거울 너머의 수행자가 대상을 뒤틀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초의 타락이 발생했다. 인간이 원초의 순수함에서 한 걸음 벗어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방주로부터 최초의 타락, 최초의 변질이 시작되었다.
단 한 번에 모든 상식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갑자기 전 인류가 두족류로 변한다거나, 손 대신 촉수가 돋아나진 않았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상식은 마치 태양빛에 노출된 얼음이 녹듯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누군가는 머나먼 세계의 목소리에 홀려 괴이한 괴물을 불러냈다.
누군가는 죽은 후 무덤에서 일어나 생전의 원한을 풀고자 했다.
누군가는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더니 등 뒤에 지느러미가 돋아났다.
…
이런 일이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된 후에야 선각자들은 받아들였다.
인류가 원초의 순수함으로부터 ‘조금’ 벗어났고, 그로 인해 세상의 상식이 ‘조금’ 바뀌었음을.
‘처음에는 모두가 그리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소소한 괴물들 따위는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방주를 다시 한번 만들었지.’
첫 ‘조금’은 심각한 위협이 아니었기에 방주를 다시 만들었다.
조금이 두 번이 되었고, 세 번이 되었다.
“그 과정을 무수히 반복한 게 지금입니까?”
‘그래. 지금의 세상이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밤하늘을 평화롭게 빛내야 할 달은 어느샌가 악마로 변해 지구 지하로 파고들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상식이 완전히 무너진 이상한 세상을 살아간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선대 지혜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역천일세. 우리는 역천의 대가를 치르고 있어….’
“…”
‘종말이 두려워서, 문명이라는 모래성이 붕괴하는 것이 두려워서 방주를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라. 여름이 오면 얼음이 녹는 것이 순리다. 파도가 몰아치면 모래성이 무너짐이 순리다.’
“…”
‘종말이 오면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 역시 순리였다. 무너지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는데…. 모래성을 억지로 유지하려다가 사달이 나고 말았다.’
관리국이 방주를 만든 이유는 루프 후의 인류가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가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쌓는 일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대 지혜는 그 생각 자체가 역천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방주를 부숴야 한다. 모래성은 무너져야 하며, 얼음은 녹아야 한다….’
“…”
‘내 말을 믿게.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인류를 위하는 길일세.’
“방주를 부수면 달의 문제도 해결된다고 생각합니까?”
‘바로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 환경 오염을 생각하게. 발전소를 부순다고 강이 바로 깨끗해지던가? 허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다시금 청정한 물이 흐르게 마련이네.’
“…”
‘내 말을 믿기 힘들겠지. 이해하네.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답을 구하게.’
이윽고 천장이 막힌 지하공간에서 신비로운 위광이 주변을 비추기 시작했다.
선대 지혜의 유산으로 추정되는 힘, 초자연성을 억누르는 신비로운 빛이 석판 위의 한 점에 모였다.
‘관리국의 정점에 올랐던 네 동료에게 답을 구하라. 지금 내 말에 한치의 틀림이 있느냐고 물어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게 엔딩으로 향하는 첫 번째 길 – 방주의 파괴가 주어졌음을.
다만, 그 엔딩이 해피 엔딩인지 배드 엔딩인지를 알 수 없었다.
*
– 이은솔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한다.
복도 전체를 어둡게 물들이며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 상대, 침묵하는 자의 일원.
그는 사람 흉내라도 내듯 양복을 입은 채 나타나서 우리를 설득하려 했었지.
너희는 인류의 수호자다.
종말을 피해 다음 세상에서 깨어날 어린 양을 지켜야 할 양치기다.
그런데, 그 직분을 마다하고 폭력적으로 날뛰는 이유가 무엇이냐?
미로가 불러낸 소환체 가인이는 ‘방주는 함정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상대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가인이는 방주는 사람의 혼을 모아 만드는 준신과 같은 존재이며, 이런 것을 관리국이 창조했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손을 뻗어 방주의 가장 큰 비밀 – 거울의 존재를 밝혔다.
태고의 인류가 이베리아 반도 지하에서 발굴한 위대한 보물이 있기에 방주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
거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모두가 넋이 나간 그 순간 – 상대는, 더없이 간절한 말투로 외쳤다.
“그대들은 내 말을 믿어야 한다!”
가인이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뭘 믿으라는 말입니까?”
“그대들, 바깥 사람들이 사특한 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
“사특한 자라니 -”
“지혜! 지혜! 호텔에서 사악한 지혜를 얻어온 마인과 손잡았음을 안다. 내 말이 틀렸나?”
“… 선대 지혜를 말합니까?”
“그는 뱀과 같은 혀로 그대들을 속이고, 잘못된 길로 이끌 것이다. 그자의 목적은 방주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이 못지 않게 나 역시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니까, 바깥 동료들은 ‘방주를 부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을 거라는 소리지?”
“그렇다.”
“당신은 방주를 부수면 안 된다고 하는 거고?”
“그렇다.”
“… 누구 말이 맞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이은솔 요원, 나는 그대의 현명한 판단을 믿으며 -”
“아니, 그런 말 말고 근거를 말해줘야지.”
“사특한 자. 그대들이 ‘선대 지혜’라고 부르는 마인의 정체!”
“…”
“그자가 왜 현실에 발 한번 들이지 못하는지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