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02)
EP.602 602화 – 도둑맞은 세계 (17)
602화 – 도둑맞은 세계 (17)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28일 차
현재 위치 : 검색 중….
현자의 조언 : 0」
– 한가인
「대적이 하나가 아님을 기뻐하라. 하나라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오히려 여럿이기에 틈이 있다.」
생각지 못한 답에 잠시 몸이 굳은 사이, 초월적인 폭력으로 가득한 전장의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선대 지혜는 결국 달의 혓바닥을 끝까지 피해내지 못했다.
「크으으…!」
정타를 맞은 것은 아니다.
빌딩보다도 거대한 살덩이의 끝자락에 살짝 스친 정도?
그것만으로 선대 지혜의 몸 3할 가까이가 단박에 흙먼지처럼 분해되었다.
달의 악마에게 약간의 여유만 더 있었다면, 선대 지혜는 긴 세월 축적한 계략이 아무리 교활했든지 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달의 악마에게 ‘약간의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악마에게도 그 격에 맞는 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파지직!
“저건 -!”
“약탈자들!”
어둑한 하늘 여기저기서 새하얀 벼락이 치는가 싶더니, 허공이 여기저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새 너머에는 감히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거룩한 자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또한, 하나같이 영락한 패배자들이었다.
“어! 저, 저거 -”
뒤에서 들려오는 은솔 누나의 놀란 목소리.
약탈자 중 한 개체를 알아본 것이다.
그래, 어제 올빼미가 알려주었듯이 약탈자 역시 우리가 이미 아는 존재였다!
— 쿠구궁!
마치, 끝도 없이 거대한 배가 대포를 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런 개념일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발사된 새하얀 빛줄기가 연이어 달의 혓바닥을 강타하니, 삽시간에 달의 살점이 폐허가 된 서울 여기저기 추락하기 시작했다.
“꺄악!”
“감상은 이쯤 하고 도망치자! 빨리! 달의 악 – 왕자님께서 우릴 지켜주는 동안 튀어야지!”
혼돈으로 가득한 신들의 전장을 정신없이 벗어나며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우, 웃음이 나오세요?”
에이디아는 어처구니없어했지만, 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이야말로 조금 전에 올빼미가 준 힌트의 완벽한 예시가 아닌가!
싸움은 우리와 선대 지혜가 시작했지.
그런데, 나와 에이디아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던 달이 전장에 끌려왔다.
곧이어 선대 지혜를 잃고 싶지 않았던 약탈자들까지 끼어들었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들이 끌려온 전형적인 상황이다!
“꼭 힘이 있어야 난장판을 만드는 건 아니지.”
“네?”
“가자!”
*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
머나먼 상공에서 벌어지던 위대한 싸움도 한참 전에 끝났다.
“지금 어디쯤 왔나요?”
멍하니 하늘을 보는 에이디아에게 답했다.
“부천.”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는데.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한국의 지명은 자주 바뀌거든요.”
“… 인천은 알아? 그 근처야.”
“성역 근처에 오긴 했네요.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
목적지는 인천 앞바다라고 한다.
본래라면, 미국도 아니고 서울에서 인천 정도야 진즉 도착했겠지.
“피곤하네요. 몇 시간 사이에 대체 몇 개의 이계에 휩쓸렸는지….”
흉측하기 그지없는 이계, 약탈자의 침식이 만드는 현상이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위치가 검색 중으로 바뀌며 기괴한 장소가 나타난다.
덕분에 1시간 동안 30M 이동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악의가 느껴져. 우리가 가는 경로 전부를 침식하는 느낌인데.”
“당연하죠. 선대 지혜 덕에 약탈자들 또한 우리를 인지하기 시작했으니까.”
“…”
“이쯤에서 쉬어야겠네요. 저기, 저 집 보이시죠? 저기서 한숨 자고 아침에 출발하죠.”
“한숨 잔다고? 가능해?”
자는 동안 주택 내부가 이계로 바뀌면?
“여긴 괜찮아요. 요 근처는 달의 기운이 강하게 닿는 곳이니까.”
“…”
달의 기운이 강한 장소라니….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하자.
부천 인근의 허름한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동료들이 털썩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선대 지혜의 터무니없는 공격으로 인한 후폭풍.
곧이어 이어진 위대한 자들의 불가해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충돌.
이것으로도 모자라 약탈자들이 배치한 이계의 흉측함까지!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압박이었기에 모두가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형, 누나는요?”
“아까부터 기절해 있었어.”
그나마 진철 형이 멀쩡해 보였다.
몸이야 워낙 튼튼하고, 정신적인 부분은 은솔 누나가 바로 옆에서 피리를 썼을 테니까.
“아리는 괜찮냐?”
“그러길 바라야죠.”
쉬자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아리는 즉각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까 전, 달을 직시한 채 미친 듯이 웃던 아리가 떠오르며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 쟤는 어딜 보는 거냐?”
“쟤? 에이디아?”
에이디아는 몽롱한 표정으로 창가에 기댄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시선 끝을 따라가자, 진홍색으로 빛나는 흐릿한 구체가 보였다.
달의 아득한 형상이 마침내 현실에 드리우기 시작한 것.
“… 에이디아.”
“네.”
“인천 앞바다의 성역에 가면 정확히 뭐가 있는 거야?”
“약탈자를 몰아낼 수 있는 안배!”
에이디아가 우릴 성역으로 이끄는 이유.
“성자님도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너는?”
“전 괜찮아요. 불침번도 있어야지. 또, 이게 내 유산의 힘이랍니다.”
빙글빙글 웃는 에이디아의 몸 여기저기는 보랏빛 암석으로 변해 있었다.
다친 부위가 암석으로 변했다가 다시 살점으로 돌아오며 회복하는 원리인가?
성모의 강력한 신체 능력의 근원이 저 유산인 듯하다.
“이름이 뭐야?”
“클리포트 크리스탈. 인간은 쓸 수 없는 유산이죠.”
“…”
“신기하지 않나요? 인간의 몸은 견딜 수 없는 유산이 딱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에이디아는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항상 궁금하답니다. 당신과 내가 각자의 호텔에서 겪은 일들. 정말 우리 뜻대로 진행한 게 맞을까요?”
“…”
“어쩌면, 당신과 내가 무슨 축복을 얻고 무슨 유산을 얻을지는 처음부터 정해진 -”
“내 동료들도 너처럼 인간이 견디기 힘든 유산을 얻었지.”
몸이 붕괴하는 이계의 별을 얻은 진철 형.
정신이 무너지는 불길한 상상을 얻은 엘레나.
“얻는 시점에선 이걸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직후에 축복의 성소에 가니까 어떻게든 쓸 수 있게 해주더라.”
재생력을 얻은 진철 형.
명경지수를 얻은 엘레나.
“네 유산, 클리포트 크리스탈도 비슷했겠지.”
“인간이 얻었으면 직후에 축복 강화를 통해 쓸 수 있게 해줬다?”
“그래.”
“그럴 수도 있죠.”
이게 내 해석이다.
에이디아도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호텔 관련 이야기는 이쯤 하자.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고 네가 말했잖아?”
“아시나요? 내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나 자신부터 지키지 못해서랍니다. 조언 겸 다짐인 거죠.”
“약탈자의 정체. 이전엔 긴가민가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은솔 누나가 한번 만난 존재가 다시 나타났거든.”
“그렇군요.”
“약탈자들 역시 방주 맞지? 또 다른 방주?”
우리는 이미 약탈자들을 두 번이나 만났다.
에스퍼 호 선착장에서 이계에 끌려간 은솔 누나가 만났던 존재.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나타난 희끄무레한 빛덩이.
석판의 응징을 피해 도주했던 아리가 거했던 장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생물이자 버림받고 영락한 끝에 지성조차 잃은 저능한 신.
“아리는 그것들을 오래된 방주라고 했어. 분해 혹은 제작 과정에서 사고가 생겨서 -”
“틀린 말은 아닌데, 중요한 부분이 많이 빠졌네요.”
“그러면 네가 채워줘.”
에이디아는 다시금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원래 중요한 이야기는 성역에 가서 할 생각이었죠. 선대 지혜의 이목을 끌기 싫었거든요.”
“…”
“이젠 의미 없네요. 이미 한판 붙기까지 했으니.”
심호흡하며 에이디아의 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성자 님, 알고 계시나요? 최초의 방주는 회귀자를 연구한 끝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들었어.”
지배가 미로에게 했던 이야기다.
“회귀자에게는 한 가지 기묘한 특징이 있어요. 각성 시점을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죠.”
회귀자는 각성 시점을 조절할 수 없다.
누군가는 중세 시대에 깨어나고 누군가는 21세기에 깨어난다.
어쩌면 원시 시대에 깨어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방주도 똑같아요. 도착 시기를 정확히 조절할 수 없죠.”
“…”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애초에 방주의 이치를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방주의 두 가지 핵심은 영혼 결집 회로와 거울이다.
거울은 대놓고 우주에서 떨어진 의문의 물체이며, 우리가 207호에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수행자의 권능이 담긴 신물이다.
영혼 결집 회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임은 마찬가지다.
“소파에 잠든 아리 양은 알고 있겠지만 -”
“그냥 아리라고 불러.”
에이디아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 아리도 깨어난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방주는, 사실 과거 루프의 다음 루프에 대한 침공이나 다름없습니다.”
“…”
“5세기나 8세기쯤 도착하면 별문제 없어요. 그 시기의 인류는 우리가 보기엔 원시인과 별반 차이도 없으니까.”
“…”
“방주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하늘에서 신인(神人)이 내려왔다면서 고개를 조아리죠. 순순히 섬기니까 방주 세력도 원주민들과 굳이 싸우지 않아요.”
다음 말은 아리가 받았다.
“방주 쪽에서도 원시적인 세상의 야만인들을 우리가 계몽시켜 빛으로 이끌겠다! 이런 사명감을 가지지. 애초에 그럴만한 사람을 방주에 태우기도 하고.”
방주가 전근대 세계에 도착하면 큰 문제 없다.
그 시대의 원주민들은 방주라는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애초에 대항할 능력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그 과정에서….
방주가 품은 타락이 세상 전체로 번져나간다.
“21세기에 도착하면 어떨까요?”
“…”
“성자 님, 작년 말 때쯤 구세계의 방주가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관리국이 순순히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 같나요?”
“싸움이…. 벌어지겠네.”
“방주 세력이 이기면, 토착 세력은 말 그대로 싹 밀리죠. 교황청이니 이성의 결사니 하는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회귀자들의 기억도 이 악물고 조작해서 충돌의 역사를 지우고. 그럼에도 기억하는 소수는 -”
“그게 선대 지혜 세력인가? 토착 세력이 이기면?”
“방주가 도망가죠. 아, 이번 루프에 안착하긴 무리구나. 다음 루프로 가자.”
이 지점에서 문제를 느꼈다.
“… 토착 세력도 망할 때 되면 방주를 만드는 것 아니야?”
“어머나! 방주가 두 개가 됐네요? 다음 세상은 하나인데!”
“…”
“이 비슷한 일이 설마 한 번 있었을까요? 경우의 수도 무척 다양하죠.”
“…”
“조금 전의 예시는 멀쩡한 방주가 지나치게 미래에 도착한 경우고, 어떤 경우는 애초에 방주가 불량품일 수도 있어요.”
아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석판을 피해 머물렀던 장소. 그 녀석은 분해 과정에서 과도한 생존 본능으로 날뛰다가 망가진 방주야.”
“그 친구들도 세상이 망할 때 되면 방주로서의 본능 때문에 다음 루프로 갑니다.”
어떤 방주는 너무 미래에 도착해서 토착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어떤 방주는 분해 과정에서 오작동을 일으켜 영락한 신처럼 변했다.
어떤 방주는….
이런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 결과, 족히 10개체가 넘는 방주가 시공을 떠돌고 있다!
— 다그닥!
에이디아는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의자를 하나 빼고 전부 치웠다.
“즉, 이 싸움은 말하자면 의자 뺏기 싸움입니다.”
“…”
“의자 – 즉, 멀쩡한 세상을 원하는 방주는 대충 세도 열 개가 넘는데-”
“의자는 하나구나.”
“- 그게 문제죠.”
적막이 내려앉은 방.
숨소리가 바뀐 걸 보니, 자는 것 같던 은솔 누나나 진철 형도 같이 듣고 있는 기색이다.
누나가 입을 열었다.
“방주랑 약탈자 이야기는 대충 이해했어. 그러면 달은?”
“그건 또 아주 긴 이야기랍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죠.”
“또! 약탈자는 관리국이 무너진 후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느낌인데, 맞아?”
“인내심을 가지시길.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요.”
밤은 아주 길다.
대화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