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14)
EP.614 614화 – 도둑맞은 세계 (29)
614화 – 도둑맞은 세계 (29)
– 5초 전, 괴담 미로
지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천천히 되짚어 보자.
은솔이 안식의 피리를 사용했는데도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어린 미로의 의식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중, 피리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액자’에 구멍을 뚫어야 함을 알았지.
오랜만에 몸을 되찾고 필멸의 창으로 장막을 꿰뚫었어.
직후에 시작된 기괴한 현상!
처음으로 자각한 것은 정지.
누군가 세상이라는 동영상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다.
필멸의 창으로 허공을 찌른 나.
피리를 부는 이은솔.
전투태세를 갖춘 성모.
세 사람이 정지된 세상에 돌처럼 굳었다.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일 수 없었다.
…
…
…
체감상 3시간이 흐른 시점.
성모가 손끝으로 은솔을 겨눈 채 정체 모를 보랏빛 섬광을 쏘았음을 알았다.
내가 아닌 은솔부터 노리는 이유?
약한 상대부터 처치하려는 생각이겠지!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지만, 위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섬광이 느렸기 때문이다.
빛을 내니까 ‘섬광’이라고 칭할 뿐, 움직이는 속도는 무슨 느릿하게 움직이는 풍선 같아.
알 수 없는 조화가 모두를 멈춘 모양인데, 시간 대여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쓸 수 있다.
내심 ‘훗’하고 웃으며 은솔을 역소환했다.
…
…
…
체감상 12시간이 흐른 시점.
보랏빛 섬광은 이제야 성모와 은솔의 중간 근처까지 움직였고, 은솔은 아직도 내 시선 한구석에 멀쩡히 서 있다.
왜 역소환에 실패했지?
시간 대여기가 내 명령을 거부할 리 없는데?
이 시점이 되어서야 이해했다.
몸이 굳은 게 아니라 주변 시간이 느려졌구나.
혹은 생각의 시간만 엄청나게 빨라진 것 같다.
실제로는, 보랏빛 섬광은 광속까진 아니어도 음속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겠지.
그러니 온 세상이 멈춘 상황에서도 느린 풍선 정도 속도로 보이는 거야.
시간 대여기도 마찬가지.
바늘은 지금도 내 명령에 따라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단지, 그 움직임이 지금 내게 아주 느리게 느껴질 뿐이다.
고개를 돌릴 수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바늘이 0.01mm 정도 움직이지 않았을까?
…
…
…
체감상 하루가 흐른 시점.
안타깝게도 시간 대여기 바늘의 이동 속도보다 섬광의 속도가 더 빨랐다.
은솔이를 역소환하기 전에 섬광이 덮쳤다는 말이다.
섬광은 아주 ‘천천히’ 은솔의 머리를 관통했다.
은솔의 머리가 사라지는 순간, 성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머리를 노린 ‘덕분에’ 은솔의 고통이 길어야 30초 내로 끝났기 때문이다.
위협 목적으로 팔이나 다리를 잘랐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아리를 제외한 사람을 딱히 동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적인 동정심 정도는 있다고.
바늘은 지금 얼마나 움직였을까? 0.1mm?
시간 대여기에서 아직도 ‘철컥’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불변의 힘이 날 보호해 주지 못하는 걸까?
206호, ‘100일 후에 깨어나는 마왕’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자.
당시 ‘어린 나’는 낙원 심층부의 시간 지연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불변은 시간 지연에도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왜 지금은 저항하지 못하는 거야?
다행히 내겐 아주 많은 시간이 있었기에 고민 끝에 답을 알아냈다.
첫째, 지금 내가 겪는 일은 시간 지연이 아니다.
정말 시간이 느려졌다면, 외부 관측자를 제외하면 시간 지연을 알아챌 수 없어야 맞아.
세상이 느려지는 만큼 생각도 느려져야 하니까.
지금은 세상은 멈췄는데, 생각의 속도만 정상이니 시간 지연과 전혀 다른 무언가다.
더 끔찍하고 사악한 현상이다.
둘째, 불변은 지금도 저항하고 있다.
나는 시간 대여기가 내 명령을 무시한다고 착각했었지.
명령을 무시한 게 아니라 바늘이 엄청나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는데.
같은 맥락이다.
불변은 지금도 저항하고 있으며, 저항한 게 이 정도다.
즉, 에이디아는 나보다 훨씬 더 심한 현상을 겪고 있으리라.
나는 영원(永遠)의 지옥에 갇혔다.
…
…
…
고통스럽다.
죽고 싶어.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 날 죽여줘.
죽음으로 이 고통에서 탈출한 은솔이 부럽다.
이 고통을 겪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이 부럽다.
끝도 없는 분노가 샘솟았다.
진실을 밝히려 했던 송이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뭐? 다양한 관점으로 달의 진실을 알아?
진짜 이 현상을 겪었다면 가만 서서 1초 만에 미치든지 했겠지.
기껏해야 ‘뭔가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느낌 같은 느낌’ 정도만 받은 주제에!
날 이 지옥에 데려온 가인을 산채로 태워 죽이고 싶었다.
평소에 그놈의 통찰로 잘난 체란 잘난 체는 다 한 주제에!
네가 리더라면, 어떻게 동료가 이런 일을 겪게 할 수 있지?
침묵하는 자보다 더한 쓰레기가…!
이게 다가 아니야.
아직도 날 구해주지 못하는 아리에게 증오를 느꼈다.
아직도 원 모어 찬스를 쓰지 않은 묵성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아직도 –
사실은 알고 있어.
꿈의 영역을 걷어내면 이런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
송이 책임도 아니고, 가인 책임도 아니다.
이 자리에 없는 아리나 묵성 책임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알았다.
나는 무의미한 분노임을 알면서도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리라.
원망하고, 무의미함을 깨닫고, 절망하고, 한탄함을 반복하리라.
…
…
…
시야가 어두워졌다.
별건 아니고, 사람은 원래 주기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는데 지금은 감는 타이밍일 뿐이다.
앞으로 몇 달 정도는 암흑 속에 갇혀있겠구나.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지기라도 한 건지, 신기한 재주가 생겼다.
시간 대여기를 보지 않으면서도 바늘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는 그런 재주.
바늘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아침의 송이.
정오의 은솔.
저녁의 아리.
자정의 가인.
송이를 거쳐 은솔에 도착했던 바늘이 아리를 향해 움직인 것.
지금까지 보낸 시간의 30배 정도 흐르면 아리를 소환할 수 있겠네.
죽고 싶다.
…
…
…
생각할 시간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자연스레 다가온 깨달음.
예를 들어 이런 것.
지금 같은 일이 다른 방주에서도 벌어질까?
방주에 잡힌 모든 영혼이 이런 과정을 거칠까?
아니야.
방주에 대해 잘 아는 아리는 이런 현상을 언급한 적도 없다.
달만의 특징이다.
달은 다른 방주와 다른 무언가니까.
왜 이런 짓을 할까?
왜 본인이 집어삼킨 영혼들에게 이토록 끔찍한 지옥을 선사하지?
단순한 고문?
잔인한 성품의 발로?
가학적인 존재라서?
아니다.
달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
…
…
영원에 대한 이야기.
북쪽 저 멀리 스비트요드라고 부르는 땅에 바위가 하나 있다.
높이 100마일, 너비 100마일인 바위다.
천년에 한번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바위에 와서 부리를 갈고 간다.
그렇게 해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고 나면, 비로소 영원의 1초가 지난다.
해변의 모래알은 본래 거대한 지각 혹은 맨틀 일부였다고 한다.
억겁의 시간에 걸쳐 들이친 파도가 끊임없이 암석을 갈아낸 끝에 모래알이 태어난 것.
산은 개성이 있고 특색이 있지만, 모래알은 그렇지 않다.
모든 모래알은 다 같은 모래알이다.
영원이란 곧 산을 모래알로 만드는 과정.
아아….
이해했다.
달이 영원의 지옥을 만든 이유는 집어삼킨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다.
삶이라는 개성이 새겨진 영혼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나는 ‘나’를 잊어가고 있다.
…
…
…
내가 기억하는 나에 관한 정보들.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를 닮은 괴물에게 습격당했다가 관리국에게 구조받았다.
요원으로 일하던 중, 침묵하는 자 상당수가 타락했음을 알고 관리국 상층부를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었지.
그런 마음으로 호텔을 오르다가 실패.
하지만, ‘아리’라는 안배가 어떻게 잘 들어맞아 다음 기회를 얻었다.
그랬음에도 시간대여기에 남은 ‘1시간’이 내 전부였지만….
207호에 웅크린 위대한 자, ‘수행자’의 도움을 얻어 시간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현실의 비밀을 파헤친 끝에 달 내부에 도착했다.
이게 과연 진실일까?
혹은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부터는 구체적인 기억이 흐릿해져서 잘 떠오르지 않는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충격적인 정보들도 흐릿한 잔상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정보는 내가 떠올린 망상일지도 몰라.
나는 호텔에서 탈출한 적 없고, 아직도 한빙지옥에 갇혀서 악몽을 꾸는 거지.
어쩌면 한빙지옥에 갇힌 기억도 그냥 망상 아닐까?
그럼 난 뭐야?
고통받는 나는 대체 어떤 존재지?
어쩌면 고통이라는 생각조차 환상일지도 몰라.
나는 본래부터 멈춰있는 사진 속 존재인데, 이상 현상으로 인해 생각하는 능력을 얻은 거지.
…
…
…
영원히 끝나지 않는 1초 속에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의식의 주도권을 다시 어린 미로에게 넘기자고.
어린 미로 역시도 지금의 일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어렴풋한 정도다.
영겁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나와 달리 기괴한 꿈 정도로 느끼겠지.
어린 미로를 깨우고 나는 다시 잠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영겁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또한 생각했다.
오랜 요원 경력은 물론, 호텔의 지옥조차 경험한 나조차도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어린 미로가 영겁의 꿈을 견딜 수 있을까?
불변조차 한계에 도달한 이 절망은 어린 내가 감내할 수 없다.
달이 지금껏 삼켜온 많은 영혼이 그러하듯, 삽시간에 자아를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떠올릴 수 없게 되겠지.
잊어선 안 돼.
‘진짜’는 어린 미로뿐이야.
나는 미로라는 몸에 깃든 망령이요, 괴담 현상에 불과해.
내가 견뎌야 한다.
미치더라도 내가 미치고, 재로 변하더라도 내가 재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다음 기회가 있다.
…
생각이 여기에 닿았을 때, 다시 들을 일 없을 거라고 여겼던 누군가의 속삭임을 들었다.
「일찍이 내가 너를 보았느니, 남은 것은 어둡고 탁한 운명뿐이었다.」
수행자?
「고민했도다. 너를 내보내는 것과 영원한 안식을 주는 것. 무엇이 구원일까?」
이 말은 절망에 휩싸인 내가 만들어 낸 환청인가?
「아이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안식을 주겠노라.」
아니면 머나먼 미래를 어설프게 읽어낸 수행자가 남긴 안배?
거품처럼 흩어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안식,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구나.
나는 이미 수도 없이 죽고 싶다고 외쳤어.
진심으로 죽고 싶은 걸까?
…
나는 선인(善人)이 아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일상과도 같으니, 역사에 남은 학살자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살인자다.
나는 실패자다.
심해 호텔에서 고작 10명도 안 되는 일반인조차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패배자다.
독선적이고, 어리석으며, 소원을 빌어 얻은 딸보다 못한 사람이다.
심지어 이젠 사람조차 아니다.
괴담이고, 현상이며, 혼돈체다.
어린 미로에게 기생 중인 유령에 불과하다.
하지만.
쉽게 죽는 존재는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 내 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창 한번 제대로 꽂아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사라지진 않겠다!
그랬기에 수행자에게 답할 수 있었다.
‘안식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고통은 곧 실존(實存)이다.
나는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나는 존재한다.
그 순간, 누군가의 미소를 느꼈다.
「과연, 너는 내 작품이다. 원본보다 나은 가짜로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보았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이 이상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손이, 정오에서 저녁 사이를 느긋하게 움직이던 바늘을 잡고 강제로 움직였다!
— 철컹!
마침내, 시간 대여기의 바늘이 ‘저녁의 아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나타날 내 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아주 오랜 시간’ 겪을 고통을 알기에 동정했다.
다시 한번 영원한 1초가 흘렀다.
…
‘부등변다면체’의 공간 격리가 필멸의 창이 꿰뚫은 틈새를 봉쇄했다.
이는 곧, 모든 고통의 끝을 의미했다.
…
평생보다 길었던 5초가 끝났다.
오피러브
늑대훈련소
TXT viewer control
괴담 호텔 탈출기-6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