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19)
EP.619 619화 – 도둑맞은 세계 (34)
619화 – 도둑맞은 세계 (34)
– 김아리
잘 익은 금빛 물결로 가득한 풍요로운 평원.
선대 지혜의 방주에 탑승하고 내부 풍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방주마다 내부 구조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직접 보니 제법 신기했다.
“허…! 아름답구나! 아리, 네 생각은 어떻지?”
“비슷해.”
가인이 선대 지혜와 모종의 협상을 마친 후, 나와 지배는 석판을 피해 선대 지혜 내부에 탑승했다.
계획대로면, 나는 중간에 내려서 딜라이트 호텔에 들어갈 생각이야.
지배 – 오스왈드가 중얼거렸다.
“혼란스럽구나.”
“…”
“잠깐 사이에 이해하기 힘든 정보가 쏟아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구원이라 생각했던 방주를 내 손으로 해체하고 있었지.”
“합리적인 선택이었어.”
“그래. 지극히 논리적인 고찰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
다시금 고요한 침묵.
이번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정말 네 동료가 달을 억제할 수 있을 것 같나?”
“…”
“우리에겐 방주가 없다.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어.”
“그렇네.”
“시간을 또 돌릴 수는 있나?”
“글쎄….”
최악의 경우, 다시 한번 돌리는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
첫 번째 역천의 대가는 회귀자에서 필멸자로 돌아가는 것.
두 번째 역천의 대가는 뭘까?
영구적인 죽음?
2층 돌파 보상으로 얻은 티켓이 한 장 남아있다.
설령 묵성이가 죽는다 해도 티켓을 써서 살릴 수는 있다.
… 이런 불길한 가능성은 가능하면 피하자.
“두 번은 어려운 모양이군. 하긴, 시간을 돌리는 엄청난 기적을 연거푸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지….”
곧, 오스왈드는 밀밭 사이로 걸어가며 내게 손짓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문득, 처음 침묵하는 자로 승진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달의 존재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진실을 알았다.
당시 날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던 사람도 오스왈드였지?
“아리.”
“음?”
“자네와 처음 만난 날,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뭘 말하는 건데?”
오스왈드의 품에서 자그마한 흰 종이가 튀어나왔다.
“이것 말일세. 원래는 사진이었지. 한 7~8개월 전만 해도 그랬어.”
“…”
“딱 자네가 돌아온 시기에 사진이 흰 종이로 변했네.”
과거에 한 번 했던 이야기.
“이 사진엔 본래 한 인물이 있었네. 누군지 몰라. 본래 알았는데, 이젠 잊었지.”
“…”
“사진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인류의 배신자.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네가 수없이 죽인 사람.”
“그건 내가 해준 말이고. 자네가 아는 정보를 묻는걸세.”
밀밭 사이를 걷던 오스왈드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내 눈을 보았다.
“이런 생각이 드네. 지금 우린 선대 지혜의 방주에 탑승해 있지? 여기서 내리면, 나는 ‘어린 지혜’의 외모나 이름 등을 전부 잊을 것 같아.”
결국 이 순간이 왔구나.
오스왈드는 마침내 인류의 배신자가 가인이의 먼 과거임을 깨달았다.
사진이 변한 시기를 고려할 때, 처음부터 인류의 배신자가 ‘나와 함께 호텔에서 나온 사람’임은 짐작했을 거야.
내 동료 중 정확히 누구인지를 모르다가 오늘 확신했을 뿐.
“후….”
본능적으로 부등변다면체를 소환한 채 오스왈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차하면 이놈을 여기서 죽여야 하나?
지배의 시선이 천천히 부등변다면체를 향했지만, 딱히 나와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네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네.”
“뭐?”
“과거 연구원을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의 지속적인 말살은 대대로 침묵하는 자 중 한 사람이 계승해 왔거든.”
‘연구원’
가인이의 첫 번째 삶이자 살아있는 비밀의 화신 같은 존재.
“내가 죽였다고 해야 자네가 뭔가 더 반응을 보일 것 같았네.”
“그래서?”
“사진이 무의미한 종이로 변한 후, 남아있는 모든 자료를 뒤졌지. 연구원을 찾아내서 다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
“덕분에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다네.”
지배가 알아낸 연구원에 대한 정보.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인간을 도구처럼 여기는 사람.”
“평범한 관리국 요원이네.”
“믿음, 신뢰, 신념. 이런 단어를 우습게 보는 사람.”
“…”
“세상의 비밀을 누구보다 깊이 탐구한 사람.”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영멸(靈滅)에 저항할 힘을 얻은 사람.”
“… 그건 좀 대단하네.”
“이것 말고도 부정적인 기록이 가득했지. 좋은 내용이 없었어.”
결국, 크게 한숨 쉬며 답했다.
“휴…. 그래서 어쩌라고? 뭐, 이간질이라도 하려는 거야?”
“내가 그리 얕은 사람으로 보였나?”
“그러면?”
“이간질? 그런 수작 부릴 생각 없어. 통하지도 않을 테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내가 젊은 지혜의 뒤통수를 때릴 확률보다 젊은 지혜가 내 뒤통수를 때릴 확률이 더 높지 않겠나?”
솔직히 이건 인정!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지배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생겼네.”
“…”
“무슨 초능력 같은 건 아니야.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빅데이터겠지.”
“그래서?”
“젊은 지혜는 악인이 아닐세.”
“어?”
지금껏 말했던 연구원에 대한 악평과는 상반된 이야기라 살짝 놀랐다.
“물론, 나도 짐작하네. 젊은 지혜는 내게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거야.”
“…”
“숨기는 것도 많고 나름대로 꿍꿍이도 있겠지.”
새삼스럽지만, 지배 역시 긴 세월 관리국을 지탱한 침묵하는 자의 일원이다.
가인이의 수작질에 대해 전혀 모를 사람은 아니라는 것.
“괜찮아. 어느 순간부터는 확신이 들었거든. 젊은 지혜에게 꿍꿍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악한 의도는 아니다.”
“…”
“모두를 위한 길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을 받았네.”
“그렇게 믿어주면 다행이야.”
이 말은 진심이다.
“동시에 불안감도 들었네.”
“불안감?”
“젊은 지혜는 악인이 아니지만, 연구원은 어떨까?”
기묘한 화법.
지배는 연구원이 가인이의 오랜 과거임을 알면서도 연구원과 현재의 가인이를 분리해서 말한다.
“아리.”
“…”
“아리.”
“듣고 있어.”
“나는 연구원이 이대로 젊은 지혜로 대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네.”
“무슨 의미지?”
“나도 모르지. 그냥 감이니까. 다만, 내 감은 꽤 정확한 편이라네.”
“…”
“연구원에게는 무언가가 더 있어.”
“…”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네.”
그 말을 끝으로 지배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방주를 해체하고 관리국을 복원하기로 했으니, 그에게도 할 일이 아주 많으리라.
*
혼자 30분 정도 있으니 또 다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50대 초반 정도의 백인 남성.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것이 선대 지혜의 진짜 모습임을 직감했다.
“파이오니어에 도착했다. 즉시 호텔 내부로 들어가면 석판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터. 그 뒤는 알아서 하게.”
덕분에 안전하게 왔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고마워.”
선대 지혜는 지그시 평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자네와 지배의 대화를 들었네.”
“어머,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않아?”
“내용이 전혀 사적이지 않더군. 무엇보다 여긴 내 집일세.”
그건 그래.
다음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혹시 알고 있나? 모든 참가자는 호텔에 소원을 빌었다고 하지.”
“소원? 2층 탈출할 때 꿈을 쓴 것 말하는 -”
“2층 탈출할 때를 말하는 게 아니야. 모든 일이 시작하기 전에 빈 소원을 말하지.”
탈출할 때가 아니라, 맨 처음에 빈 소원.
그런 게 있었나?
“우리는 호텔에 소원을 빌었으면서, 소원을 빌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어. 슬픈 일이지.”
오래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호텔 시네마에서 마지막 영화를 해결한 가인이가 들은 이야기.
호텔 3층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
「“몇 년 전부터 가끔 꿈을 꿨어요. 과거의 저 자신에 대한 꿈인데, 그때의 전 너무나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끝없이 추구해 왔죠.”
“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해도. 정작 지금은 그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자네와 지배의 이야기를 듣다가 든 생각이네. 한번 생각해 보게.”
호텔에 들어오기 전, 모든 참가자가 품었던 각자의 갈망.
가인이는 호텔에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 전에 전제부터 다시 따져보자.
소원을 빈 사람은 가인이가 맞을까? 아니면 연구원?
이 둘의 구분이 의미 있나?
“…”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미로의 부활이나 세상의 안정이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소원들도 물론 빌었지만, 또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
다소 개인적인 소원.
세상이나 미로를 위한 소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
나 자신도 잊고 있던 어떤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
— 콰르릉!
딜라이트 호텔 1층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소리다.
최소 수백 개의 콘크리트 블록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다!
눈앞에서 딜라이트 호텔이 실시간으로 재건축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머리를 아프게 했던 복잡한 생각들이 단숨에 싹 날아갔다.
가인이에게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이게 진짜 말이 돼?
— 우당탕!
천둥이라도 치는 듯한 엄청난 진동에 놀라 정신없이 몸을 구르고 있으니,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와라!”
정신없이 뛰어 파이오니어 1층으로 이동한 후, 멍하니 다과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차진철, 박승엽 두 사람은 나보다 먼저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나와 달리 석판을 피해 선대 지혜의 방주에 타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호주 쪽 사람들은 이미 비행기 탔다더라. 내일 도착한다.”
“은솔이는?”
“소피아에게 연락받고 잠시 나갔다.”
소피아?
어떻게 죽지 않고 잘 있었나 보네.
“아리 누나, 가인 형은 언제 와요?”
“그러게. 아리 너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가인이는 선대 지혜랑 협상하더니, 다른 곳으로 갔어. 듣기로는….”
“듣기로는?”
“패트릭을 만나서 ‘맹약의 서’에 무슨 계약까지 하고 올 모양이야. 참, 승엽아.”
“네?”
“가인이 말로는 시간을 돌리기 전에 네가 각성을 썼다던데?”
“그, 그래요?”
“남아있어?”
“네.”
각성 횟수는 시간을 돌리며 다시 회복됐구나.
이건 다행이네.
…
다음 날 오전, 호주에 있던 동료들이 속속 복귀했다.
잘 있었냐며 웃는 묵성과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도무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기묘한 감각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 자체가 작아진 느낌.
세상의 초점에서 벗어난 느낌.
체격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격이 낮아진 느낌.
묵성에게 다시금 필멸의 운명이 돌아왔다.
순간 말문을 잃고 우물쭈물하니 묵성이 씩 웃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아리 인마! 망부석처럼 서서 뭣하냐? 배고픈데 오랜만에 호텔 밥이나 먹자!”
그 말과 함께 ‘찡긋!’하는 윙크에 담긴 의미는 명확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
아마 다른 동료들에겐 단순한 노화라는 식으로 얼버무린 것 같아.
관리국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겠지.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동료들의 영감이 점점 예리해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묵성의 변화를 깨닫겠지.
하지만, 그날이 꼭 오늘일 필요는 없으리라.
*
저녁 무렵, 마침내 모든 협상을 끝낸 가인이가 돌아왔다.
— 짝!
“자, 이게 내가 약탈자 녀석들과 맺은 협상입니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화이트보드만 바라본다.
좀 과장하면, 지구를 약탈자에게 넘겨주겠다는 수준의 협상 내용이잖아!
뭘 자랑하듯이 말하고 있어?
네가 가인이만 아니었다면, 즉시 쇠사슬로 묶어서 인류를 ‘또’ 배신한 이유를 추궁했을 거라고!
결국 은솔이가 참지 못하고 ‘진짜 이런 정신 나간 협상을 한 게 맞냐?’라고 질문했다.
— 찌이익!
가인이가 웃으면서 화이트보드에 검은 선을 긋는 순간,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그래 가인아!
너 똑똑하고 큰 그림 따로 그린 건 알겠는데, 꼭 이렇게 사람 가슴 철렁이게 하면서 말해야 해?
너무 쇼맨십 아니야?
이러다가 인류를 배신한 거 아니냐고!
“…”
진정하자.
가인이만 보면 자꾸 ‘인류의 배신자’라는 말이 떠오르잖아.
지배와 선대 지혜에게 섬뜩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화이트보드 앞에 선 가인이는 한참 동안 진짜 계획을 설명했다.
“자, 진짜 계획을 들으니 어떻죠?”
입을 반쯤 벌린 채 듣고 있던 승엽이가 제일 먼저 한 질문은, 우리 모두의 의문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달이 약탈자를 다 잡아먹어야 한다고요?”
“그래.”
“그, 그게 어떻게 약탈자에게 이득일 수 있죠!”
“고통은 잠깐일 뿐.”
이상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정말 모든 이를 위한 해피엔딩이기도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