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26)
EP.627 627화 – 가장 오래된 소원 (8)
627화 – 가장 오래된 소원 (8)
– 엘레나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경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지금 나는 분명 실존하는 무언가라 해야겠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
소리도 들리지 않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딱 하나 멀쩡한 감각은 고통.
몸서리칠 만큼 어마어마한 두통이 의식을 잠식해 간다.
어느 순간, 노이즈 같은 무언가를 보고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잡음.
해석할 수 없는 이미지의 나열.
이 시점이 되어서야 다가온 어렴풋한 깨달음.
눈, 귀, 코, 입, 피부 – 기존의 감각이 사라지며 대신 나타난 무언가가 주변 정보를 수집하고 있구나.
한 줌 남은 내 두뇌와 혼은 이 정보를 해석하지 못하고 격렬한 고통만 느끼고 있다.
당연한 이치다.
두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0과 1로 이루어진 언어만 이해할 수 있는 기계에 갑자기 ‘안녕하세요?’ 하는 꼴이니까.
컴퓨터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지성은 이런 정보를 해석할 수 없다.
…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다.
새롭게 태어난 몸은 알 수 없는 정보를 끊임없이 보내는데, ‘엘레나’는 전혀 해석하지 못한다.
명령을 내리지도 못한다.
우습지만, 머리와 몸이 쓰는 언어가 달라진 것 같았다.
적응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생명의 위기?
호텔에서 생명의 위기는 일상이었으니 이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성모.
살면서 본 그 어떤 참가자보다도 불멸에 가까운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지 절단? 참수? 전신화상?
성모에게 이 정도는 웃음 한 번으로 넘길 수 있는 찰과상에 불과했다.
전신을 맷돌로 갈아서 태평양에 뿌려도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생물!
아니, 광물.
성모는 육신 전체를 클리포트 크리스털로 대체하여 불멸을 얻었다.
그녀의 존재가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
오래전의 일.
201호에서 우리를 연거푸 살해했던 베아트릭스에 대한 기억.
베아트릭스는 진즉 육신을 잃고 유리관에 담긴 두뇌만 남아있는 존재였다.
우리가 보았던 그녀의 몸은 불길한 상상의 결과물일 뿐.
클리포트 크리스털이 그러하듯, 불길한 상상 역시 육신을 대체할 수 있다.
이는, 불길한 상상의 약점인 마수 통제의 까다로움과 본체의 나약함을 동시에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곧 불길한 상상 그 자체가 되니, 이는 실로 궁극의 힘이라!
다만, 문제가 있다.
능력의 원 소유자였던 베아트릭스에겐 없었지만, 나에겐 존재하는 제약 때문이다.
시간제한.
…
무언가가 떨어졌다.
곧, 이번에는 어딘가가 부스러졌다.
내가 만들어 낸 그 어떤 피조물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육신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피조물이야 사라져도 힘을 회복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
하지만 내 몸은?
몸이 사라진 후에 남는 건 뭘까?
…
깨달음을 얻었다.
얻었는데, 무언가 공백이 있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
필요한데….
그걸 찾기 전에 내가 죽을 것 같아.
마지막의 마지막에 얻은 어렴풋한 깨달음이 무색하게 허무하게 죽는 거야?
바로 그 순간.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내 부족함을 메꿔주는 것은 ‘우리’였다.
“에, 엘레나 누나! 조금만 기다리세요!”
의식이 끊기기 직전, 내 지성이 처음으로 기묘한 정보를 해석해 냈다.
사방에 가득한 클리포트 크리스털의 잔해?
어떻게 아직도 저 조각들이 남아있지?
*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34일 차
현재 위치 : 검색 중….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날짜가 넘어갔네.”
“넘어갔네요.”
“…”
“…”
“조언 횟수가 하나 낭비되었군.”
“그렇군요.”
어제, 첫 번째 조언은 ‘죄인의 평야’에 대해 질문하는 데 썼고, 두 번째 조언은 ‘가장 깊은 바다’에 대해 질문하는 데 썼다.
세 번째가 지금 날짜가 지나며 사라진 것.
“위기 알림 용으로 남겼었는데.”
“나도 그랬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쓸 걸 그랬어.”
“날짜가 넘어갈 줄 몰랐으니….”
위기 알림 용도로 조언 횟수를 아꼈는데, 날짜가 넘어가서 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험?
호텔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이유도 매번 다르다.
격렬한 싸움이나 깊은 고민에 빠져서 놓치는 경우가 제일 흔하다.
지금 몇 시인지 알 수 없어서 날짜가 넘어가기 직전까지 모를 때도 있어.
아예 시간의 흐름 자체가 뒤틀린 경우도 비일비재하지.
“어쩔 수 없지.”
“지나간 일은 잊어야죠.”
고개를 끄덕이던 중, 옆에서 미로의 어이없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긴장 가득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둘이 사이 참 좋네!’ 한 마디 정도는 했을 느낌.
“둘이 사이 참 좋네!”
역시 미로야.
하고 싶은 말은 참는 법이 없어.
“…”
어느 시점부터 선대에게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같은 축복을 공유하는 존재.
관점에 따라선 경쟁자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긴 세월 나와 유사한 고민을 해왔던 사람이다.
여유가 있다면 시간을 들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그런 사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선대의 목적은 단 하나, 거짓된 세상을 벗어나 3층을 오르는 것.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나를 배신할 수 있다.’
뭐, 서로 셈법이 있는 건 당연하니 새삼 따질 일도 아니야.
지금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 꿀꺽!
미로가 떨리는 눈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아, 아직도 모르겠어? 누가 나타날지? 아까 조언도 썼잖아!”
“… 선대 당신은?”
“미안하네. 나도 전혀 모르겠군.”
“성모?”
“짚이는 게 전혀 없네요.”
다음 구역, 가장 깊은 바다에 대기하는 존재는 누굴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외부인인 나와 선대 지혜는 그렇다 치자.
억겁의 시간 동안 달을 모셔 온 성모도 짐작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전 두 구역은 달랐다.
달 교회, 죄인의 평야라는 이름만 듣고도 적이 ‘성모’와 ‘대량의 망령’임을 예상했지.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하자.
달이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쓴 적 없고, 심복인 성모에게조차 숨겨온 비장의 패를 지금 썼다?
선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
“이런 생각도 해봤네.”
“…”
“달이 최근에 만든 비밀병기가 아닐까?”
나와 비슷한 생각.
“그런데, 어제 질문하기로는 달랐단 말이지.”
“…”
“가장 깊은 바다의 적이 누구인가? 했더니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는 답이 왔어.”
“내게는 ‘이미 아는 존재’라더군요.”
모든 문제의 시작.
이미 아는 존재.
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네.
그냥 좀 시원하게 말해줄 수 없는 거야?
진짜 올빼미 이 자식!
“이놈의 새 때문에 내 마음이 만년 넘게 병들고 있네.”
“…”
“답변 꼬락서니를 보니 더 물어도 소용없을 게야.”
갑자기 선대 지혜와 더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답답함이 가중된 시점.
— 덜컹!
“곧 다음 구역에 도착합니다.”
계기판에서 ‘가장 깊은 바다’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결국, 선대가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지만, 완벽한 계획은 없네. 각자 임기응변을 발휘하도록 하지.”
— 덜컹!
도착했다.
*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항거할 수 없는 압력.
단박에 인간을 우그러트리는 심해의 수압이다!
명칭이 ‘가장 깊은 바다’인 시점에서 여기까진 예상했고, 대응책도 마련했다.
즉각 선대가 투명하고 얇은 막 같은 것을 불러내 주변을 감쌌다.
“오래 버틸 수 없네!”
저 막은 오래전 선대 지혜가 호텔 혹은 학교에서 얻은 탈출 도구.
윙 부츠나 방호복이 그러하듯, 탈출 도구는 기본적으로 1인용이다.
지금처럼 다수를 보호하는 용도로는 장기간 쓸 수 없다는 뜻!
— 화르르…!
신성한 태양을 소환해 승강기 출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막이 찢어지면, 그다음은 내가 버틸 순서다.
기실, 수압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가장 깊은 바다의 진짜 적은 따로 있을 터!
“나와라…!”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채 푸른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순간.
— 스와아아앗!
대양을 가르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감히 그 크기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크기.
“…”
거대하다.
광대하다.
압도적이다.
대자연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 삐이익!
뇌리를 가득 메운 정체불명의 환청과 함께 생각이 탁 멈췄다.
압도적인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내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
모두가 아찔함을 느끼며 휘청이는 시점.
선대 지혜의 손에서 다시금 ‘상자’가 튀어나왔다.
“열려라! 판도라의 상자여!”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직후, 주문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만악의 근원이 풀려났도다…!”
굶주린 자의 허기.
배신당한 자의 분노.
장대에 매달린 자의 고통.
재산을 날린 자의 절망.
사랑을 잃은 자의 집착.
가족을 잃은 자의 슬픔.
힘없는 자의 무력함.
세상의 모든 부정함을 낳은 태초의 거악!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지독한 악성(惡性)이 마치 안개처럼 뻗어나가니, 승강기로 다가오던 거대한 형체가 처음으로 움찔했다.
다음으로 들려오는 주문.
“상자에는 단 하나, 희망이 남았느니….”
가장 어두운 지옥에서 그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는 샛별, ‘희망’이 모두를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더없이 청량하고 상쾌하다.
이 순간만큼은, 승강기 밖의 괴수가 뿜어내는 압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정말로 대단한 유산! 아무리 호텔이라지만, 이런 보물이 -”
진심으로 감탄하는 성모의 목소리.
“흰소리 할 때가 아니다! 약간의 시간을 벌었을 뿐!”
이에 대한 선대 지혜의 단호한 답.
그렇지, 유산 하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저런 압도적인 존재를 진실로 위협할 수는 없다.
“저, 저건…. 저건 대체 뭐냐? 달 본인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
여전히 의문에 빠진 선대 지혜.
반면, 나와 성모는 괴물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저것 역시 달입니다.”
“뭐?”
알고 있었어.
저런 녀석이 있다는 것, 알고 있었고 심지어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어.
단지,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리라 상상도 못 했을 뿐!
성모는 종종 달과 왕자를 구분해서 표현하곤 했다.
사라진 내가 상태창에 남긴 기록 역시 때로는 달과 왕자를 다른 존재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단순히 특이한 말버릇이 아니다.
달의 정체는 2단계 영혼 결집체.
이는 곧, 정신을 하나로 합일하지 못한 불완전한 신을 말한다.
태고의 문명이 이르기를, ‘정신병에 걸린 신’.
왕자는 결코 달 전체가 아니다.
왕관이라는 신비한 힘을 통해 달 전체를 대표하고 있을 뿐!
“… 달의 또 다른 정신 중 하나입니다.”
아찔하다.
달 교회의 성모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
죄인의 평야의 망령들은 지성이 없다시피 했기에 미끼 작전이 통했다.
하다못해 마지막 층, 성역의 왕자는 ‘왕관’이라는 불분명한 공략법이라도 있어!
저 괴물, 달의 또 다른 정신은 대체 어떻게 상대하지?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지성이 높으니 미끼 따위가 통할 리도 없다.
왕관을 아직 손에 넣지도 못했다!
해법이 떠오르지 않아 숨이 탁 막혔다.
그 순간.
「조언 : 3 -> 0」
‘그토록 완벽한 패라면, 왜 왕자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쓰지 않았겠느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