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29)
EP.630 630화 – 가장 오래된 소원 (11)
630화 – 가장 오래된 소원 (11)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34일 차
현재 위치 : 검색 중….
현자의 조언 : 0」
– 한가인
달의 지배자, 왕자가 거하는 장소 – 성역.
성역의 구조는 길게 뻗은 일직선 루트로 지극히 단순하며, 갈림길 따위는 없다고 한다.
다만, 신성한 태양을 소환해 초인적인 시각으로 전방을 보았음에도 일정 구간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됩니까?”
“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아요.”
“여태껏 쉬운 일이 있긴 했나?”
남은 길도 어렵다는 성모와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투의 선대.
“… 저도 이 길을 끝까지 가본 적은 없답니다. 보통, 왕자님이 배웅 오셨죠.”
끝까지 가기 어렵다?
자세한 설명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성모를 소환한 이래 그런 여유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성모의 시간은 이제 겨우 5분 좀 넘게 남았으니까.
“출발합시다.”
*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깨달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
비유하자면, 경사가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느낌.
물리적인 경사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오감은 이 상황을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으니, 그나마 비슷한 오르막길을 오르는 감각처럼 느낄 뿐.
“…”
침묵 속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자, 이번에도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갔다.
높은 위치.
높은 차원.
지고한 영역.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이 전에 해본 적 있다.
— 탁!
“조금 힘들군.”
선두에 있던 선대가 멈춰 섰다.
“괜찮습니까?”
“아직은.”
“…”
“이와 비슷한 느낌을 기억하네. 내겐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자네들에겐 아직 생생한 기억이겠지.”
“축복의 성소.”
“그래, 축복의 성소에서 올빼미를 만날 때의 그 느낌이야….”
축복의 성소에서 후원자를 만날 때마다 겪었던 일이다.
육신을 잃고 정신만 끝없이 위로 올라가는 감각.
물리적인 개념의 위가 아닌, 근본적으로 고차원적인 영역에 이끌리는 감각.
성역의 비밀 일부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평지가 아니군요. 위로 향하는 길입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높은 영역이로다….”
그때, 뒤에서 미로가 중얼거렸다.
“가인아, 우리 조금 작아진 것 같지 않아?”
“착각이야.”
“지, 진짜 작아진 것 같은 -”
“우리가 작아진 게 아니라, 이 공간이 거대해지는 거야.”
“뭐?”
“갑시다. 길은 하나 뿐입니다.”
다시 몇 분 정도 나아간 시점.
뒤쪽이 너무 조용하다 싶어 뒤를 확인하니, 미로와 성모가 보이지 않았다.
“성모.”
“허어! 한번은 일 벌일 것 같더라니, 지금이었나?”
성모가 미로를 데리고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선대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기색이다.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는데 그게 지금이구나 정도의 반응.
내 생각도 비슷하다.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면 모르되, 성모는 눈에 띄게 회복하고 있었네.”
“그랬지요.”
처음에는 정신이 반쯤 무너진 채 내 말을 의심 없이 따르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다루기 편했겠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멀쩡해지기 시작했지.
달 교회에서 또 다른 자신을 인지한 게 첫 번째 계기였으리라.
이후, 승강기 유지를 위해 연거푸 피리의 도움을 받은 게 결정타다.
“본인 나름의 목적이 생겼을 겁니다.”
“… 어쩔 생각인가?”
“그냥 갑시다.”
“그래, 그러지.”
성모가 다른 생각을 품었음을 알면서도 철저히 감시하지 않은 이유.
갑자기 사라졌음을 확인하고도 나와 선대가 크게 당황하지 않는 이유.
“나쁜 의도는 아닐 겁니다.”
“자네도 가장 깊은 바다에서 뭔가 느낀 모양이군.”
의도치 않게 모두의 생각이 뒤섞였던 장소, 가장 깊은 바다.
그곳에서 성모의 생각을 어렴풋이 읽었지.
정확히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다.
그녀의 목적은 전에 말했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해피엔딩.’
성모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호기심은 든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분 내외일 터.
이 잠깐의 시간에 뭘 할 수 있을까?
*
다시 몇분의 시간이 흘렀다.
어딘가로 떠난 소환체 성모가 잔여 시간을 전부 소모하고 사라졌을 시점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쉼 없이 앞으로 – 아니, ‘위로’ 나아갔다.
“흐으으…!”
나보다 앞에 있던 선대, 그는 결국 높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릎 꿇은 채 헐떡이기 시작했다.
“괜찮습니까?”
“그래 보이나?”
“잠깐 쉽시다. 어차피 이 상태로 싸우긴 무리이니.”
“왕관에 대해 슬슬 알 것 같네.”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군요.”
왕관은 태초의 문명이 2단계 영혼 결집체를 통제하기 위해 남긴 안배.
왕자가 모순과 같은 위대한 존재조차 억누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아까 자네가 모순에게 말했지? 왕관의 이치란 곧, 옥좌에서 들려오는 드높은 목소리라고.”
“그랬지요.”
“지금 우리는 드높은 장소로 나아가고 있네. 다시 말해, 이 공간 자체가 왕관 일부야!”
“…”
“우리는 드높은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선대, 침착함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다음 말은 다소 즉흥적이었는데, 내 앞에서 괴로워하는 선대의 중압감을 살짝 덜어주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동료가 쓰러지면 저도 좀 무섭거든요.”
“허…! 동료? 정말 그리 생각하나?”
“아닙니까? 한배를 탄 지 꽤 됐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한배를 탄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하나?”
“가끔 하죠.”
“…”
“…”
“전에 협상할 때 자네가 했던 말. 관리국과 연합, 약탈자 중 누가 이겨도 상관없다는 소리 말일세.”
“…”
“생판 거짓말이었잖나?”
협상하며 했던 이야기.
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가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세상에 떨어졌다.
우리에게 관리국과 약탈자는 별 차이 없으니, 약탈자의 승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약탈자와의 동맹을 위해 지어냈던 거짓말이다.
그 자리에선 속였는데, 시간이 흐르며 선대가 결국 거짓을 알아챘구나.
가장 큰 원인은 아리와 묵성 할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이리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관리국에 대한 충성심과 사명감을 품은 이 둘은 약탈자의 승리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우리와 직접 만난 적 없는 약탈자 세력은 속일 수 있다.
동맹의 필요성은 확실하니, 내가 왕처럼 군림하며 아리, 묵성 두 사람의 의견을 억눌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
하지만 선대는 우리의 관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내가 아리와 할아버지의 의견을 무시하고 찍어누를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더욱 동료 아니겠습니까?”
“뭐?”
“내 거짓말을 알아챘으면서도 그 사실을 약탈자들에게 알리지 않았군요.”
“…”
“오히려 제 거짓말을 도와주신 듯합니다. 이런 보고 올리신 것 아닙니까? 젊은 지혜는 연합에 합류하고 싶어 한다?”
선대까지 내 거짓말에 동참했다면, 약탈자들은 날 철석같이 믿고 있으리라.
“서로 솔직해집시다.”
“솔직해지자?”
“당신에게 약탈자들 따위가 무슨 상관입니까?”
“… 연합 사람들이 지금 대화를 들으면 즉시 피 토하고 쓰러질걸세.”
“이 자리에 오지도 못한 엑스트라가 피를 토하든 목을 매달든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선대를 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단 하나의 간절함을 안다.
선대 지혜의 소망은 단 하나.
허무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벗어나 3층, 승천의 길에 도전하는 것!
“나는 선대 당신을 믿습니다. 3층을 가고자 하는 그 간절함을 믿습니다.”
“…”
“그러니 당신도 날 믿으시길. 내가 당신의 소망을 위해 노력 중이니까.”
“허! 그러니까, 이 과정이 날 3층 보내주기 위한 자네의 헌신이다?”
“겸사겸사죠. 충분히 쉬었으니 출발합시다.”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
— 다각! 다각!
계속해서 앞으로, 위로 나아가던 중 불현듯 떠오른 기억.
저녁 무렵, 아파트 난간에 기대어 서울 도심 야경을 내려다보곤 했지.
도로에 가득한 수백 수천 대의 차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손바닥을 펼쳐보자.
멀리 있는 것은 작아지고, 가까이 있는 것은 커지는 원근의 이치 덕에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손바닥만 한 공간에 수십 대의 차, 세자릿수의 사람이 들어찬 것을 볼 수 있다.
엄청난 거인이 된 것 같은 느낌.
저 아래의 개미처럼 작은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로 승화한 느낌.
왜,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비행기의 발명은 산업도 과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높은 위치가 주는 고양감이 이러하다.
지금 나는 세상 그 어떤 비행기나 우주선도 도착할 수 없는 하염없이 높은 장소로 나아가고 있다.
…
어느 시점부터 나 역시 서 있기가 괴로웠다.
이 위치, 이 아득함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 길의 끝까지 견뎌낼 수 있다면, 이후의 나와 이전의 나는 전혀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고.
“허억!”
“잠깐 쉽시다.”
“달이…. 왕자가 지금 우릴 공격한다면….”
“그럴 거라면 진즉 했을 겁니다.”
“…”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장소에서는 왕자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왕자 역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고대에 만들어진 달의 봉인.
관리국과 약탈자 연합이 바깥에서 가하는 강도 높은 압박.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한 모순이 가하는 부하.
마지막으로 성역 자체의 특이성!
하늘 아래 모든 세력이 힘을 모아 준비한 다양한 안배가 왕자를 억누르고 있다.
그렇게 믿고 나아가야 한다.
숨을 헐떡이던 선대가 문득, 내 쪽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네, 아까보다 내게서 멀어졌는데?”
“제 걸음이 좀 느린가 봅니다.”
“걸음이 느려? 일부러 느리게 걷는 건 아니고?”
“무슨 말씀인지?”
“날 실험용 쥐 혹은 희생양처럼 쓰는 것 아닌가? 내가 한참 앞을 걸으며 성역의 압력을 받아내고, 혹시 위험한 일 있으면 먼저 당하는 거지.”
“오해가 많으십니다.”
“오해는! 아까 동료 이야기한 게 미안하지도 않나?”
“제가 말한 오해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뭐?”
“호텔식 동료는 원래 이렇거든요. 위험한 일을 동시에 다 같이 겪으면, 까딱하다가 같이 죽는 것 아닙니까?”
“자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있죠. 위험한 장소는 한 번에 한 사람이 가야 합니다.”
내 논리적인 말을 들은 선대는 마치 붕어처럼 뻐끔거리더니, 한탄하듯 말했다.
“굳이 내가 더 위험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시간을 돌린 사람이 누굽니까? 접니다. 정보가 더 많은 사람이 오래 살아야 이길 확률이 높아집니다.”
“… 자넨 뭐든지 다 이유가 있군. 그렇지?”
“그럼요.”
“허….”
“괜찮으십니까?”
“지금 날 가장 슬프게 하는 사실이 뭔지 아나?”
“뭡니까?”
“자네 말이 지극히 합리적이라 느끼는 나 자신일세.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군.”
“듣겠습니다.”
“자네가 이러고도 사람 새끼인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 외통수에 빠졌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
“절 믿으시지요.”
“날 외통수에 빠트린 건 자네야.”
“자, 자, 앞장서시지요. 3층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다시 3, 4분 정도 나아간 시점.
— 털썩!
여태껏 내 앞에서 견뎌왔던 선대가 결국 쓰러졌다.
“아아…. 테레지아…. 세드릭…. 도와줘, 날 도와줘….”
테레지아? 세드릭?
선대의 옛 동료인 것 같다.
“오랫동안…. 인내하고 또 인내했네….”
“선대, 선대!”
“충분하잖아…. 이 정도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내 말이 안 들립니까?”
“아무도 없나? 나를, 이 지옥에서 풀어줄 사람이….”
“…”
선대가 죽거나 한 건 아니야.
적절한 시점에서 깨어나서 날 도울 수도 있겠지.
다만, 지금 당장은 무력해졌다.
…
전방에 무언가가 흐릿한 형체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득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결말이 다가오고 있다.
남은 것은 해피엔딩이냐, 배드엔딩이냐의 문제!
— 찰랑!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