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98)
EP.699 699화 – 301호, 저주의 방 – ‘종의 기원’ (33)
699화 – 301호, 저주의 방 – ‘종의 기원’ (33)
– 김아리
301호의 세 번째 시도를 시작할 때, 한 가지 염려했던 점은 미로의 시작 위치였다.
뜬금없이 혼자 제주도에서 시작하기라도 하면 귀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호텔은 미로를 내 동생이라는 설정으로 나와 묵성이가 사는 집에서 시작하게 했다.
지금, 미로는 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리야… 공작이 우리 말을 들을까?”
“왜 그래? 어제 회의 때 이미 한번 소환해 봤잖아?”
그렇다. 우리는 어제저녁에 이미 공작을 소환해서 2분 정도 짤막하게 대화했다.
공작의 태도는 제법 협조적이었다고 생각해.
“그, 그때는 가인이가 있었고! 지금은 없잖아.”
“…”
1회차 때 확인한 사실.
공작은 가인이를 제외한 전원을 손쉽게 압도할 수 있다.
따라서 가인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 태도가 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미로의 두려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소환하자마자 우리를 죽이거나 세뇌하면 어떡해? 내, 내가 역 소환하기도 전에 공격할 수 있잖아!”
이럴 때는, 시간대여기에 소환체를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네.
다만, 미로와 달리 난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괜찮을 거야.”
“왜? 회, 회의 때 네가 말했잖아! 왕이나 선각자는 설득이 어려울 거라면서.”
“그 둘은 그렇지만, 공작은 말이 통할 거야.”
“무슨 소리야? 공작이 왕보다는 약하지만, 선각자보단 훨씬, 훠어얼씬 강한 존재인데!”
A는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지만, B는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논리.
미로는 위 논리를 A가 B보다 강해서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한 모양이다.
“미로, 왕은 강해서 설득할 수 없고, 공작은 약하니까 설득할 수 있다는 그런 게 아니야. 힘이 아니라 성향의 문제지.”
“성향?”
“1회차 때, 종말 이후에 등장한 공작과 가인이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협상했지. 어제 회의 때도 그랬고. 그 둘은 성향이 비슷해. 강약을 떠나서 초이성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말이지.”
설득되고 안 되고는 강약보다는 성향의 문제라는 것.
곧, 미로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니까 공작도 T야?”
?
“… 뭐?”
뭔소리야? 티? 티가 뭔데?
당황하며 되묻자, 미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리는 이런 것도 몰라? 에휴… 진짜 느리다 느려.”
“…”
“아리야, 요즘 핸드폰이 스마트폰인 건 알지? 아닌가? 인터넷은 알아?”
— 쿵!
즉각 미로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꺅!”
“헛소리하지 말고 소환이나 해.”
미로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시간 대여기를 소환했다.
— 철컹!
곧, 희뿌연 안개와 함께 공작이 그 형체를 드러냈다.
“…”
약 10초 동안 이어진 의도치 않은 침묵.
마음의 준비는 진즉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작이 눈앞에 나타나니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네.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간략하게 전달했지만, 다시 말할게. 당신들의 왕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의 종족 역시 천상에서 미아가 될 뿐이니까. 직접 경험했지?”
침묵을 지키는 상대.
“즉, 이스의 왕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셈이지. 충신이라면, 왕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격이 낮은 존재와는 대화하지 않겠다. 이런 건 아니겠지?
“두 가지 요구 사항이 있어. 첫째, 당신이 왕을 설득해 봤으면 좋겠어. 왕께서 가시는 길에는 파멸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천상에서 미아가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해달라는 이야기야.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야. 당신이 직접 경험한, 진실을 전하라는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설득의 가능성에 대해 난 회의적이야.
가인이에게도 그리 말했고, 회의 때도 똑같이 말했어.
이스의 왕 같은 존재는 설득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동료들의 생각은 달랐으니 해당 내용 또한 전달할 뿐이다.
“둘째, ‘은총 의식’의 중단.”
처음으로 공작의 흐릿한 형체가 요동쳤다.
나름대로 복잡한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결국, 모든 파멸의 근원은 이스의 왕이 진행 중인 은총이야.”
301호의 해결 조건 : 강원도 지하에서 진행 중인 ‘은총’의 뿌리를 뽑는 것.
이것이 회의 끝에 도달한 모두의 결론이다.
다른 주제에서는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모두가 동의했다.
“강원도 지하에서 진행 중인 마도 의식을 중단하면, 지금 상황을 수습할 수 있어.”
서서히 공작의 시선이 날 향함을 느낀다.
“은총은 지극히 수준 높은 마도 의식의 일종이지. 귀중한 재료, 복구하기 어려운 설비, 돌이킬 수 없는 절차 등이 있을 거야. 당신 정도면 은총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중단하는 법도 알고 있겠지?”
처음으로 공작이 답했다.
‘멈출 수 있다.’
“다행이네. 그렇다면, 파멸의 근원인 은총 의식을 중단해 줘. 가능하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어야겠지. 그리고…”
너희들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뒷말은 생략해도 되겠지?
— 스아아…!
그 순간, 공작의 기세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심신 양면으로 짓눌릴 듯한 압박감!
지금 공작이 나를 죽이려 들면? 저항할 방법이 없다.
미로의 역소환? 상대는 마음먹는 즉시 미로를 기절시킬 수도 있다.
“…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시간은 55분 27초군.”
“그렇 -”
‘너희의 계획대로라면, 내 시간이 부족할 일은 없다. 오히려 차고 넘치겠지.’
“…”
우리의 계획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말투.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공작은 강원도 지하에 웅크린 이스의 왕보다도 까다로운 면이 있다.
우리처럼, ‘천상’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 공작이 예상치 못한 의견을 전달했다.
‘공주님을 알현할 기회를 달라.’
“뭐?”
‘5초면 충분하다.’
이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은 공작이 은솔이에게 무슨 말을 할 생각이지? 가 아니었다.
겨우 5초 동안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야?
*
– 이은솔
.
..
…
나는, 그러니까…
301호에서 깨어나서, 차에 탄 채, 미로를 태우러 가고 있던 것 같다.
“…”
분명 조금 전까진 그랬는데, 지금 풍경은 뭐지? 바닷가?
설마 미로를 데리러 가다가 졸기라도 한 거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 공주님?”
순간 당황했지만, 곧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 공작?”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지금… 이 상황은 뭐죠? 꿈?”
“비슷합니다. 당신과 독대하기 위함입니다. 또, 제게 남은 시간이 한정된 만큼, 시간을 절약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
상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말투는 공손하게 느껴졌다.
어찌 됐든, 난 이스의 종족에게 있어 창조신에 해당하는 존재의 딸이긴 하니까.
“공주님이라고 불리니까 되게 이상하게 느껴지네요. ‘어머니’는 딱히 절 자식처럼 여기진 않으시는 것 같던데.”
어머니에게 나와 형제들은 뭐였을까?
진짜 자식인 이스의 종족을 구원하기 위한 조금 비싼 도구?
그때, 공작이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 않습니다.”
“…”
“공주님이 그리 여기신다면, 이는 작은 사랑과 큰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사랑과 큰 사랑?”
“아내, 자식, 친구 – 선택받은 소수에게 향하는 사랑이 곧 작은 사랑입니다. 또한,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의 일반적인 형태이기도 합니다.”
“… 그러면, 큰 사랑은 뭐죠?”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 – 그 이상의, 헤아릴 수 없는 이에게 향하는 사랑이 큰 사랑입니다. 신이 피조물에게 베푸는 사랑의 형태가 이와 같습니다.”
“…”
“왕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죽은 왕자님과 공주님들 역시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최초의 소원을 본 것도 아닐 텐데, 큰오빠와 여동생의 죽음을 어떻게 알지?
“단지, 공주님과 왕자님을 사랑하듯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입니다.”
순간, 속에서 치미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하게 반박했다.
“거짓말! 우리는 너희를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이나 다름없었어.”
“왜 그리 여기십니까?”
“왜냐니?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큰오빠와 여동생은 물론, 나까지 희생시켰잖아?”
“공주님, 부디 넓은 시야를 가지십시오.”
“뭐?”
“작은 사랑의 본질은 차별입니다. 아끼는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를 구분합니다. 큰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차별이 없기에 큰 사랑은 때로는 잔혹합니다.”
“무슨, 무슨 말이지?”
“1,000억을 공평히 사랑하는 존재는 999억을 구하기 위해 1억을 가차 없이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와 같은 이치는 공주님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닙니까?”
“…”
공작의 말대로, 나는 큰 사랑의 개념을 단박에 이해하고 말았다.
충성의 대상이 개체가 아닌 종족이기에, 100억 인류를 위해 1억을 학살할 수도 있는 마음가짐.
관리국이 인류에 바치는 봉사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여기까지 이해했을 때, 나는 공작의 뜻을 이해했다.
“… 너는, 어머니가 누군가를 희생시킨 일이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무수히 반복된 일입니다. 공주님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십니다마는, 왕이 보기에 공주님과 우리는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영겁에 걸친 이스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공작의 말은 이거네.
이스의 종족을 위해 인간에 불과한 나와 내 형제를 희생했다고 봐선 곤란하다.
왕이 보기엔 이스의 종족도, 나와 내 형제들도 모두 ‘피조물’이다.
왕은 과거에도 999억의 피조물을 지켜내기 위해 1억을 가차 없이 희생해 왔으며, 나와 형제들이 겪은 비극도 이 같은 일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다.
다만, 딱히 이런 주장에 동의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뭐, 위대한 왕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문득, 처음과 달리 지금 내가 꽤 거칠게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공작이 왕을 옹호하듯 말해서 짜증이 났는지도 모르지.
“네가 무어라 말하든, 이스의 왕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있어.”
다음 순간, 공작은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주님. 저는 당신에게 왕의 뜻에 동참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거대한 군체가 존속하기 위해 일부를 소모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이스의 종족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인류 역시 해당합니다. 부정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군체의 존속을 위해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가혹한 논리지만, 관리국이 인류를 지배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공작의 말에 반박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작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뜸을 들였다.
날 이해시키기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공주님이 살고 계신 이 땅에는, 벌이라는 군체 생물이 있지요.”
“…”
“겨울이 되면 수벌은 벌집 밖으로 내몰려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평시엔 필요하지 않은 개체들이니, 혹독한 시기엔 희생해야 하는 법이지요.”
“…”
“진균에 감염된 일벌 개체는 벌집에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죽습니다. 이것 역시 군체를 위한 행동입니다.”
“군체를 위해 개체의 희생은 당연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
“공주님, 수벌이나 일벌만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주 개체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희생하지요.”
“그래서, 나와 내 형제들의 희생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 뭐 이런 거야? 이걸 지금 설득이라고 -”
“때로는.”
공작의 다음 말은 정말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여왕 역시 희생해야 합니다.”
“…”
“일벌들은 생산력이 떨어졌거나, 수명이 다한 여왕벌을 물어 죽이고 새로운 군주를 길러냅니다.”
“…”
“판단력이 떨어진 여왕벌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요. 억겁 속에서 모두가 하나를 위해왔듯이… 때로는, 하나가 모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법입니다.”
“…”
“옥좌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습니다. 날 때부터 페로몬을 뿜어 일벌을 통제할 수 있는 공주 개체만이 벌집의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날 때부터 왕의 힘을 담아낼 수 있게끔 태어났지요.”
“…”
“똑똑한 분이시니, 제 말을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