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699)
EP.700 700화 – 301호, 저주의 방 – ‘종의 기원’ (34)
700화 – 301호, 저주의 방 – ‘종의 기원’ (34)
– 김아리
쌀쌀한 바람을 느끼며 차창 너머를 바라본다.
허름한 가건물 몇 채와 반쯤 썩어가는 비닐하우스 여럿이 보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주인이 관리를 손 놓은 농장이라도 되나 착각할 법한 풍경.
하지만, 나와 이 자리의 동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저 풍경은 전부 위장이며, 실제로는 관리국이 강원도 지하에 만들어 낸 정체불명의 유적 입구라는 사실을 말이다.
유적은 또한 종말의 근원이며, ‘은총’의 비밀이 숨겨진 장소이다.
우리가 301호의 결말을 만들어 낼 격전지이기도 하다.
아직 가장 중요한 배우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지.
그때, 트럭을 운전 중이던 묵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야, 야. 미로가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뭔데?”
“공작의 요청대로 은솔이를 만나게 해줬단다. 대화는 몇 초 만에 끝났고, 직후에 은솔이는 잠시 기절한 상태라는군. 문제는, 공작 그놈이 요구 사항을 추가했다는 거야.”
추가 요구 사항?
“뭐라고 했는데?”
“이 시간대에 있는 다른 공작을 만나게 해달란다. 만나는 방법은 본인이 알고,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하다는군.”
“… 3분.”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거다. 계획대로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301호가 끝날 테니까.”
뒤에 있던 엘레나가 반응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죠. 공작은 시간대여기의 위험성을 모르는 것 같은데요? 소환체와 현 시간대의 본체가 마주치면 -”
“미로가 그 이야기를 해줬단다. 그랬더니, 이 시간대의 본인을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공작’을 만나겠다고 했다는군.”
“어머나!”
나도 속으로 ‘어머나!’ 하고 말았네.
공작의 요청 덕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추가 정보 – 이미, 지구에 공작이 ‘여럿’ 도착해 있다 – 때문이다.
곧, 엘레나 건너편에 앉아있던 상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위험천만한 요구 사항이군요. 공작도 결국 외계인이요, 사악한 존재 아닙니까.”
묵성이 즉답했는데, 실시간으로 미로와 소통 중인 모양이다.
새삼스럽지만, 묵성의 축복이 ‘아직은’ 큰 문제 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의미지.
미로가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야, 야! 근데 공작 놈이 은총 의식의 중단 혹은 조정은 본인 혼자서 못 한다는데?”
“이런…!”
“최소 셋 이상의 공작이 개입해야 은총을 멈출 수 있다고 한다.”
“어제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놈이 개새끼지!”
우리가 공작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것처럼, 공작 역시 꽤 많은 정보를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씩 푸는 상황이네.
이전 회차의 공작이 해줘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이스의 왕을 설득 시도하는 것.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크게 기대하진 않지만, 성공/실패를 떠나서 설득 시도 자체가 계획 일부다.
둘째, 은총 의식의 중단 혹은 조작.
이 부분은 오직 공작만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301호에 들어오니 그제야 상대가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드러냈다.
본인 혼자서는 은총 의식을 조작할 수 없고, 다른 공작 여럿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
어떻게 하지?
우리 전력으로는 공작 하나를 통제하는 것도 버거운데!
긴장감 속에서 모두가 눈치만 보는 시점.
조수석에 앉아있던 동료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줍시다.”
“뭐?”
“어차피, 이번 회차의 계획은 어느 정도는 공작을 믿어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다,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요?”
불안해하는 엘레나에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이번 시도는 터지는 거죠. 하지만, 관측소에 믿음직한 보험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다음 회차에선 공작을 믿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만약 공작의 배신으로 이번 회차가 실패하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어.
왜? 관측소에 남아있는 ‘믿음직한 보험’이 탈출에 성공할 테니까!
다음 회차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풋!”
너무나 자신만만한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실제로는 저 자신만만한 대답만큼 탈출이 쉽지는 않을거야.
하지만, 저 말 덕에 동료들의 불안한 기색이 줄어들긴 했네.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무슨 생각이요?”
“공작 본인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것 같군요.”
“…”
“그가 배신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협조할 겁니다.”
“그, 그런가요?”
“다만, 큰 틀에선 우리에게 협조하면서도 본인의 목적이 있을 것 같군요.”
조수석의 동료가 통찰한 공작의 전략.
큰 틀에선 우리에게 협조하되, 본인 역시 나름의 목적을 추구한다.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에게 별도의 목적이 있다면, 무엇일 것 같아?”
잠시 침묵하던 청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새로운 톱니바퀴를 구하는 것.”
*
– 이은솔
.
..
…
“아.”
정신을 차렸을 때, 공작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옆자리에 앉아있는 미로가 보였다.
“깼어?”
“… 미로, 조금 전에 공작을 소환해서 나와 대화하게 했던 것 맞지?”
“응. 너랑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거든.”
공작의 요청은 지극히 명확하다.
판단력이 흐려진 어머니 대신, 내가 그녀의 힘을 이어받아 이스의 왕이 되어달라는 것.
“공작이 뭐라고 했어?”
“…”
“은솔아?”
“조금만, 조금만 생각해 볼게.”
왕이 되어달라는 게 무슨 의미지?
내가 진짜 죄수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는 거야?
이어받으면, 정말 이스의 종족이 내게 충성할까?
애초에, 이스의 종족은 왜 왕을 필요로 할까?
순식간에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외계인의 왕으로 각성한 내 미래가 떠오르자 정신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인간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아득한 힘과 우주적인 권세에 대한 탐욕.
이 순간, 호텔이 내 본성에서 탐욕을 읽어낸 이유를 이해하고 말았다.
“후…”
가볍게 한숨 쉬며 주변을 보니, 그새 차 내부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가인이는 진즉 사라졌고, 아침 일찍부터 바빴는지 피곤한 기색의 미로만 옆에 있었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운전자도 묵성 할아버님에서 진철이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아. 그나저나 네가 모는 차에 타는 것도 오랜만이네.”
“하하! 제가 수동만 아니면 다 몬다니까요.”
할아버님은 그새 어디로 간 걸까?
애초에 얘가 진철이가 맞긴 한 거지?
아까부터 했던 한 가지 생각.
어쩌면, 비어있는 조수석에 송이가 앉아있을지도 몰라.
송이가 어제 뭐라고 했더라?
아, 301호에 다시 들어가면, 부모님이 이스의 종족에게 몸을 빼앗기는 일을 막을 거라고 했었어.
“미로.”
“응?”
“송이는 어떻게 됐어? 부모님을 지킨다고 했었는데.”
“아, 그 일은 이미 끝났어!”
“벌써?”
“벌써라니? 새벽에 이미 끝났는데?”
“아…”
새벽이라는 말을 듣자 2회차 초반에 밝혀진 정보가 떠올랐다.
301호 시작 시점 새벽, 송이의 집에는 이스의 종족이 안개 같은 형상을 빌려 침입했었지?
“그, 새벽에 나타나는 안개를 막은 건가?”
“응. 걔네가 침입자였어. 송이가 둘 다 죽였어. 걔네, 뭔가 소라게 같지 않아?”
“… 소라게?”
뜬금없이 소라게라니?
“소라게는 등껍질을 계속 갈아치우지만, 등껍질이 없으면 죽잖아. 뭔가 비슷해.”
“이스의 종족은 육신을 갈아탈 수 있지만, 육신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으니까?”
“응. 비슷하지 않아?”
중학생이 떠올릴 법한 비유긴 한데, 듣고 보니 살짝 비슷하긴 하네.
소라게라고 생각하니, 이스의 위대한 종족이 갑자기 뭔가 하찮은 느낌이 들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미로 말대로면, 송이는 이미 가족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로워진 상태다.
즉, 지금 이 차에 탑승한 상태일 수도 있지!
어쩌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수석에 송이가 있을지도 몰라.
조수석에서 주기적으로 내게 환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예전이라면, 다양한 관점의 기능적 한계 때문에 날 몇 시간이고 속일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송이가 최초의 소원을 자각하며 다양한 관점의 힘이 크게 강해졌으니 모를 일이야.
“휴…”
“왜 이렇게 한숨을 계속 쉬어? 일은 잘 풀리고 있는걸?”
“그러게.”
동료들이 나만 쫓아내고 자기들끼리 일을 꾸미는 느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이런 말을 꺼내면 미로가 뭐라고 대답할 줄도 알아.
‘은솔이도 찬성했는걸? 애초에 네가 거의 세운 계획인데?’
나는 모르는 또 다른 내가 짠 판에 휘둘리는 듯한 불쾌함.
시간대여기의 특성상 이런 기이한 일이 생길 수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솔직히, 이 상황이 조금 무서웠다.
앞으로는 시간대여기와 얽힐 때 그동안처럼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도 이겨내야 하는 시련의 일종인 걸까?
이렇듯, 내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심도 높은 고민에 빠진 시점.
옆에서 미로가 정신없이 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타닥!
“이얍! 이야압!”
“…”
“떠, 떴다! 아자!”
어지간하면 특이한 행동도 심오한 계획인가보다 하고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미로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미로.”
“응?”
“지금 뭐 하는 거야?”
“왕신 3,000연차 지르는 중!”
“… 왕신?”
“301호 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게임이야.”
“… 3,000 연차?”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 현실에선, 아리가 핸드폰 요금 10만 원 넘지 못하게 통제했단 말이야! 아리 진짜 너무하지 않아?”
“…”
“돈도 많으면서 한 달에 10만 원이 뭐야? 엄마한테 10만 원이 아까워? 흥! 이미 가챠 400만 원어치 질렀지롱~!”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얘들아, 미로가 아리 몰래 모바일 게임에 400만 원 과금하는 게 진짜 계획 맞니?
그 사이, 미로는 눈을 부릅뜬 채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리며 어지간한 직장인 월급을 능가하는 돈을 모바일 게임에 쏟아붓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미로, 왕신이 무슨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301호 내부에서 인기 있는 게임 아니야?”
“응.”
“내 말은, 너도 오늘 처음 보는 게임일 것 같은데.”
301호와 현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간극이 있고, 301호에서 유행한 게임이 현실에서도 유행했을 리가 없다.
즉, 저 ‘왕신’이라는 게임은 미로도 오늘 처음 해보는 게임일 확률이 높아.
“맞아. 스토어 랭킹 1위라서 그냥 다운받은거야.”
“오, 오늘 처음 보는 게임에 그 돈 쓰면 재밌어?”
미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게임인지도 몰라서 재미없어.”
“그, 그럼 대체 과금을 왜 하는 건데?”
“후후…!”
미로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게임 화면을 열심히 캡처하기 시작했다.
“은솔이는 잘 모르는구나? 게임이 재밌는 게 아니라 이게 진짜야!”
곧, 미로는 캡처한 화면을 인터넷에 올리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 : 오늘 시작한 뉴비입니당!
무료로 지른 단챠에서 사마엘(SSR), 칼리스토(SSR), 발리타(SSR), 기타 등등이 전부 떴어요.
이거 좋은 건가요?」
“…”
어딘가에 있을 동료들에게 마음속으로 간곡히 물었다.
얘들아, 이거 진짜 계획 맞지?
“참, 은솔아.”
“…”
“어제 회의하면서 네 시간 다 썼어. 다시 1시간 빌려줘.”
오